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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58화 (358/488)
  • 358화

    *

    내일이면 황제가 이곳을 떠난다. 안 그래도 매일같이 연회를 가장해 술을 퍼마시던 재규어들은 이런 기념비적인 날을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평소보다 몇 배로 풍성한 정찬을 계획했다.

    마치 이날만 기다린 것처럼 와인 창고를 탈탈 털어 와, 온갖 질 좋은 술들을 드넓은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랬다. 분명 마지막 연회를 즐길 생각에 한껏 부풀었다. 부풀었었는데…….

    “대장. 대체 왜 우리 영지엔 저런 쓸모없는 것들이 자꾸 기어들어 오는 거요?”

    “시끄러워.”

    “뱀으로도 모자라 이젠 스라소니까지.”

    “폐하의 손님이다.”

    “쩝. 그러면 별수 있나.”

    사실 재규어들의 큰 반감을 샀던 뱀은 생각보다 그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예상과 달리 포레스트가 이엘뿐 아니라 다른 종족들에게도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놈의 주인인 로빈과 전혀 달랐다. 특히나 이엘이 하는 말엔 의문조차 갖지 않고 곧장 따를 정도였다. 그러니 포레스트가 이곳에 머무는 것에 재규어들은 딱히 불만을 갖진 않았다.

    하지만 저쪽은 사정이 다르다.

    “어? 이거 축복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 아니야?! 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내가 이 열매를 다시 보는 날이 오다니.”

    “맛있으면 조용히 처먹어.”

    “야, 밀로. 넌 이 맛있는 걸 그동안 혼자 먹었냐? 우리한텐 말도 없이?”

    “내가 미쳤다고 너네한테 말하냐? 말하면 내려오겠다고 발광을 할 텐데.”

    용의 존재는 극비 사항이기 때문에 이카르와 몇몇 재규어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밀로와 킨의 정체를 모르는 상태였다. 두 사람을 인간으로 알고 있는 재규어들은 감히 평범한 인간이 자신들의 연회에 참석했다는 것에 극심한 불만을 표출했지만, 사실 그들의 원성은 그쪽보다 다른 쪽에 더 극렬하게 나타났다.

    “놀고먹기 좋아하는 꼴을 보아하니 내 종족이랑 잘 맞는 것 같은데?”

    이엘에게만 순진한 척 굴고 그 외 다른 종족에게는 거만하고 방자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취하는 저 스라소니. 여기가 재규어의 영지라는 건 알고 있는 건지 의심이 될 정도로 마치 제 영지 돌아다니듯 마구 휘젓고 다녔다.

    “다들 표정이 왜 그래? 오늘이 마지막 밤이라 다들 즐기려고 모인 것 아니었어?”

    “…….”

    “분위기 좀 띄워 봐! 여긴 뭐 오케스트라 같은 건 없어?”

    “유클리드. 아직 폐하께서 오시지 않았으니 가만히 있어라.”

    결국 르네에게 한 소리 들었다. 유클리드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마련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게 주어진 자리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실소했다. 폐하께서 앉으실 자리는 저쪽인데 이렇게 자리가 멀어서야……. 황제의 명령으로 자신을 정찬에 부르긴 했는데 못마땅한 건 여전하니 이렇게 먼 자리를 준 게 틀림없다.

    유클리드는 킥킥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재규어 놈들. 은근히 우리랑 비슷한 구석이 있네.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냐? 얍실한 모습이 언뜻 제 종족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앞에서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는 이카르를 힐끔 바라보다가 이번엔 시선을 연회장 정중앙으로 돌렸다.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벽안. 인간이라고 보기엔 어려울 만큼 뛰어난 신체 발달과 외모. 하지만 보통의 이종족에게서 느낄 수 없는 냄새. 아니, 냄새라고 표현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저 두 사람에게선 그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으니까.

    “용?”

    재규어들이 밀로와 킨을 인간으로 생각했던 건, 그들이 용을 접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용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저희끼리 살던 종족이었고 이종족들 중에서도 그들과 만난 개체는 굉장히 드물었다. 특히 재규어들은 용이 땅에 내려왔던 2차 전쟁 때까지도 뿔뿔이 흩어져 살 만큼 멸족에 가까웠던 종족이니까.

    하지만 유클리드는 다르다. 여기 있는 개체들 중 그 누구보다 오래 살았다. 용을 직접 마주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소리였다.

    “용이 맞는 것 같은데…….”

    와인을 마시며 시선을 두 사람에게 집중시켰다. 유클리드가 이엘에게 부탁해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건 전적으로 저놈들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피부가 창백한 저놈.

    ‘나 너 알아! 너 되게 오래 살아 있구나? 아직도 안 죽었네.’

    이엘의 허락을 받고 하이에나의 감시하에 후원으로 나왔던 유클리드는 누군가와 마주쳤다. 저를 알아본 놈은 삿대질을 하며 반갑다는 듯 알은체를 해 왔다. 이곳에 여러 종족이 모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중에 푸른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갖고 있는 자는 없었다. 유클리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난 네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모르겠지. 네가 날 어떻게 알아?’

    ‘…….’

    ‘너 아직도 스라소니의 우두머리야?’

    ‘글쎄. 내가 그걸 왜 말해야 하지?’

    ‘고집부리긴.’

    인간? 아니. 인간이 저런 말투를 구사하진 않지. 푸른 머리와 벽안은 인간들 사이에서 흔한 편이긴 했지만 그의 외양은 인간이 아니었다. 유클리드는 소년을 가만히 뚫어져라 쳐다봤다. 누가 봐도 우논인데 종족을 통 모르겠네.

    ‘뭘 그렇게 쳐다봐?’

    ‘말하는 꼬락서니가 인간은 아니고.’

