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50화 (350/488)

350화

전쟁이 모든 걸 망쳤다. 제게서 이온을 앗아 감과 동시에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소망까지 송두리째 짓밟은 것이다. 그 순간 숨이 턱턱 막혔다. 이온이 죽었다는 상실이 가져온 괴로움은 생각보다 컸다.

“오드. 나는…… 난 이온이 없으면 안 돼.”

“…….”

“정말이야. 이온이 없는 세상은 내겐 무의미해.”

아무리 노아를 사랑해도. 아무리 내 곁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도…… 이온은 나의 일부분이야. 내 몸의 한 부분이라 그 아일 포기할 수가 없어.

차라리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게 제 목숨과 이온의 목숨을 바꾼 이유였다. 그렇게라도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적어도 죽는 것만은 스스로가 선택하고 싶어서. 자신은 2차 전쟁 때 죽었어야 했다. 이온의 희생으로 살아난 이 목숨은 이온에게 돌려주는 게 맞다.

“그런데 ‘그’가 내 아이의 목숨값까지 요구했어.”

“…….”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생기지도 않은 내 아이를 달라고.”

그래. 있지도 않은 아이. 그냥 줘 버리자. 난 선황의 자식이야. 제 딸을 버린 선황처럼, 나도 똑같이 빌어먹을 부모가 되는 거야. 그냥 줘 버리고 다 끝내자. 이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던 때도 있었는데.

“근데…… 근데 이따금 아이의 환상을 봐. 내가 너무 갈망해서 만들어 낸 상상인지, 아니면 정말 미래에 만날 아이인지.”

“나타니엘.”

“수줍은 듯 모퉁이에서 날 힐끗거리는 그 검은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의 아이가. 영락없는 내 아이야.”

“…….”

“양 볼은 복숭아처럼 예쁘게 물든 채, 날 보며 눈을 깜빡여. ……그 아이가 이따금 보여.”

그래서 이름을 붙여 주었다. 테오도로. 그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더니, 정말 언젠가 만나게 될 것만 같은 기대감이 생겨서. 정말 언젠가 내게 와 줄 것만 같아서.

“그래서 포기하고 싶지 않아.”

“엘.”

“방법을 찾아볼 거야. 이온과 아이, 그리고 내가 오롯이 살 수 있는 방법.”

그 순간부터 자신은 이미 테오도로의 어미가 되었다. 아이는 마치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는 듯, 환상을 통해 이엘을 찾아왔다. 내가 당신의 아이니까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듯, 벌써부터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새겼다.

“누구도 포기할 수 없어. 이온도, 내 아이도. 난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내 아비처럼 자식을 파는 짓 따위 하지 않을 거야.”

노아는 그렇게 말했다. 당신은 선황과 다르다고. 이엘은 그의 말을 반쯤 흘려들었다. 제 몸에 선황의 피가 흐르고, 자신 역시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버렸는데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하지만.

“난 내 아이를 지키고 싶어.”

선황과 달리 나는 내 아이를 지키고 싶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지키고 싶어.

“그러니까 오드. 너도 무언가 작은 것이라도 알고 있다면 제발 말해 줘.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제발 내게 조언을 해 줘. 나는 너의 혜안이 절실해.”

황위에 오른 뒤 약한 소리 한번 한 적이 없던 이엘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절박하게 오드에게 매달렸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보여 주지 않는 나약한 모습으로 간절히 매달렸다.

“넌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잖아. 넌 신의 뜻대로 움직이잖아. 신의 대리자잖아.”

“나타니엘, 이제부터 잘 들어.”

그 모습에 오드가 짧게 한숨을 쉬곤 이엘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전에 고니의 호수에서 봤겠지만, 아무리 내가 특별한 나자르라고 해도 모든 걸 이야기할 수는 없어. 나 역시 고니와 다른 나자르처럼 성력을 함부로 쓰거나 잘못된 일에 쓰면 벌을 받게 되니까.”

“응. 알아. 괜찮아, 무엇이든 좋아.”

“우선 네가 ‘그자’와 만난 건 우연이 아니란 걸 알아야 돼. ‘그’는 널 기다렸어. 너를 만나기만을 기다렸던 거야.”

이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왜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자신이었을까. 벼랑 끝으로 몰려 사위 분간 못 하는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었을 텐데. ‘그’의 말처럼 자신이 여자였기에 선택됐다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황은 ‘그’를 만났어.”

“역시…….”

“그리고 ‘그’와 선황이 했던 계약에 네가, 그리고 이온이 묶여 있었어.”

“뭐? ……이온까지? 계약의 내용은?”

“불로불사.”

“…….”

“그는 영원히 사는 생을 원했단다.”

참 아버지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그가 이온을 마냥 예쁘게 보지 않았던 것 또한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그 대가로 나와 이온을 바치려 했구나.”

조금 전에 오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이 ‘그’와 계약을 맺은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그’가 기회를 기다렸던 거라고. 그러니까 선황의 끝나지 않은 계약이 제게 내려온 것이다.

대물림……. 물려받게 된 건가?

“그럼 내가 여기서 계약을 완수하지 못하고 끝내게 되면…….”

“응.”

“…….”

“네 아이에게 이어질 거야.”

‘목소리’는 그걸 노린 것이다. 거래의 대가로 아이를 노렸고, 설령 그녀가 거래를 파기한다고 해도 완수되지 못하면 끝내 제 아이에게 대물림될 것이다.

“말도 안 돼. 그럼 내가 계약에서 도망친다고 해도 아이가…….”

