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화
생각해 보니 그녀는 산전수전 모든 풍파를 다 겪은 데다가 자신들과는 달리 죽음이라는 걸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인간이었다. 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는 소리다.
“미안하지만 킨, 네가 ‘그녀’를 만나는 건 불가능할 거야.”
“너무하네.”
“수지가 안 맞는 터라.”
킨을 향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이 거래의 우위는 킨이 아니라 자신이다. 애초에 이엘은 킨을 믿지 않았다. 용이란 종족은 미지의 종족이지만 딱 한 가지, 모두에게 익히 알려진 사실이 있다.
“또 네가 수틀려서 나와 내 오빠를 죽이면 어떡해?”
“오. 나를 뭐로 보는 거야?”
“용.”
“…….”
“동족에게도 가차 없는 용이잖아, 넌.”
잔악무도한 종족이라는 것. 신의 품을 떠난 뒤로 재미로 살육을 저지르고, 심지어 동족에게조차 잔인한 성정은 여전하다는 것.
“난 밀로를 믿는 거지, 용을 믿는 게 아니야.”
“흐음.”
“그러니까 괜한 수작 부리지 말고 돌아가서 쉬도록 해.”
“…….”
“넌 네 능력을 맹신하며 이곳의 이종족을 얕보는 모양인데, 글쎄. 어떨까?”
“…….”
“명확히 말하면 넌 내 동맹이 아니고, 여긴 내 동맹이 넘쳐나니까.”
아, 고소하다! 밀로가 실실 웃으며 얼이 나간 킨을 놀려 댔다. 우리 이엘은 입 닥치라는 말도 참 고상하게 한다니까? 금방이라도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밀로의 반응에 잠깐 넋을 놨던 킨이 한쪽 눈썹을 위로 틀어 올리며 제 옆에 있던 쿠션을 집어 밀로에게 던졌다.
“뭘 쪼개? 너도 용이잖아.”
“난 예외라는 말 못 들었어? 나의 엘이 난 예외래.”
“미친놈. 인간한테 미쳐서 동족을 버리다니.”
“응! 난 동족에게도 가차 없는 용이니까!”
아주 천진하게 대꾸하는 밀로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킨이 길게 한숨을 쉬더니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이엘의 앞에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야?”
웃으며 밀로와 눈빛을 주고받던 이엘은 킨이 내민 무언가를 집어 들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마름모꼴의 유리 조각처럼 단단하고 반짝거리는 물건이었다. 특이하게도 아주 새카만 색을 띠고 있었는데, 탁자 위에 드리워진 햇빛에선 투명한 모습으로 변하는 걸 목격했다.
“비늘이야.”
“뭐?”
“대충 밀로한테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그건 용의 비늘 중에서도 아주 특이한 비늘이지.”
“와, 진짜 또라이네. 그걸 주냐?!”
이번엔 밀로가 흥분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날카로운 반응에 이엘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비늘을 조심스레 잡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비늘을 집자마자 손끝이 찌릿했고, 어딘지 모르게 보호석과 비슷한 느낌이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그렇다고 보호석처럼 기분 나쁜 건 아니다. 단지 비늘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운이 보호석과 비슷했을 뿐.
손바닥 위에 놓은 비늘은 아주 새카맸다. 그 어떤 검은색보다도 새카만 색이었다. 그곳에 정신을 집중하면 빨려 들어갈 것처럼, 오묘하고 이상한 색이었다.
“이게…… 그 비늘이라고?”
밀로의 말에 따르면 용에겐 아주 특별한 비늘이 하나 있는데, 그걸 떼면 깊은 잠에 빠져 버리고 다시 붙일 때까지 깨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밀로는 킨과 함께 자신을 방해하는 용들의 비늘을 떼어 잠재우고 이곳에 내려왔다고 했다.
아름답다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굉장히 무겁고 차가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 손바닥 안에서 가볍고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유리 조각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웠으나 어느덧 손 안에서 마구 돌려도 간지러울 정도로 무디게 느껴졌다.
그야말로 ‘이상한 물체’였다. 하지만…….
“내겐 쓸모가 없어.”
“…….”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용의 비늘이라 값어치가 상당하다고 한들, 지금의 내겐 필요치 않아. 하물며 보석도 큰 의미를 갖지 못하니까.”
신기하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실용성이 떨어지니 거래의 대가가 되지 못하고, 뇌물로서의 가치도 떨어진다.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이엘은 비늘을 내려놓고 다시 킨의 앞으로 돌려주었다.
“구경하는 걸로 만족할게.”
“꽤 실용성이 있을 텐데?”
“…….”
“이 비늘을 떼면 그 용은 잠들지만, 다시 갖다 붙이면 잠에서 깨어나거든? 근데 이건 다른 종족에겐 반대로 작용해.”
“그 얘긴…….”
“이걸 용이 아닌 다른 종족에게 붙이면 아주 깊은 잠에 빠진다는 소리지.”
그렇게 말해도 이엘의 구미를 당기진 못했다. 그녀가 존재하는 곳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않으면 목이 잘려 죽는 세상이었다. 이런 곳에서 고작 잠에 빠뜨리는 비늘은 큰 가치가 없다. 차라리 로빈이 건넨 약병이 더 쓸모 있을 듯했다.
“근데 다른 종족에게 한 번 붙이면 영영 뗄 수 없어.”
“…….”
“심지어 나자르도 못 떼.”
“나자르도?”
그제야 이엘의 관심이 비늘에 닿았다. 킨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마구 끄덕이곤 열심히 첨언했다.
