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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51화 (351/488)
  • 351화

    *

    “다들 얼굴색이 좋아졌네? 그동안 살 만했나 봐?”

    “저거 설마…….”

    “보자마자 저거라니. 듣는 ‘저거’, 기분이 상당히 나쁜데요.”

    밀로를 단번에 알아본 늑대들이 미간을 찌푸리며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밀로는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는 듯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넉살스럽게 인사하느라 바빴다.

    “밀로……?”

    그때 웅성거리는 우논들 사이에서 작은 목소리로 누군가 밀로의 이름을 불렀다.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을 짓는 알폰스와 인사하던 밀로가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밀로야? 너 진짜…… 밀로야?”

    “뭐야, 너 설마 슈프냐?”

    분명 떠날 때만 하더라도 쪼그마하던 테르였는데, 4년 만에 성체로 완연하게 자라 있었다. 밀로는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슈프의 외양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야. 너 안 본 사이에 진짜 어른이 됐구나? 역시 남의 집 애는 빨리 자란다더니. 테르치고 성장이 엄청 빠른데?”

    “넌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야!”

    “뭐야, 요 꼬맹이. 형아 기다렸냐?”

    “시끄러워. 달라붙지 좀 마!”

    “좋으면서∼”

    밀로는 커다란 늑대의 몸통을 어렵지 않게 끌어안고 그 하얀 털에 제 얼굴을 맘껏 비비적거렸다. 귀찮다며 옆으로 가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슈프에게, 다른 우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밀로를 떠넘겨 버렸다. 그러곤 아까부터 그의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남자를 가만히 쳐다본다.

    그들의 시선을 느낀 건지, 이엘이 웃으며 주변을 정리하곤 그 남자의 등을 앞으로 툭 밀었다.

    “인사해요.”

    “그럴까, 그럼?”

    폐하께서 공대를? 저놈이 누군데. 술렁거리는 좌중을 보며 남자가 씨익 웃었다. 그는 밀로와 비슷한 머리색과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하는 짓도 밀로와 비슷한 건지, 모두의 시선이 제게 쏠린 걸 꽤 즐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만나서 반갑다고 하기엔, 난 여기 내려오고 싶지 않았으니 그건 좀 어폐가 있고.”

    “설마 너도…….”

    “맞아. 저놈이랑 똑같은 용.”

    “…….”

    “무자비한 살육의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용이라고 해야 할까?”

    “뭐?”

    “너희 동료인 밀로가 동족을 무참히 다 살해하고 왔거든. 난 그 틈에서 겨우 살아남았고.”

    남자의 충격적인 말에 정적이 흘렀다. 동족을 무참히 다 살해했다고? 설마 저 자식…… 용을 다 죽이고 내려온 거야?! 우논들이 충격에 빠진 낯으로 슈프와 연신 장난치던 밀로를 쳐다봤다. 제게 쏟아진 눈빛들을 느낀 건지 밀로가 미간을 찌푸리며 장난을 멈추고 남자에게 한 소리 했다.

    “야. 내가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지.”

    저렇게 생글생글 웃으며 동족을 살해했다니. 이유가 뭐였든 간에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인 건 틀림없다. 그간 밀로와 알고 지냈던 늑대들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모습이 꽤나 즐거웠던 건지 남자는 배를 움켜쥐며 끅끅거렸다.

    “뭘 잘했다고 웃어?”

    “아니, 그렇잖아.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그럼 맞는 말 했냐?”

    “맞잖아. 그게 살육이지 뭐야.”

    “죽인 적 없고, 멀쩡히 살아 있거든? 왜. 너도 영원히 잠들고 싶어? 걔네 옆에 모셔다 드려 줘?”

    “아이, 무서워라∼ 어디 무서워서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익살스럽게 대꾸한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던 이종족들에게 뒤늦은 제 소개를 했다.

    “킨이라고 한다. 여기에 얼마나 머무르게 될진 모르겠지만, 그동안 잘 부탁하고? 아! 그리고 내가 지금 졸려서 그런데, 좀 아늑하고 캄캄한 공간 없어?”

