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포레스트는 다시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며 그녀의 발 아래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듣고 싶어서 들었던 것도 아니었고, 들어도 알지 못하는 내용이 태반이었다. 포레스트는 리노가 누구인지, 코르넬이 누구인지, 테런스는 또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그는 뱀의 영지에서 자라 그곳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대귀족의 이름조차 잘 알지 못했다.
“저, 정말입니다. 살려 주세요, 폐하. 저는 모릅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은 정말 모르는 내용이에요.”
이엘은 포레스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마 로빈은 이런 상황까지 내다보고 포레스트를 제게 딸려 보낸 거겠지. 작은 소식이라도 좋으니, 우연히 정보를 얻게 되는 순간을.
그러나 로빈과 달리 포레스트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탓에 너무나도 순진했고 쓸데없이 겁이 많았다. 그런 주제에 제 분수는 알아서, 로빈이 시킨 일이 자신에게 벅차다는 것을 금방 깨달은 것이다.
어쩌면 뱀의 무리에 살 때 겉돌았을 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동족과 돈독한 관계였다면 자신이 쓸모가 없는 존재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 곧장 제 종족에게 돌아갔을 테니까.
그렇게 따지면 조금 전에 근위대를 감쌌던 것 또한 처음 느껴 보는 소속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엘이 근위대를 시켜 포레스트의 식사를 챙겼으니까. 근위대뿐 아니라 늑대나 독수리들도 포레스트의 끼니를 챙겼다. 이곳에 오기 전 쓰러진 뱀을 안타깝게 여긴 그녀가 알폰스에게 한 마디 했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에.
‘포레스트는 지금 이 무리에서 가장 약자야. 게다가 이곳 모두와 식성이 맞지 않아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아무도 그를 챙겨 주지 않았고.’
그 말에 겸연쩍어진 이종족들이 내키진 않았지만 하나둘 저 뱀의 식사를 챙겨 주기 시작했다. 물론 뱀을 대하는 태도는 변함없이 냉랭했겠지만, 포레스트는 그런 차가운 관심이라도 제게 쏟아지는 것에 소속감을 느꼈던 건 아닐까.
“오늘부터 너는 더 삼엄한 감시를 받게 될 테고, 네 동족에게 돌아갈 일은 없을 거야.”
“예, 폐하…….”
“한 번은 넘어가지만 네게 두 번이란 기회는 없을 것이다. 알겠느냐?”
“예,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하트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결정에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여차하면 저놈의 목을 베어 버리면 되니까. 돌아가면 경비를 허술하게 한 근위대부터 호되게 꾸짖을 생각이었다.
“하트 경. 포레스트와 함께 먼저 돌아가도록 해.”
“예?”
“난 오드 님을 보고 돌아갈 테니까.”
이엘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커다란 재규어가 있었다. 능력을 사용해 몸을 키운 덕분에 달려오는 속도가 유달리 빨랐다. 게다가 저 멀리서부터 보이는 커다란 덩치가 아이러니하게도 귀여워 보여, 이엘은 조금 전의 심각한 상황은 잊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귀엽지 않니?”
“…….”
“아장아장 뛰어오고 있구나.”
그녀의 말에 하트는 ‘내가 아는 아장아장이 다른 의미였나?’라는 생각을 했고, 포레스트는 ‘폐하께선 저렇게 큰 걸 귀여워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아장아장’ 뛰어오는 이카르에게서 시선을 돌린 하트는 포레스트를 끌고 가다시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오드 님. 어서 오세요.”
“폐하. 날씨도 추운데 왜 나와 계셨습니까.”
“오드 님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으니까요.”
이엘이 웃으며 말하자, 오드는 속도를 줄인 이카르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린 뒤 그녀를 끌어안았다.
“고작 며칠 떨어져 있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반갑네, 나의 엘.”
“응, 나도.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반가워.”
“노아 공이 돌아왔구나.”
“응.”
오드는 수고했다는 듯 이엘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녀를 위로했다.
“오드. 몸은 괜찮은 거야? 오가는 길에 성력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그래?”
“며칠 푹 쉬면 괜찮을 거야.”
“미안해. 별일이 없으면 제도로 돌아가서 쉬게 해 주려고 했는데…….”
이엘은 뒷말을 삼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드의 품에서 벗어난 그녀가 팔짱을 끼며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감쌌다.
“상황이 심각해졌어.”
“무슨 일인데 그래? 올리세스의 영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구나.”
“올리세스가 민심을 악용하려고 해. 그것도 신을 들먹이면서.”
“…….”
“그를 신으로 추앙하는 마을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어. 거기엔 포필렌도 엮여 있고.”
이엘의 말에 잠자코 듣기만 하던 이카르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놈을 신으로 추앙하다니?!”
“마을에 성전을 세우고 가짜 사제를 들였어. 원래 영지 안에 성전을 새로 만들기 위해선 오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세웠다. 그리고 거기에 제도에서 온 사제라며 가짜 사제를 들인 거야.”
“그럼 꽤 심각한 거 아닙니까? 신성제국에 무슨…….”
“곧 있으면 포교 활동을 할지도 몰라. 포필렌을 유통시킬 준비 중이거든. 노아에게도 화친을 목적으로 늑대의 영지에 포필렌을 유통시키고 싶다는 말을 했어. 올리세스는 노아와 나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고 있으니, 아마 노아가 포필렌이 어떤 꽃인지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고.”
“그 자식 완전히 미쳤네요. 그러지 말고 당장 가서 쓸어 버리죠? 영지전을 허락해 주십시오.”