“응. 절∼대 못 떼. 아마 신도 못 뗄걸?”
“뭐?”
“물론 그 부분은 확실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나자르는 못 떼. 나자르가 못 뗀다는 건 신을 제외한 어떤 존재도 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정말 ‘영원한’ 잠에 빠지게 하는 물건이군. 죽음과 비슷한 의미라고 보면 될까? 이엘은 탁자 위에서 검은색 빛을 내는 비늘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엘. 그냥 거절해.”
“…….”
“이건 너무 위험해.”
밀로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며 방해했다. 그는 이엘이 관심도 갖지 못하게, 탁자에 놓여 있던 비늘을 잽싸게 가져가 제 품 안에 넣어 버렸다.
“미르. 줘 봐. 잠깐만 볼게.”
“안 돼. 이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아?”
“괜찮아. 홀리지 않을게.”
“너…….”
“비늘 따위에 홀리지 않아, 괜찮아. 줘.”
단호한 그녀의 말에 별수 없이 비늘을 꺼내 줘야 했다. 다시 이엘의 손에 들어간 비늘은 그렇게 한참이나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관찰을 마친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킨을 보았다.
“좋아. 거래에 응할게.”
“와아! 해냈다!”
“안 돼!”
킨과 밀로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킥킥거리며 웃는 킨의 얼굴을 밀쳐 내고 밀로가 이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거 도로 줘. 네가 갖기엔 위험한 물건이야.”
“왜?”
“왜냐니. 그게 얼마나 위험한데.”
“이게 보호석과 같으니까?”
“…….”
“처음부터 느낌이 이상했어. 묘하게 보호석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거든.”
이엘은 비늘을 위로 들어 올리며 햇빛에 비추었다. 정오의 햇빛을 받은 검은색 비늘은 점차 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엘은 보호석이 박혀 있는 목걸이를 빼내 비늘 옆에 나란히 들었다.
“하지만 나자르가 손댈 수 없다는 건, 그 이상의 존재가 만들었다는 소리가 되니까.”
“…….”
“이건 신이 만든 비늘이구나. 그리고 이건, 보호석처럼 신의 법칙에서 어긋난 비늘이구나. 라는 판단을 내렸거든?”
“똑똑해, 똑똑해. 너 정말 똑똑하구나?”
이엘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킨이 박수를 치며 그녀를 칭찬했다. 이엘은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밀로를 향해 괜찮다는 듯 미소 지어 주었다.
“그럼 승산이 있을 것 같아.”
“이엘. 승산이라니? 무슨 승산?”
“자세한 건 가닥이 잡힌 후에. 그때 얘기해 줄게. 어쨌든 이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오, 그럼 내 거래는 성립된 거야? 암컷 용을 만나게 해 줄 거야?”
신난 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눈을 반짝거렸다. 그 작위적인 모습에 밀로가 인상을 썼지만, 킨은 그대로 자리를 이동해 이엘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친근한 척 굴기 시작했다.
“와, 나 암컷 용을 만나는 건 진∼짜 오랜만이야. 미치겠어, 설레서!”
“미안한데 좀 떨어져 줄래?”
“왜? 이제 우리 가까워진 것 아니야?”
“아니야.”
“…….”
“좀 떨어져.”
냉담한 그녀의 말에 킨이 입을 삐죽거리더니 엉덩이를 움직여 이엘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킨. 그 전에 한 가지 말할 게 있어.”
“뭔데?”
“나도 ‘그녀’를 한 번밖에 못 만났어.”
“…….”
“그리고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조건은 스완의 능력에 드레인이 스며들어야 한다. 스완조차 원하는 때에 드레인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드레인 역시 이엘이나 스완을 만나는 것에 자유롭진 못하는 모양이었고.
“일단은 네 존재를 전해 두기는 할게. 대가는 받았으니 최선은 다할 거야.”
“확신은 못 하고?”
“응. 확답은 어려워. 애초에 네가 너무 큰 걸 바란 거야.”
“냉정하네.”
“너도 대충 예감했을 것 아냐. ‘그녀’를 만나는 게 쉽지 않을 거란 걸.”
“그렇긴 하지. 근데 난 네 능력을 믿었거든.”
“그렇다면 조금 미안하네. 난 네 생각만큼 매력적이지도, 특별하지도 않으니까.”
“…….”
“난 아주 평범한 인간이야. 그걸 알아줬으면 해.”
이엘의 부드러운 화법에 킨도 납득한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를 옮겨, 원래 자신이 앉아 있던 곳으로 돌아가 누워 버렸다.
“알겠어. 그럼 대충 거래가 성립한 걸로 알고 난 기다릴게.”
“그래. 그동안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주면 더 좋고.”
“얌전은 내 전문이지.”
“부디 내가 아는 얌전이란 단어와 네가 말하는 얌전이란 단어가 같길 바라.”
“이런, 넌 정말 갈수록 매력적이구나?”
“차향이 좋은데 이제 그만 마셔 주면 안 될까? 네 찻잔이 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닥치라는 말을 참 여러 가지로 표현하네.”
“눈치는 있구나.”
와……. 기 빨린다. 밀로는 입을 쩍 벌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진짜. 저 비늘로 이엘이 뭘 할 생각인지……. 밀로는 한참 그녀의 손에 쥐여진 비늘을 바라보다가 애써 시선을 돌리며 외면했다.
기껏해야 영면하는 것에 불과한데, 뭐. 용에게나 중요한 비늘이지, 다른 종족에겐 큰 의미가 없으니까. 별일이야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억지로 비늘 생각을 지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