“엘. 완수하지 않으면 이 굴레는 끝나지 않을 거야.”

“계속해서 물려주고 물려주겠구나.”

내가 이 계약을 끝내지 않으면 그대로 테오도로에게 넘겨질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엘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땐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그 아이가 내릴 수 있는 결단이라곤 간신히 숨만 쉬는 이온을 지키기 위해 제 인생을 바치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협박질에 제 아이도 이용당할 것이다. ……그건 절대 안 돼.

“그럼 내가 이걸 끝내는 수밖에 없겠네.”

설령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에게 물려줘서는 안 돼. 동시에 내 아이도 지켜야 하는데. 손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방법이 있을 거야. 있어야 돼…….

“이엘. 누군가 오고 있어.”

그 순간 오드의 낮은 목소리가 정신을 깨웠다. 이엘은 고개를 돌려 오드의 시선이 닿은 곳을 향했다.

“그가 왔구나.”

그가? 누굴 말하는 거야? 오드의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를 확인하곤 저쪽 영지 끝에서부터 걸어오는 두 사람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엘은 다른 이들보다 시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아주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누군지 알아보는 게 힘들 정도로.

하지만 이엘은 제 팔뚝에 돋은 소름을 느끼며 눈을 찌푸렸다. 왜 낯이 익지……?

“침입자다!”

경비를 서고 있던 위병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중 하나가 재규어의 모습으로 돌아가 크기를 키워 성문 입구를 완전히 틀어막으려 했다.

“잠깐! 멈춰라!”

그러나 이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재규어는 한발 뒤로 물러서는 것을 택했다. 이제 이엘은 달려가고 있었다. 미세한 눈발에 여전히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성문 밖을 향해 내달렸다.

“폐하! 가시면 안 됩니다!”

뒤늦게 재규어 여러 마리가 달라붙었지만 어느새 이엘은 성문을 지나쳐 버린 뒤였다.

“폐하!”

“놔둬라.”

소식을 듣자마자 저택에서부터 날아온 르네가 염려하는 재규어들에게 소리쳤다. 시력이 좋은 그는 이엘이 달려가는 저 상대가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아군이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군.”

“예? 우리 아군입니까? 저 인간이 누군데요?”

“인간 아니야.”

몇 년 전에 제 영지에서 저놈의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확실히 상공에선 저놈만큼 든든한 놈도 없지. 놈과 가까워질수록 달려가는 이엘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것을 확인하곤, 르네는 주저 없이 날개를 펼쳐 저택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한편 이엘은 빠르게 달리던 속도를 점점 늦췄다. 분명 누군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져 그를 확신하게 되었는데도.

“오헬!”

분명 내 이름을 불러 주는 그가 저기 있는데도.

“맙소사. 나의 엘이 저렇게도 아름다워졌다니.”

“…….”

“이런. 나의 황녀님이 정말로 나의 황제 폐하가 되셨잖아?”

저 특유의 천연덕스러운 말투와 표정까지 변함없는 그 사람인데도. 이엘은 아직도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야. 네 암컷이 너 보고 넋이 나갔는데?”

“죽고 싶어? 오헬한테 암컷이니 뭐니 그딴 소리 하지 마. 네 모가지에 달린 비늘 다 뜯어 버리기 전에.”

“어후, 무서워라∼ 내가 유일한 네 편인데 나까지 재우려고?”

“닥쳐. 너 때문에 오헬이 겁먹었잖아.”

그의 옆엔 처음 보는 남자도 함께 있었다. 똑같이 푸른색 머리와 푸른색 눈동자를 하고.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았으나, 딱히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이엘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입술만 연신 달싹였다.

입술이 안 떨어져.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이름이 안 나와.

“그럼 뭐, 내가 모시러 갈까?”

능글맞게 웃으며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이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덩치가 커다란 남자를 계속해서 쳐다봤다.

“다녀왔어, 나의 엘.”

“……미르.”

“와, 그 이름 진짜 오랜만이다.”

“…….”

“너만 불러 주는 내 애칭.”

울컥한 이엘이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힘주어 부르자, 밀로가 크게 웃으며 단번에 그녀의 허리를 잡고 위로 안아 올렸다.

“오랜만에 하늘 구경 시켜 주기.”

“왜…… 왜 이제야…….”

“미안해.”

“…….”

“전부 죽일 수는 없어서 늦었어.”

살벌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며 밀로가 해맑게 웃었다. 그러나 이엘의 눈물이 툭툭 떨어지는 것을 보고 밀로는 그녀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그러곤 허리를 잔뜩 굽혀 시선을 마주치며 투박한 손등으로 이엘의 눈가를 벅벅 닦아 주었다.

“나 기다렸어?”

“당연한 소릴 해!”

“기분 좋은데? 네가 날 잊지 않아 준 게.”

“내가, 내가 널 어떻게 잊어.”

“그런가? 내가 걱정만 안겨 주고 떠났나?”

“…….”

“그래도 여기 시간으로 4년이면 상당히 빨리 돌아온 건데.”

“…….”

“응? 나 예뻐해 주면 안 돼? 엘?”

여전히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밀로가 배시시 웃었다. 이엘은 제 손으로 축축한 눈가를 훔치고선 두 팔을 벌려 커다란 밀로를 그러안았다.

“돌아온 걸 환영해.”

“응, 나의 엘. 너무 보고 싶었어.”

“돌아와 줘서 고마워.”

“…….”

“나도 너무 보고 싶었어, 미르.”

그토록 기다리던 밀로가 돌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