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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55화 (355/488)

355화

“그러나 뜻하지 않게 윌터 백작의 둘째 아들이 연구원에 들어갔다가 중죄로 죽어 버리는 바람에 승계권이 넘어가는 일은 없었다고 하네요.”

유클리드는 올리세스의 동생인 리노가 죽었다고 알고 있으니, 아마 저기서 말하는 백작의 둘째 아들이란 리노를 가리키는 것일 터였다.

“사안이 꽤 심각했던 건지 그 당시에 윌터 백작이 방계까지 수소문하며 양자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윌터 백작령에 방계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이라더군요.”

“아, 그래서…….”

“예?”

“아니야. 계속 얘기해 보게.”

아마 루벤과 조카, 조카의 아들이 백작령에 발이 묶이게 된 계기도 비슷할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실력만으로 작위를 받고, 그 대단하다던 윌터 백작가와 결혼으로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백작가의 승계권까지 노렸는지도 모르지. 루벤, 그 노인은 젊은 시절에 그렇게나 야망이 강했다.

“그때 당시에 나자르인까지 불러서 올리세스의 병세를 파악했지만 성력으로 치료하는 것도 그때뿐이었지, 큰 차도는 없었던 듯합니다.”

“지금은 멀쩡하지 않나?”

“맞습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올리세스가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시체처럼 창백했고, 또 어떨 때는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감정이 들떠 있기도 했거든요.”

“…….”

“그땐 놈이 원래 그런 성격이라고 치부하고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병적으로 문제가 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노아도 이엘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리노를 찾으러 떠나기 전, 노아는 올리세스와 그의 집사가 하는 대화를 우연히 들었는데 그때 올리세스가 최근까지도 몸이 좋지 않아 쓰러졌다고 했단다. 그걸 필사적으로 막아 주는 게 포필렌을 복용하는 것이라고 했고.

그러니까 유년 시절부터 이어진 병이 최근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그걸 포필렌을 복용하여 겨우 견디고 있다는 소리인가?

“제 어리석은 사견입니다만. 올리세스는 폐하의 모든 것을 빼앗을 생각인 듯합니다.”

“…….”

“황위뿐 아니라 폐하의 소유인 모든 것을요.”

“나자르, 오드 님에게 성력으로 치료를 받기 위해서군.”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다. 아마도 현재의 올리세스는 그저 생을 연명하는 수준인 듯했다. 겉으로는 건강한 듯 보이지만 그건 포필렌으로 인해 극한의 흥분을 끌어 쓰고 있는 것이지, 결코 병세가 완화된 게 아니다.

어릴 때 나자르의 성력으로 치료받은 건 일시적이기는 하나, 분명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지. 그래서 그게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 것이다. 황위에 오르면 나자르인 오드에게서 지속적으로 성력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순간 소름이 끼쳤다. 제 몸을 위해 성력이 필요한 주제에, 은밀한 곳에선 가짜 사제를 들여 신의 존재를 지우려 했다니. ……그러면서 나를 마녀사냥으로 몰아, 죽일 생각이다? 아주 잠깐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오드 님뿐만이 아닙니다.”

유클리드는 새파랗게 질린 이엘의 얼굴을 쳐다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놈은 폐하의 사람을 모두 앗아 갈 생각입니다. 아마도 그가 제일 관심 있게 보는 건 늑대겠군요.”

“……설마 노아를 말하는 거야?”

“놈이 노아에게 화친을 목적으로 접근했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과연 그게 끝일까요?”

“…….”

“폐하의 곁에 있는 모든 자들을 뺏을 생각입니다. 놈은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 줄곧 찝찝하던 게 이제야 풀렸네. 이엘과 올리세스는 실제로 마주한 적이 없는 사이였다. 기껏해야 이엘의 즉위식에 참석한 올리세스가 일방적으로 그녀를 봤을 뿐, 이엘은 올리세스의 얼굴조차 모른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에게서 듣는 올리세스는, 그녀를 과할 정도로 적대했다. 그저 황제를 향한 반역이라고만 보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가지 상황이 겹쳤던 거군. 이엘은 혀를 짧게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참, 이것을 돌려드려야겠죠?”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건지, 심각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앞에 유클리드가 웃으며 뭔가를 내밀었다. 그건 이엘이 유클리드에게 빌려줬던 황녀의 반지였다.