    ‘아, 요새 인간들은 이런 말투 안 써?’

    ‘근데 무슨 종족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폐하의 동맹 중엔 너 같은 종족은 없거든.’

    ‘동맹이 아닐 수도 있잖아?’

    ‘…….’

    ‘이종족이 아닐 수도 있고?’

    소년은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유클리드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쳤다. 그때까지도 멍하니 소년의 뒷모습만 쳐다보던 유클리드가 코를 킁킁거리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냄새가 나질 않는다. 이종족 특유의 냄새가…… 전혀 나질 않아.

    그리고 그 순간 유클리드의 머릿속엔 어떤 종족이 하나 떠올랐다. 저 외양과 냄새……. 그 종족밖에 없다.

    “그럼 용까지 동맹이 됐나?”

    가만 보자, 이거…… 내가 진짜 줄을 잘 선 모양인데? 그 생각에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용까지 동맹으로 만들었지? 그것도 두 놈씩이나? 용이 이곳에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그 용을 두 마리나 곁에 두고 있다는 건 더 신기한 일이다. 알면 알수록 상상을 깨 버리는 여자였다.

    유클리드가 이엘의 낙승을 예상한 건 단순히 제 감을 믿어서만이 아니었다. 나타니엘은 아주 특별하다. 유클리드는 오랜 시간을 살아왔지만, 그녀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이런 특수한 환경에 홀로 남겨졌고, 더불어 그녀의 곁엔 멸족한 나자르도 함께 있다?

    그건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걸로밖에 안 보이지.

    거기에 용까지 들러붙어 있다면……. 이거 정말 해볼 만하겠는데? 유클리드는 재빨리 손으로 입을 가리며, 크게 터질 뻔한 웃음을 겨우 감췄다. 아, 젠장. 또 손에 피를 묻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짜릿해서 죽을 것 같아.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당장 전쟁을 일으켜서 날뛰고 싶다.

    “유클리드.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여기에 참석한 건진 모르겠지만, 허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기척도 없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깬 건 다름 아닌 노아였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가져가 그 안에 와인을 콸콸 따르고 있었다. 유클리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노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네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 보네.”

    “…….”

    “언제부터 마신 거야? 온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유클리드는 코를 잡으며 미간을 찌푸리는 시늉을 했지만 속으로는 보기 드문 늑대의 모습이 신기해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그간 동맹 관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사이가 좋은 종족도 아니기 때문에 자주 만났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흐트러진 노아의 모습은 정말 처음 본 셈이었다.

    늘 번듯한 꼴만 보다가 이런 생소한 모습을 보니, 이건 또 이것 나름대로 신선하고 재밌었다. 남의 망가진 꼴이 이렇게나 보기 좋다니. 역시 난 내가 생각해도 참 속이 꼬였다니까. 유클리드가 끅끅거리며 노아의 빈 잔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자자, 마셔. 어차피 똑같이 버려진 처지끼리 오늘을 즐기자고. 이것 봐. 너랑 내가 배당받은 자리까지 똑같잖아? 우린 폐하의 눈 밖에 난 놈들이니까.”

    “…….”

    “근데 참 신기해.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넌 절대로 버려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든.”

    허우대만 멀쩡하면 뭘 하나. 여자 마음 하나 잡지 못해서 이렇게 버려지는 신세라니. 그래도 한때는 암컷들이 꽤나 선망하던 대상이 아니었나? 심지어 타 종족에서도 넘볼 만큼 손꼽히던 수컷이었는데……. 쯧. 역시 인간을 사랑하면 늘 끝이 비극이라니까.

    “폐하께 반지는 돌려드렸나?”

    “아, 황녀의 반지 말이야? 물론이지. 돌려드렸어.”

    유클리드의 대답에 노아는 저 멀리서 웃고 있는 이엘을 가만히 쳐다봤다. 황녀의 반지를 스라소니가 가져간 탓에 반지가 있던 그녀의 중지가 비워졌지만, 그동안 그곳을 노아의 반지가 대신 채워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군. 지금은 원래 주인이 돌아왔으니까. 이엘의 중지 위에서 반짝거리는 루비 반지는 자신이 선물한 반지가 아닌 황녀의 반지였다. 당연한 일인데 이런 사소한 것조차 질투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넌 대체 얼마나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좌천된 거야?”

    “…….”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관계만큼은 빠삭하거든. 근데 너랑 폐하는 쉽사리 어그러질 관계는 아니었다고 생각해.”

    “…….”

    “계속 그렇게 침묵할 거야?”

    “나와 폐하의 관계를 추측하기 전에 네 처지나 생각해라.”

    “…….”

    “나는 좌천돼서 이 자리라지만, 넌 올라온 게 고작 그 자리 아닌가.”

    쳇, 뼈를 때리는군. 유클리드가 입을 삐죽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사이 마지막 정찬이 시작됐다. 유클리드는 황제의 정찬 자리에 참석한 게 귀족회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사실상 처음 보는 셈이었다. 늘 서로를 향한 날 선 말만 오간다고 생각했는데,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참석한 인원이 문제였던 거군.

    동맹족만 있어서인지 그녀의 얼굴엔 평소와 다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작위적으로 웃는 미소가 아닌 자연스러운 미소가.

    “섭섭합니다. 폐하께서 오신 게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빨리 돌아가시다니요.”

    “맞습니다! 자주 좀 오십쇼.”

    “이것들이 폐하께 말하는 버릇하고는. 공대 제대로 안 하냐.”

    “이것 좀 보십쇼, 폐하. 우리 대장이 이렇게 저희를 갈군다니까요?”

    재규어들의 투정과 장난이 섞인 말에 결국 이엘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유클리드는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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