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52화 (352/488)

352화

“…….”

“죽음으로부터 숨기는 건…… 역시 불가능하겠지?”

“네 쌍둥이를 그곳에 숨기려는 거야?”

“…….”

“숨기는 건 가능하지. 근데 영영 깨어나지 못해. 거긴 그냥 또 다른 공간이라고 생각해야 돼. 또 다른 세계. 지금 그 상태로 나이도 먹지 않고, 자라지도 못한 채 그냥 지금 그 상태로 유지되는 거라고 봐야지.”

이엘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어떤 뾰족한 수가 없을까. 그녀의 파리한 안색을 눈치챈 밀로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화제를 바꿨다.

“근데 그 백조 놈은 어디 있어? 다시 제 호수로 돌아갔어?”

“스완은 지금 제도에 있어. 할 일이 있거든.”

“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숨쉬기 운동 말고?”

“스완 놀리지 마. 지금은 누구보다 큰 힘이 되어 주고 있단 말이야.”

“흐음. 그것만큼 안 믿기는 말도 없네.”

“정말이야. 스완이 성력을 쓸 수 있게 됐거든.”

“뭐?!”

이번엔 정말 놀랐다. 그 무능력한 놈이 성력을 쓸 수 있게 되다니, 그게 무슨……. 애초에 성력이란 건 아무나 쓸 수 없다. 그건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

“오드한테 빌려서 쓰는 거야?”

“말하자면 긴데, 고니의 저주와 관련 있어. 아무나 쓰는 건 아니고 현재는 스완과 그의 아버지만 가능하대.”

“근데 쓸 줄 알면서 그놈은 왜 그동안 그걸 숨겼대?”

“스완도 최근에 알았어. 그의 아버지가 그간 비밀로 해 뒀던 모양이고.”

고니의 저주랑 관련이 있었군. 밀로는 흥미가 생긴 건지 제 아래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킨은 이 사실을 모르는 게 좋겠어. 괜히 허튼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성력과 관련된 부분은 되도록 킨에겐 감추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나타니엘. 조금 전에 말한 스완의 성력 이야기는 킨에게 비밀로 해 줘.”

“왜? 그가 알면 안 되는 거야? 스완이 위험해지니?”

“음. 그 백조는 괜찮은데, 그냥 저놈이 성력과 관련해서는 살짝 예민해지는 구석이 있어서.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 줄게.”

“알겠어.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 뒀지? 돌아가서 좀 쉬어.”

“응. 그래. 그 전에 한 번만 안아 봐도 돼?”

뜬금없는 밀로의 말에 저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던 이엘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저를 멀뚱멀뚱 보고 있는 밀로를 향해 활짝 웃으며 제 두 팔을 벌렸다.

“응. 이리 와, 미르.”

기다렸다는 듯이 이엘의 품에 와락 안긴 밀로가 제 푸른색 머리카락을 그녀의 목덜미에 마구 비벼대며 쾌활한 웃음소리를 냈다.

“다녀왔어, 오헬.”

“응. 어서 와.”

“다신 떨어지지 말자.”

“응.”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녀의 향기를 맡으며 밀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외로움을 많이 타던 놈이었나? 외로움이란 단어는 내 종족과 전혀 관련이 없는 단어였는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으며 이엘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허나 최선을 다해 그렸습니다.”

“…….”

루벤은 제 그림을 바라보며 말이 없는 황제를 초조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생각보다 작업이 빨리 끝나기는 했지만, 그가 말한 대로 정말 최선을 다해서 그린 그림이었다.

선황후는 황실 사람이었기 때문에 젊은 시절의 자신이 제일 많이 그렸던 사람들 중에 하나였고, 지금의 황제는 직접 마주한 터라 그리기 쉬웠던 것이다. 게다가 죽은 황자님의 모습은, 황제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묘사하듯 하나하나 섬세하게 일러 준 덕분에 그림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저 그림 하나에 자신의 조카와 조카의 아들 목숨이 걸려 있다. 평생을 그림만 그리며 살아왔던 자신이라도 불안하고 초조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루벤의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 갔다.

