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슈프가 낑낑 앓는 소리를 내며 그 커다란 덩치로 침대 위에 올라올 것처럼 바동거렸다. 정말 올라왔다간 침대가 무너질 것 같아, 이엘이 웃으며 슈프가 있는 바닥으로 내려왔다. 따뜻한 카펫 위에 나란히 누워서 높디높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걱정 마, 오헬. 내가 꼭 널 지켜 줄게. 뱀이 공격해 와도 예전처럼 쉽게 당하지 않을 거야!”
“역시 든든한 내 기사님.”
이엘의 칭찬에 슈프가 기분이 좋아진 건지, 엄청난 속도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이엘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늑대를 꼭 끌어안으며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타락의 길로, 밑도 끝도 없는 어둠의 길로 몰릴지라도. 예전처럼 무력하게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엘은 납작한 제 배에 손을 얹은 채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아득바득 버티고 살아남아서, 할 수 있는 한계까지 버티다가 떨어질 것이다.
똑똑.
그렇게 한참 슈프를 끌어안은 채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오랜만에 그녀의 침실 문이 누군가로 인해 두드려졌다.
“엘. 나야. 잠깐 들어가도 돼?”
밀로의 목소리에 슈프가 먼저 바닥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선 이엘이 침실 문을 열어 그 앞에 서 있던 밀로를 반겼다.
“어서 와, 밀로.”
“응. 할 얘기가 있어서 잠깐 왔어. 얘도 데려왔는데 괜찮아?”
“안녕, 폐하.”
밀로가 옆으로 비켜서자, 모습을 드러낸 킨이 느른한 표정으로 이엘을 향해 손 인사를 건넸다.
“나도 폐하한테 궁금한 게 많거든.”
“좋아요. 들어와요. 슈프, 미안한데 잠깐만 자리를 비켜 줄래?”
“알겠어요.”
슈프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온 킨은 가장 먼저 눈에 띈 커다란 소파로 달려가 그 위에 잽싸게 누워 버렸다.
“이야. 역시 황제의 침실은 다르네. 폐하, 괜찮으면 나도 여기서 좀 자면 안 될까? 지금 내 방은 엄청 비좁거든.”
“내일이면 여길 떠날 예정이에요. 조금만 참아요.”
“에이, 우리 사이에 무슨 격식을 그렇게 차려? 내가 여기 땅에 속한 종족이 아니긴 해도, 넌 엄연히 황제잖아? 그렇게까지 내게 공대할 필요 없어.”
“그래? 그럼 편히 말할게.”
호오. 생각보다 재밌는데? 킨이 기분 나쁘게 킬킬 웃으며 꼬부라진 제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래, 이엘. 걔는 그냥 막 대해도 되는 놈이야.”
밀로의 빈정거림에도 킨은 웃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더니 제 반대편 소파를 손으로 가리키며 이엘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앉아서 천천히 얘기하자. 어때?”
“좋아.”
“왜 밀로가 너한테 푹 빠졌는지 알 것 같아. 내가 아는 인간들 중에서 제일 매력적이야.”
“뭔 헛소리야. 네가 아는 인간이 어디 있어? 다 죽었잖아.”
밀로가 어이없다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저건 왜 자꾸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데려왔더니 저딴 헛소리나 주절댈 거면 지금이라도 끌고 나가야겠다.
“야. 그냥 너 나가라.”
“정말 네게 뭔가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이엘. 헛소리 들어 줄 필요 없어.”
“밀로뿐만 아니라 내 종족의 상당수가 네게 관심을 갖는 걸 보면.”
“킨. 적당히 해.”
줄곧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장단을 맞춰 주던 밀로가 이번엔 사납게 킨의 말을 끊어 버렸다.
“이엘한테 그 얘기 하지 말라고 했지.”
“얘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 다른 얘기도 아니고 자기 얘기인데.”
“킨. 마지막 경고야. 입 다물어.”
“흐음. 그래? 그럼 쟤한테 물어볼까? 나타니엘. 넌 알고 싶지 않아?”
“…….”
“왜 밀로가 4년 전에 네 곁을 떠나야만 했고, 어떻게 네 비밀을 알고 있는지.”
“킨!”
“궁금해.”
차분한 이엘의 대답에 킨을 향해 화를 내던 밀로가 그 자리에 얼어붙듯 딱딱하게 굳었다. 그 반응이 웃겼던 건지, 킨은 여전히 낄낄거리며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무거운 적막을 즐기고 있었다.
“궁금하지만 밀로가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릴 거야.”
“오. 그 대답은 예상외인데.”
“그러니까 쓸데없는 말로 밀로의 속을 뒤집어 놓지 마.”
꽤 단호한 그녀의 명령에 킨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반쯤 누워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장난이야, 장난.”
“상대가 기분이 나쁘면 그건 더 이상 장난이 아니야.”
“쳇. 그것참, 깐깐하네. 나는 내 나름의 친근감을 표시한 건데.”
“그거 얘기하려고 날 찾아온 거야?”
본론부터 말하라는 압박이었다. 그에 킨도 장난만 치던 분위기를 죽였다.
한편 밀로는 킨의 짓궂은 장난에도 차분하게 대응하는 이엘을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엘이 언제 커서 이렇게 어른이 되었을까. 하긴. 이쪽 시간으로 4년이나 흘렀고, 이엘은 자신과 다른 인간이니 성숙해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좋아. 암컷 용이 여기 있다는 소릴 들었어.”
“…….”