    “역시 용들은 죄다 제멋대로구만.”

    “이봐. 그럼 너도 2차 전쟁 때 이곳에 내려왔었나?”

    독수리 중 하나가 꽤 민감한 주제를 던졌다. 2차 전쟁 때 용 몇 마리가 전쟁에 끼어들어 깽판을 치고 떠나 버렸던 것에 원한을 갖는 종족이 많았다.

    그 용들이 인간이고, 이종족이고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살해하는 바람에 이종족의 개체수가 어마어마하게 줄었던 것이다.

    킨은 턱 아래를 손으로 쓸며 재밌다는 듯 독수리를 쳐다봤다.

    “만약 그렇다면 날 쫓아낼 거야?”

    “…….”

    “2차 전쟁 때 인간들을 죽이는 것에 앞장섰던 너희 독수리들이?”

    “이봐.”

    “어차피 다 아는 사람들끼리 고고한 척할 필요 없잖아.”

    “…….”

    “난 그냥 내 본능에 충실했어. 2차 전쟁이 아니라 1차 전쟁 때 내려왔었어도, 난 인간과 이종족 관계없이 다 죽였을 테니까.”

    생긴 건 부드럽고 연약하게 생겼는데 내뱉는 말은 그 누구보다 살벌하고 차가웠다. 킨의 냉랭한 말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밀로가 인상을 쓰며 킨을 제 뒤로 밀쳐 내고 변명하듯 열심히 설명했다.

    “너희가 이해해. 쟨 사회성이 좀 떨어지거든.”

    “우와, 여기서 고작 십여 년 살았다고 젠체하는 거야? 이야, 우리 밀로. 어째 동족보다 다른 종족을 더 챙기는 것 같아?”

    “미친놈아, 좀 닥쳐.”

    밀로는 여전히 낄낄거리는 킨의 몸통을 거세게 밀쳐 내곤 불안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이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나의 엘. 걱정 마. 저 자식은 내가 통제할 수 있으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라…… 조금 전에 킨이 했던 말이 다 무슨 말이야? 동족을 살해했다는 게…….”

    이엘은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밀로가 제 곁을 떠나 동족에게로 돌아갔던 건 전적으로 이온의 존재 때문이었다. 이온이 살아 있다는 것을 용들이 알게 되었고, 그것으로 밀로를 협박해 왔기 때문에.

    상황을 정리해 보겠다며 동족에게로 돌아갔던 건데, 설마 그 상황 정리라는 게 동족을 전부 죽였다는 뜻은 아니겠지.

    “죽인 건 아니고 재우고 왔어.”

    “재웠다고?”

    “응.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해 줄게. 여기서 할 얘긴 아닌 것 같아.”

    그의 말에 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은 동맹족이 아니다. 그냥 밀로 개인이 이엘의 곁에 선 것일 뿐이니까. 그녀의 동맹족 앞에서 경계하는 게 당연했다.

    아무튼 이엘은 재규어들에게 킨이 머물 만한 곳을 안내해 주라고 명했고, 오랜만에 만난 밀로와 함께 저택 밖을 나왔다.

    “아까 슈프 녀석 표정 봤어? 날 보고 유령 본 것 같은 표정을 짓더라.”

    “슈프는 네가 용인 것도 몰랐으니까. 많이 놀란 것 같은데.”

    “다른 놈들도 그렇게 많이 자랐어? 로날드랑 리퍼 말이야.”

    “응. 다들 멋있는 성장을 하고 있어.”

    그녀의 말에 밀로가 히죽 웃었다. 하루빨리 로날드와 리퍼를 보고 싶다는 말을 덧붙이며.

    어느새 밖은 해가 저물어 깜깜해진 상태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 위에 반짝거리는 별이 예쁘게 콕콕 박혀 있었다. 경탄하며 하늘을 쳐다보던 이엘에게 밀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근데 노아는 왜 안 보여? 아까 거기에도 없는 것 같던데.”

    “몸이 안 좋아서 침실에서 쉬고 있어.”