“그대는…….”

“…….”

“과연 그림으로 작위를 하사받을 만큼 훌륭한 인재구나.”

“여, 영광이옵니다…….”

이엘의 칭찬에 그제야 막혔던 숨이 터진 건지, 루벤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간 살면서 들어 왔던 모든 찬사 중에 가장 행복한 칭찬이었다.

한편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이카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그림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렇게…… 똑같이 생겼다고?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그림 속에서 평온한 얼굴로 웃고 있는 아르세니온 황자를 보는 순간, 이카르는 눈앞이 새카맣게 변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이엘과 똑같이 생긴 얼굴에 눈꼬리만 조금 다를 뿐인데…… 이상하게 황자의 얼굴에서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보였다.

물론 그녀의 아이들이니 당연히 닮았겠지만, 이상하게 그 그림 속의 아르세니온은 쌍둥이인 나타니엘보다 그들의 어미인 리카르디스를 더 닮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루벤. 그대와 했던 약속은 지키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고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가 그대를 이곳까지 부른 이유는, 그대가 그려 주었으면 하는 그림이 하나 있어서다.”

“무엇이든지요.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라도 그릴 것입니다.”

“여자 두 명의 그림인데…….”

이엘은 꿈속에서 보았던 여자 두 명을 묘사하듯 설명했고, 루벤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종이에 기록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알폰스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살짝 넋이 나간 듯한 노아를 흔들어 깨웠다. 이엘이 루벤과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며 모두에게 자리를 피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재규어를 비롯한 이종족들은 인간을 믿을 수 없다며 굳이 이 자리에 참석하길 고집했다.

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엘이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녀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결국 저희들의 고집대로 참석했는데.

“황자가.”

“…….”

“……살아 있었더라면 저랬겠군.”

노아의 나지막한 말에 알폰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표정이 좋지 않으시더라니……. 설마 죄책감이라도 갖고 계신단 말인가? 이제 와서야 저 황자가 폐하의 형제이니 누그러진 반응이 나오는 거지, 2차 전쟁 땐 당연히 죽였어야 할 숙청 대상에 불과했다.

“각하. 어차피 죽은 자입니다.”

“…….”

“그냥 그림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저희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알폰스의 충언에 노아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죽은 자라고……. 정말 그가 죽었을까? 정말 황자는 죽은 게 맞는 걸까?

한시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자신이 죽였던 그 어린 날의 황자가 피 웅덩이에 쓰러진 모습이 보여서. 죽인 것에 죄책감을 갖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노아를 좀먹어 가고 있었다.

“이카르 백.”

“…….”

“잠깐 얘기 좀 하지.”

결국 노아는 그날 하지 못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이카르를 복도로 불러냈다.

“오드 님께 찾아가 직접 물어볼 생각이다.”

“…….”

“아르세니온 황자의 생사 여부.”

오랜 시간 끝에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의심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노아는 제 침실에 틀어박혀 마음을 냉정하게 먹고 생각을 정리했다. 마주할 시간이다. 회피할 마음 따위 전혀 없었다. 받아들일 것은 빨리 받아들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물어보지 않아도 돼.”

이카르는 그 말만 남기곤 안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끝 부분을 잘라 냈다. 그러곤 주변에 있던 촛대로부터 불을 붙였다. 시가를 입에 물고 빨 때마다 그의 볼에 있는 보조개가 깊게 패여 들어갔다.

이카르는 창틀이 있는 곳까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그곳에 팔을 올리고 연기를 내뱉으며 멈췄던 말을 이었다.

“내가 이미 물어봤으니까.”

“네가?”

“그래. 그러니까 넌 앞으로 그 일에 손 떼.”

“폐하의 안전이 달린 문제인데 나더러 손을 떼라고?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어. 손 좀 떼 줘.”

“…….”

“황자가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그냥 손 떼 줘. 이건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야.”

살아 있다면 반드시 그녀의 발목을 잡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동맹족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황자를 지키든가, 죽이든가.