붉은 루비가 박혀 있는 반지가 다시 제게 돌아왔다. 이엘은 반지를 받아 중지에 끼워 넣었다.

“올리세스는 폐하께서 로빈의 영지에서 뱀을 하나 데려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황제가 애첩을 끼고 다닌다며, 영지 시찰의 실질적인 목적이 황제궁을 꽃으로 채우려는 건 아니냐는 풍문이 돌고 있었다. 로빈이 포레스트를 진상한 것이 찝찝한데도 그 어린 뱀을 데려왔던 것엔 그 이유도 포함됐다. 올리세스의 눈을 돌릴 만한 틈이 필요했으니까.

근데 조금 전의 대화로 미루어 보아, 아마 포레스트의 존재에 올리세스는 또 광분하고 있겠지. 여러 가지 이유로.

“폐하. 이제 저를 믿어 주시겠습니까?”

유클리드가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것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제 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저 스라소니는 결코 눈치 없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도 일부러 올리세스를 향한 증오심을 키우게 만들려고 눈치 없는 척 구는 것이다.

“그래, 유클리드 백. 그간 짐이 백작을 봐 왔던 시간 중 제일 유용한 시간이었어.”

“영광입니다. 전 앞으로도 열심히 폐하의 앞을 닦아 드릴 겁니다.”

“부디 그러길 바랄게.”

“혹 제가 가져온 정보가 마음에 드셨다면, 제가 감히 폐하께 한 가지 청을 올려도 될까요?”

“무엇이지?”

“모레면 이곳을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폐하의 여정에 민폐 끼치지 않고 제 영지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러니 내일 저녁에 있을 정찬에, 제게 참석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유클리드가 능글맞게 미소를 지었다. 저러고 있으니 그를 처음 봤던 날이 떠오른다. 다짜고짜 공격을 퍼부으며 널 데리러 왔다는 헛소리나 지껄였지. 그녀가 황위에 오른 뒤로는 자중하며 지냈던 것 같은데, 저 거만한 태도는 여전한 듯했다.

정말로 화기애애한 정찬 시간을 기대하는 건 아닐 테고……. 무슨 꿍꿍이지? 이엘이 그 생각에 쉽게 답하지 않자, 유클리드는 허허 웃으며 변명하듯 말을 붙였다.

“물론 저를 아주 믿지 못하시니 쉬이 허락하지 않으실 것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조금 억울하군요. 제가 가져온 정보가 그리 쓸데없는 편에 속하는 건 아니라고 자신했으니까요.”

“쓸데가 있고 없고는 백작이 정하는 게 아니다.”

선을 넘지 못하게 딱 잘라 낸 이엘의 반응에 유클리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제멋대로 굴었군요.”

“정찬 자리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그저 순수하게 궁금할 따름입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전 이곳에 온 뒤로 줄곧 혼자 식사를 해결하지 않았습니까? 마지막 날인데 너무 외로워서요.”

“말은 여전히 잘하는군.”

“순수한 욕심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좋아, 그렇게 하지.”

“영광입니다, 폐하!”

유클리드는 순수한 소년처럼 개구지게 웃으며 습관처럼 눈가를 찡긋거렸다.

*

이엘은 침대에 누운 채 제 옆에 놓았던 유리병 두 개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붉은색 액체가 담긴 병이었다.

‘붉은색 병엔 제 피에 독을 섞은 특수한 액체를 담았습니다. 파란색 병은 그 독의 해독제이고요.’