“그녀를 만나게 해 줘.”
킨의 당당한 요구에 이엘이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다물었다. 밀로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당혹스러움이 킨에게서도 똑같이 느껴졌다. 한마디로 제멋대로라는 소리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마치 떼쓰는 어린애를 마주한 것처럼 골치가 아파 왔다. 이엘은 탁자 위에 놓인 컵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켜며 킨의 말에 차갑게 응수했다.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음에도 불구하고 킨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킨. 밀로가 널 여기에 데려왔다는 건, 네가 내게 해가 되지 않기 때문일 거야.”
“…….”
“그렇다고 해서 네가 나의 아군은 아니잖아? 내가 네 요구를 들어줘야만 하는 이유가 없단 소리야.”
“내가 네 아군이 되면. 들어줄 거야?”
킨의 푸른색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듯 영롱해졌다. 밀로와 똑같은 머리색과 눈동자 색인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킨의 눈동자가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마치 푸른색 바다가 눈에 꽉 찬 것처럼, 더없이 밝고 맑았다.
그제야 이엘은 킨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봤다. 외관은 밀로보다 한두 살 위였지만, 체구는 더 작은 탓에 훨씬 어리게 보였다. 게다가 빛이라곤 쐬어 본 적도 없는 것처럼 새하얗고 투명한 피부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더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순수하지 않은 존재가, 소름 끼칠 정도로 순수하게 보여서.
“네 오빠라는 놈. 걜 우리가 사는 곳에 숨겨 줄까?”
이엘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킨은 그걸 놓치지 않았고, 그녀를 향해 여유를 가득 머금은 미소를 지었다.
“아, 네 오빠를 호시탐탐 노릴 내 동족 놈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와 밀로의 협공이면 모두 재울 수 있으니까.”
그때 밀로가 말했던 비늘 얘기인 듯했다. 몸에 있는 비늘을 떼어 내면 죽은 것처럼 영원한 잠에 빠지고 만다는.
“왜 그녀를 만나고 싶은 건지 대답해 줘.”
그러나 무턱대고 그를 믿을 순 없었다. 정말 그게 가능했더라면 밀로가 처음부터 제안했을 것이다. 밀로는 이온이 이엘의 약점이라는 걸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밀로가 저 제안을 하지 않았다는 건, 거기에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미쳤냐, 킨? 그런 식으로 인간의 생명을 연명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 이엘이 원하는 건 황자를 살리는 거야. 하지만 지금 그 상태로 우리가 사는 곳에 데려가면 눈을 못 뜨는 건 똑같다고.”
“살려서 데려가면 되잖아?”
“어떻게 살리겠단 거야?”
“왜 못 살려? 늑대의 기름. 타이곤의 갈기. 독수리의 눈알.”
“…….”
“황자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제물 아니었어? 그걸 구해. 그래서 살려. 그리고 너랑 내가 나타니엘과 황자를 데리고 우리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면 돼.”
역시나 킨도 알고 있었다. 이엘은 밀로와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직전에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밀로의 동족들이 이온의 존재와 이온을 살리기 위해 필요했던 3가지 조건을 알고 있다고. 밀로가 그녀의 곁을 떠나야 했던 이유 중엔 용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도 있었던 것이다.
“마침 네게 눈이 돌아가 있는 타이곤과 독수리가 있다며.”
킨의 냉소적인 말에 이엘의 미간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걔네한테 달라고 해. 네가 내 오라비를 살리기 위해 필요하다고 하면 금방 줄걸? 원래 인간에게 눈이 돌아간 이종족들은 그렇게 단순해지거든.”
“…….”
“싫다고 하면 내가 도려내 줄 수도 있어. 물론 여긴 땅이라 본래 내가 가진 역량을 전부 끌어내진 못하겠지만 그깟 두 마리 정도는 거뜬히 해치울 수 있……,”
“미르.”
“어, 어?”
킨의 말을 자른 이엘이 대뜸 밀로를 불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바라보듯 킨을 보고 있던 밀로가 그녀의 부름에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전 말은 킨이 잘못했다.
그가 말한 타이곤과 독수리는 레온과 르네를 일컫는 것일 터였다. 이엘과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킨이 섣부르게 언급할 사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로 킨을 탓할 수 없는 건 그가 인간인 이엘과 완전히 다른, 이종족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용은 여타 이종족들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종족이었다. 인간은커녕 다른 이종족들과도 어울려 산 적이 없었고, 신을 떠난 뒤로는 그 누구와도 접촉한 적이 없는 종족이니까.
날 때부터 제멋대로에 공감 능력 같은 건 찾아볼 수조차 없는 종족이 용이었다. 사회성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밀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역시 저 자식과 손을 잡는 게 아니었다.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 이엘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말을 수천 번 반복했는데, 킨은 정말 글자 그대로 ‘함부로 대하지 않을’뿐이었다.
“걱정 마. 너와 킨에게 화를 낼 생각 없으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는 제 입장을 고려해 준 모양이었다. 밀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미안함을 담은 표정으로 이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곤 킨에게도 동일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킨. 난 네게 바라는 것도, 네게서 얻어 낼 것도 없어.”
“어라?”
“그 얘기는 너도 내게서 얻어 갈 게 없다는 소리야.”
“…….”
“그냥 밀로와 함께 즐기다가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
이런. 결국 킨이 삐져나오는 웃음을 억누르지 못한 채 배를 잡고 폭소했다. 한 방 먹었네. 인간이라 얕보았던 건 사실이지만, 저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