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54화 (354/488)
  • 354화

    패티스의 말에 깜짝 놀란 앤디가 입을 쩍 벌렸다. 사람을…… 벌써 보냈다고? 그럼 이미 인간들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단 거야?! 솔직히 앤디는 패티스에게 욕먹을 각오로 꺼냈던 거였다.

    “어, 언제요?”

    “피시에게서 폐하와 관련된 소문을 들었을 때.”

    “폐하와 죽은 황자를 두고 귀족 간 알력 다툼이 있었다는 소문이요?”

    “그래. 그때 조르단 공에게 연통을 넣어 접선을 요구했어.”

    “…….”

    “물론 답이 온 건 최근이지만.”

    아마도 두어 달 전일 것이다. 그때 앤디와 패티스는 피시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엘과 이온이 어렸을 때, 각각 황녀와 황자를 지지하는 귀족 세력이 존재했었다는.

    황자였던 아르세니온의 자리가 그들의 예상과 달리 굳건하지 않았다는 게 의심스러웠기에, 패티스는 먼저 조르단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다.

    “1제국 때의 일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니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경의 말처럼 인간들 중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조르단 공뿐이니.”

    “…….”

    “근데 뭘 그렇게 충격적인 얼굴로 쳐다보는 거야? 경도 조금 전에 나더러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라고 하지 않았나?”

    “정말 맺을 줄 몰랐으니까요.”

    앤디의 말에 패티스가 사정없이 인상을 찌푸렸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조르단 공작이 그러더군. 실제로 폐하가 어렸을 때, 황위계승권과 관련하여 파벌이 있었던 게 맞다고.”

    “정말입니까?”

    “그에 관해선 조르단 공작이 말을 아끼고 있다.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해. 그는 1제국 때부터 공신 가문이었으니까. 황가와 관련된 이야기를 모를 리 없어.”

    “그러고 보니 조르단 공작은 폐하가 황위에 오르시는 걸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도 했죠.”

    “……그랬지.”

    그 지지가 이유 있는 지지였다면? 만일 자신들의 상상대로 이온이 아니라, 이엘이 먼저 태어났다면?

    “패티스 님. 이게 이제 와선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요.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만약 정말로 폐하께서 죽은 황자보다 먼저 태어나셨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뭘 어떻게 되겠나. 당연히 폐하의 지지 기반이 더 튼튼해지는 거지.”

    안 그래도 원로회는 이엘이 여자라는 이유로 황제가 될 수 없다며 반박했던 전적이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엘은 그들을 가볍게 제압하고 황위에 올랐지만, 여전히 그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구귀족 세력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이엘이 첫째라면. 황자가 아닌 황녀가 사실은 먼저 태어났다면, 그 말은 쏙 들어가겠지. 귀찮은 일 하나 더는 셈이었다.

    “하여간 인간들은 멍청하다니까. 그깟 수컷이 뭐라고. 그깟 첫째가 뭐라고. 그런 쓸데없는 것에 몰두하니까 나라 꼴이 그렇게 된 것이다. 황위는 자질이 있는 자가 오르는 게 맞아. 그건 성별과 나이에 관계없고.”

    패티스는 혀를 차며 그렇게 중얼거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잘됐다. 아직 조르단이 확실하게 대답한 건 아니지만, 편지에 적힌 반응으로 보아 자신들의 예측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확신이 든 것이다.

    사실 이엘의 황위는 올리세스가 생각하는 것만큼 위태롭지 않다. 그녀의 동맹 종족은 상당 부분이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있는 종족들이었고, 개체수도 다른 종족들에 비해 월등히 많은 편이었다. 게다가 그 관계는 의외로 견고하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인간들을 제압할 수 있는 위치였지만, 그녀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따로 있었다.

    “성전과의 관계만 잘 수립하면 돼.”

    “…….”

    “그러면 폐하의 위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신을 믿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모두 마음속에 신을 품고 살아간다. 그건 이종족이나 인간 모두 동일하다. 힘들고 괴로운 상황이 오면, 자기도 모르게 신을 찾는 게 그들의 본성이었다. 모두가 신으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드 님이 우리 편에 계시는 한, 황위는 공고하다.”

    “그 얘기는 올리세스의 마을에 있는 가짜 사제 놈을 한시라도 빨리 제거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가끔 경이 내 종족보다 낫다는 생각을 해.”

    “칭찬하시는 겁니까? 지금 절 칭찬하셨어요?!”

    오늘 저 하이에나의 말에 여러 번 놀란다. 앤디는 패티스의 입에서 자신을 향한 칭찬의 소리가 나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저가 꿈을 꾸는 건 아닌가 싶어 제 볼을 꼬집는, 다소 한심한 행동을 했다.

    “조금 전 말을 취소하고 싶어지기 전에, 그런 이상한 행동은 그만하지 그래.”

    “알겠습니다.”

    잽싸게 손을 내린 앤디가 언제라도 명령을 이행할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패티스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곤 말을 덧붙였다.

    “리노 윌터를 빼돌리는 건 어려워도, 그 가짜 사제 놈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다만 그 마을은 사제와 올리세스를 광신자처럼 믿고 있으니, 그 점을 유의해야 한다.”

    “예, 백작님.”