아주 오래전, 주드가 죽었던 그 습격 사건 때 이엘도 로빈의 독에 당했었다. 그에게서 받은 해독제로 독을 빼내고 오드의 성력으로 치료했음에도 로빈의 독은 몸에 미미하게 남아 오래도록 그녀를 혹사시켰다. 그러니 뱀의 독이 얼마나 강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엘은 로빈의 피와 독이 섞였다는 붉은 유리병을 눈앞에서 천천히 흔들었다. 찰랑거리던 액체가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가 금세 가라앉았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액체 한 방울에, 독의 주인인 로빈마저 살점이 녹았다.

“오헬. 그건 뭐야?”

배를 까뒤집은 채 바닥에 누워 시간을 죽이던 슈프가 마치 재미있는 놀잇감이라도 발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에 제 앞발을 얹었다. 그로 인해 침대 한쪽이 아래로 푹 꺼져, 이엘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이엘은 작게 웃으며 다정히 대답해 주었다.

“이건 로빈의 독이야.”

“헉. 그럼 위험한 거잖아!”

“괜찮아. 여기 해독제도 있거든.”

이엘이 침대에서 한 바퀴 데구루루 굴러와 슈프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슈프는 이엘이 보여 주는 푸른색 액체가 담긴 해독제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 커다란 앞발로 유리병을 톡 건드려 보았다.

“이걸 로빈 님이 준 거야?”

“응.”

“왜?”

“글쎄. 그 뱀의 속을 난들 알까.”

이엘은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는 하얀 늑대의 코를 손등으로 톡톡 만져 주고는 다시 천장을 바라보듯 벌러덩 누워 버렸다. 그러곤 귓가에 맴도는 뱀과의 대화를 되짚었다.

‘폐하. 페널티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뭐?’

‘선황이 정말 ‘그’를 만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그’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자라는 겁니다. 마치 보호석과 같지요. 나자르의 목숨과 성력을 깎아 만든 보호석. 무엇이든 대가가 필요합니다.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없다는 것,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로빈은 ‘그’를 만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경고했다. 무엇이든 대가가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 대가라는 건 누구에게든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엘은 달랐다. 그녀는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서 ‘그’를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었다. ‘그’와의 만남엔 어떤 대가도 없었다. 그게 이엘과 ‘목소리’의 거래 조건이었으니까. 언제든 이엘이 위험에 빠지면 ‘그’가 그녀를 구해 줄 것이다. 그녀의 목숨이 ‘목소리’에게 달려 있으므로.

‘육체의 수명 쪽보다는…… 영혼 쪽에 초점을 두고 싶습니다.’

하지만 영혼이라면…….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그’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받쳐 줘야 하는 조건이 항상 있었던 것이다. 그건 바로 신과 멀어져야 한다는 것.

가령 몇 년 전에 로빈의 영지에서 뱀과 함께 ‘그’를 만났을 때처럼 머무르는 공간이 ‘악’으로 가득 차 있다거나, 나자르인 오드와 물리적으로 멀어진 곳에 있을 때라든가. 등등의 조건들이 붙었다.

‘그’의 공간에 들어갈수록 신과 멀어진다는 죄악감은 들었지만…… 정말로 내 영혼이 좀먹힐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군. 어쩌면 알면서도 그 구렁텅이에 들어간 건지도 모른다.

이미 제 목숨을 ‘목소리’에게 주었다는 핑계로, 이엘은 순간의 위기만을 모면하기 위해 신보다는 ‘그’를 찾았던 것이다.

“알고 있었어. 내 스스로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응? 오헬? 무슨 말이야, 그게?”

“……아니야, 아무것도.”

누군가 나를 자꾸만 타락의 길로 내몰았다. 노아를 비롯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행복에 젖어 있을 때쯤, 나를 또 절망으로 밀어냈다. 결국 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이. 결국 넌 이온의 대체품일 뿐이라는 듯이.

결국 넌.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라는 듯이.

“오헬. 기분이 안 좋아? 나랑 같이 나가서 산책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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