“그때도 말했지만 내겐 폐하나 아르세니온이나 똑같이 소중해.”

“이카르.”

“하지만 나도 포기하기로 했어.”

“뭐?”

“황자가 살아 있든, 죽어 있든…… 난 앞으로 그를 생각하지 않을 거야. 포기할 거다.”

“어째서…….”

“어차피 내 힘으론 지키질 못해.”

“…….”

“그렇다면 빠르게 포기하는 편이, 시간과 인력의 낭비를 줄일 수 있어.”

다소 냉정한 판단이었다. 저 어린 재규어가 누구보다 냉정한 판단을 내리기까지, 많은 고민과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노아는 마른세수하듯 손바닥 안에 제 얼굴을 가렸다가 뗐다. 그러곤 한참 만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폐하가 ‘그’를 만나 계약을 하기까지. 그 모든 과정이 비정상적이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나?”

“비정상?”

“로빈이 그러더군. 무언가가 폐하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

“그게…… 황자인 듯해.”

이카르는 들고 있던 시가를 꾹 쥐며 한숨을 쉬었다. 노아의 말이 맞다면, 아르세니온의 존재는 생각보다 더 큰 파장을 가져올 것이다.

“로빈도 황자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그건 아니다. 그저 폐하께서 ‘그’와 거래를 해야만 했던 이유가 존재할 거라고 추측할 뿐. 그 대상이 황자일 거라곤 전혀 생각 못 했을 거다.”

“그나마…… 다행이네.”

이엘은 단 한 번도 황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무겁고 괴로웠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할 때도, 이엘은 아르세니온에 관한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않았다. 노아는 언젠가 그녀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는…… 앞으로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늘어날 거예요. 지금도 당신께 전부를 말하지 못 해요.’

독수리의 영지에서 늑대의 영지로 돌아와, 별저에서 쓰러졌던 이엘이 노아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 직전에 노아는 그녀의 정체가 황녀였다는 것을 알게 됐고, 제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이유로 들며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붙였었다.

그때 그녀는 제 곁을 떠나려 했었다. 이미 한 차례 신뢰가 무너진 관계에서, 자신은 계속해서 진실만을 말할 수 없을 거라고. 그 말을 하는 순간조차 자신은 숨기고 있는 게 있다고.

돌이켜 보니 그건 아르세니온을 포함해 말했던 모양이다. 이제야 아귀가 들어맞는 것 같았다.

“그럼 넌 앞으로 어쩔 작정이야.”

이카르는 불 꺼진 시가를 든 채 노아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고. 이카르는 마음을 정했다. 오드에게 했던 다짐처럼, 그는 이온에 관해서는 지금처럼 모른 척 눈감을 것이다. 아르세니온이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지금의 상태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폐하께서 말씀해 주실 때까지 기다릴 거야.”

“뭐? 폐하가 말씀해 주실 것 같아? 네 말처럼 ‘그’와의 거래에 황자가 엮여 있는데, 그걸 네게 말해 줄 것 같냐고.”

“기다리는 것 말고는 없어.”

“…….”

“언젠가 날 완전히 의지하게 되는 날. 그녀는 내게 말해 줄 거다. 난 믿어.”

절대적인 신뢰 관계에서만 나올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이카르는 새삼 그 모습이 부럽게 느껴졌다. 자신은 이엘의 보호자가 되었기 때문에 양방향으로 감정을 교류한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그녀를 챙기는 입장에 가까웠다. 그런 면에선 노아와 위치가 달랐다.

“노아. 하나만 더 묻자.”

“뭔데.”

“전에 네가 그랬지. 황자가 살아 있다면 폐하의 약점이 될 그를 죽일 거라고.”

“…….”

“만일 네가 내게 말하기 전에 오드 님께 물어봤다면. 그래서 오드 님이 황자가 살아 있음을 말했다면.”

“…….”

“너는 끝내 황자를 숨겨 놓은 곳을 알아내 그를 죽였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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