    “생각보다 어려울 거야. 그 마을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으면서 뿌리만 뽑아낸다는 게.”

    패티스는 그렇게 한참을 읊조리며 저 멀리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석양을 가만히 쳐다봤다. 폐하의 지지 기반이 지금보다 더 단단해질 수 있다. 혈통과 관례 따위를 운운하는 놈들에게까지 확실한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으니 이엘과 이온의 비화를 알아내야 한다.

    모든 게 순조롭다. 패티스는 스완이 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달려가는 앤디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면 낙승이야. 반드시 폐하의 낙승으로 끝낼 것이다.

    “그녀의 발목을 잡는 일만 없다면.”

    가령 죽은 줄 알았던 황자가 살아 있었다던가 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만 아니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나타니엘은 지금처럼 평화롭게 황위에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

    “생각보다 인내심이 강한 편이군. 의외야.”

    “폐하를 알현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지난 3년간 직접 겪어 왔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유클리드가 이곳 이카르의 영지에 찾아온 지도 일주일이 훌쩍 지났건만 이엘은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클리드는 성급한 기색 하나 없이 그녀가 저를 부를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그게 마치 백작을 만나 주지 않는 짐을 탓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럴 리 있겠습니까. 폐하를 뵙기 위해 1년이 걸린다고 해도 마땅히 기다릴 것인데요.”

    “어쨌든 백작이 이렇게 당당하게 짐을 찾아왔다는 건, 올리세스로부터 쓸 만한 정보를 얻었다는 뜻이겠지?”

    “올리세스의 영지 중 포필렌을 재배하는 영지와 사병을 모아 활동하는 영지를 알아냈습니다.”

    이엘은 유클리드로부터 지도를 건네받아 펼쳤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역시 생각보다 많은 영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소유하고 있는 영지의 개수가 아니었다. 모두 바다와 맞닿아 있는 버려진 땅이었고 형식적으론 황가의 소유였으나, 명확히 따지자면 황가의 소유라고 보기도 어려운 곳들이었다. 어차피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 누가 가져도 의미는 없었지만…….

    “강제로 노동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인간이든 이종족이든 바다로부터 살아남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이에나를 제외하고는요.”

    유클리드의 연이은 설명에 계속해서 한숨만 나왔다. 1제국과 달리 지금의 제국은 모든 인간과 이종족의 개체수를 파악하는 게 어려웠다. 물론 영지마다 호구조사를 매년 실시하고 있고 종족에 관계없이 제국민으로 등록하는 절차가 제국법상 존재하지만, 이를 따르지 않는 자들도 꽤 있었다.

    과거 인식표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였다. 그때도 보호라는 명목으로 법을 앞세워 강제했지만 그게 지독한 악습이 되어 모두를 괴롭혔다. 끝내 모두의 목숨을 앗아 가기까지 했으니 꺼려하는 것도 당연하다. 아직까진 득보다 실을 더 따지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누가 어디서 죽어 가고 있어도, 혹은 강제로 노역을 당하고 있어도, 그걸 전부 파악하는 건 어려웠던 것이다.

    “두 차례의 전쟁으로 인해 인구수의 반 이상이 줄었어. 이종족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

    “그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 최대한 제도로 끌어들이거나 러셀 후작과 같이 믿을 만한 귀족들에게 인간들을 의탁했다.”

    “하지만 모두가 폐하를 믿지는 못했지요.”

    “그래. 건국 초기이니 기강을 강하게 잡아도 됐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떤 일이든 장점과 단점이 따르는 법이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이엘은 적어도 인간을 착취하는 게 같은 인간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드레인이 보여 줬던 꿈에선 늘 인간과 이종족이 서로 대립했기 때문에 그것에만 신경 썼던 것이다.

    “희생당한 자의 숫자는?”

    “많습니다. 정예병도 바다와 맞닿은 곳에선 살아남지 못합니다. 심지어 암컷을 잃은 지금의 하이에나들도 견디는 게 고작이니까요.”

    하이에나는 특별한 종족이었다. 바다와 맞닿은 그 땅을 배속받았을 때도 반항하지 않았고, 도리어 보란 듯이 땅을 지켜 내 감탄을 받았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게 비단 암컷 하이에나들의 능력이 뛰어나서만은 아니었다. 땅의 주인은 신이었으므로, 신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기에 그곳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수컷밖에 남지 않은 지금의 하이에나일지라도 미약하게 남은 신의 가호로 그 영지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이에나가 아니라면? 심지어 가장 약한 인간이라면? 이런 식으로 가다간 남는 인간이 없을 것이다. 생각보다 폭력적인 방식을 취하는 올리세스의 행보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조급해 보이는데.”

    “이건 제가 최근에 알게 된 이야긴데, 올리세스가 어릴 때 아주 크게 앓았다고 하더군요.”

    “아팠다고? 어디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병세가 위독해서 가문의 승계권이 한때는 둘째였던 자에게 넘어갈 뻔했다고도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첫째가 죽지 않는 이상, 작위를 둘째가 승계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애초에 제국은 아이 한 명을 고집했기 때문에 두 번째 아이가 가문을 이어받는 일 자체가 드물었던 것이다. 하다못해 차자는 가문의 성도 받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