    “뭐? 그 늑대가? 몸이 안 좋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밀로는 입을 쩍 벌리고 몇 번이나 노아의 상태를 물었다. 이엘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노아에게 직접 듣는 게 좋을 거야. 내일쯤 그의 침실로 같이 가자.”

    “응.”

    “그보다 넌 어떻게 지냈어? 아까 한 얘기는 다 뭐고.”

    “다 말하기엔 복잡한 사정이라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네게 관심을 보이던 놈들은 전부 재워 두고 왔어.”

    “재웠다고? 어떻게?”

    “용은 몸에 있는 비늘 중에 특별한 비늘이 하나 있어. 그걸 떼면 그대로 잠에 빠져 버려. 그리고 다시 붙일 때까지 깨어나지 못하지.”

    “그럼 용들의 비늘을 전부 떼었단 거야?”

    “아니야. 킨 자식이 장난치려고 거짓말한 거야. 전부는 아니고, 한…… 절반 정도?”

    “뭐? 그래도 되는 거야?”

    “어차피 하는 일도 없이 놀고먹기 바쁜 놈들이라 괜찮아. 나중에 다시 붙여 주러 가면 돼.”

    너 죽고 나면……. 그 말을 속 안으로 삼킨 밀로는 다시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이엘의 손을 잡고 걸었다.

    “그러니까 이제 용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의 엘.”

    “킨은 네 편이야?”

    “아니? 쟨 그냥 제멋대로 사는 놈이야. 이번엔 날 도왔지만 다음엔 뒤통수를 때리고 도망칠지도 몰라. 근데 또 능력이나 힘이 종족 내에서도 손꼽히는 편이거든. 저놈이 적이 되면 귀찮아지니까 데리고 왔어.”

    “…….”

    “걱정하지 마, 나의 엘. 내가 쟤보다 세.”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모를 밀로의 허풍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걸음을 멈추고 밀로를 돌려세웠다.

    “나도 네게 말할 게 있어. 사실 암컷 용을 만났어.”

    “뭐? 누구를 만났다고?”

    “용의 암컷 말이야.”

    “…….”

    “그녀가 날 찾아왔어.”

    이엘의 나지막한 말에 이번엔 밀로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는 당황한 듯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다가 심호흡하듯 깊게 숨을 내쉬었다.

    “네 꿈에 찾아왔어?”

    “응.”

    “그럼 내가 다시 왔다는 것도 곧 알게 되겠네. 귀찮아지는데.”

    “왜? 사이가 안 좋은 거야?”

    “응. 뭐, 어쩔 수 없지. 네가 나자르의 선택을 받았을 때부터 예감한 일이었어. 신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건, 신과 가까운 암컷들과도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너희 용에 관해 궁금한 게 많아. 내게 알려 줄 수 있어?”

    처음엔 이온이나 테오도로를 암컷 용의 능력 안에 숨겨 볼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낮에 오드와 나눴던 얘기만 아니었다면. ‘그’와의 거래를 완성해야만 하기에 그 계획은 불발됐지만, 어쨌든 용에 관해 많은 정보를 알게 되면 후에 쓸 일이 있겠지.

    “너희는 왜 따로 사는 거야?”

    “…….”

    “물론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강요하는 건 아니야.”

    시원한 이목구비처럼 밀로는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뒷일 걱정은 하지 않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타입이었으니까. 그런 밀로가 말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엘은 그에게서 언젠가의 스완의 모습이 겹쳐 보았다. 스완에게 고니의 비밀을 말해 달라고 했을 때 그가 날 선 태도로 고개를 젓던 모습이.

    “아니야. 됐어, 이런 얘긴 나중에 하자. 돌아와 줘서 고마워, 밀로. 당분간 좀 쉬자.”

    “나타니엘. 너 뭔가 생각하는 게 있는 거야? 네 쌍둥이 오빠. 그 황자와 관련된 일이 뭔가 꼬인 거야?”

    “…….”

    “나타니엘.”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부터 피할 수 있을까?”

    다소 어려운 질문에 밀로는 그녀를 재촉하려던 입을 닫았다. 이엘은 새카만 하늘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하듯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암컷 용이 가진 그 능력 안에, 사람을 숨기는 게 가능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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