“안 돼. 아직은 마땅한 명분이 없어. 포필렌은 아직 유통되지 않았고, 포교 활동도 시작된 게 아니니까. 게다가 그 마을은 윌터 백작 소유의 작은 마을 중 하나야. 그나마도 윌터 백작은 그곳을 오간 적이 거의 없고. 사실상 버려졌던 마을이니, 그가 모른다고 딱 잘라 떼면 소용없게 돼. 애꿎은 마을 주민들이 뒤집어쓰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이걸 역으로 이용할 방법을 강구해야겠어.”
그렇게 말한 이엘은 이카르와 오드를 번갈아 쳐다봤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뭔가 찔리는 게 있었던 건지 이카르가 그녀의 시선을 잽싸게 피해 버렸다.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간 건 확실한데 물어본다고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일단은 그냥 넘어가 줄까.
“우선 이카르 백. 백작은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게. 난 오드와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 돌아갈게.”
“알겠습니다, 폐하.”
순순히 돌아서는 이카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의 형체가 아주 작아졌을 때쯤 이엘은 본론을 꺼냈다.
“내 아버지가 이상한 계약을 했어. 오드. 넌 그게 뭔지 알고 있지?”
“…….”
“혹시 나와 관련이 있는 거니?”
확신이 필요하다. 고문을 당해 제정신이 아닌 리노의 증언이 아니라, 혼자 이것저것 자료를 긁어모아 가설을 세운 로빈의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 필요했다. 진실을 알고 있는 자의 확실한 증언이.
“아버지는…… 선황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엘.”
“말해 줘. 이젠 그냥 넘어갈 수 없어.”
“그 전에 너도 내게 말해야 할 게 있지 않니?”
단호한 오드의 목소리가,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치 신의 음성처럼 느껴졌다. 마치 신을 대면한 것처럼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낱낱이 토해 내야 할 것만 같은 위압감이 들었다. 아니. 이미 모든 걸 알고 있겠지만.
그동안 오드는 굳이 묻지 않았다. 분명 알고 있었을 텐데도 묻지 않았다는 건, 이엘이 스스로 말하기를 기다린다는 의미였다.
이엘도 오드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무서웠다. 신을 버리고 ‘그’의 손을 잡은 자신을, 오드가 버리고 떠날까 봐.
“엘.”
“…….”
“나는 언제나 너의 편이야.”
“…….”
“너는 신의 사랑을 받은 아이이고, 나는 너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있어.”
“…….”
“그러니 나를 믿어.”
부모를 잃고, 나라를 잃고, 피붙이를 잃었을 때. 유일하게 제 곁을 지켜 주던 사람이었다. 자신은 나자르를 모두 몰살시킨 주범이었던 황가의 아이인데도, 떠나지 않고 지켜 주고 보호해 주고 키워 줬던 사람이 오드였다.
“있잖아, 나의 엘. 신께선 모든 걸 다 알고 계신단다.”
“…….”
“하지만 신께선 직접 네가 털어놓기를 기다리셔.”
아, 언젠가 비슷한 말을 들은 것도 같다.
‘신 앞에선 솔직해지길 바라요, 나타니엘. 마치 15년 전에 그 불타는 황궁에서처럼요.’
스완의 능력 속에서 만났던 용, 드레인도 그렇게 말했다. 신 앞에선 솔직해지라고. 15년 전에 있었던 2차 전쟁. 모두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황녀궁에서 간절히 신을 불렀다. 살고 싶다고. 제발 살려 달라고. 그렇게 외쳤던 것 같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울고 있는 제 앞에 이온의 기사단이 돌아왔다. 불타는 황궁에서 건져져 이렇게 살게 된 것이다.
“엘. 나는 이제 그만 네가 그 속에서 나왔으면 좋겠어. 혼자 짊어지지 말고 나와 나누고 내게 기댔으면 좋겠어.”
“…….”
“혼자는 너무 외롭지 않니?”
따뜻한 오드의 목소리에 용기가 생겼다. 이엘은 긴 한숨을 쉰 뒤, 그간 있었던 일을 천천히 오드에게 설명했다. 어쩌다 ‘그’를 만나게 되었고, 어떤 계약을 하게 되었으며, 끝내 이온을 살리기 위해 무엇을 바쳐야만 했는지까지 모두 다.
“나는 이온을 살리고 싶었어. 하지만 네가 말한 세 가지. 늑대의 기름, 타이곤의 갈기, 독수리의 눈알은…… 내게 너무 버거운 과제였어.”
“응.”
괴로웠다. 암시장에서 이빨이 뽑힌 호랑이 엘타를 마주했을 때. 끝끝내 자신을 지키다 죽어 버린 주드의 몸에서 기름이 흘러나왔을 때. 그 주드만 한 새끼 독수리 메이슨이 평생을 앞도 보지 못한 채 살아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때.
그녀는 정말 죽을 만큼 괴로웠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온을 살리는 게 맞을까? 남의 생명을, 삶을 빼앗으면서까지 살려도 되는 걸까?”
“…….”
“이온이…… 정말 그렇게까지 해서 살기를 바랄까?”
자신이 아는 그 아이라면 분명 타인을 희생시켜 얻은 생명을 원치 않을 테니까.
“나도 내가 이상한 걸 알아. 그냥 포기하면 되는데. 이온 따위, 아르세니온 따위 그냥 내가 다 포기하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는데!”
“…….”
“……그게 안 돼.”
정말 그게 안 돼. 포기가 안 돼. 내가 이온을 너무 많이 사랑해서…… 그 아이를 포기할 수가 없어.
“내 목숨처럼 사랑했나 봐. 나는 이온을, 오빠를 정말 많이 아꼈나 봐.”
“엘.”
“오빠는 내 꿈이고 내 빛이었어. 오빠가 황제가 되면 아버지와 선대들이 어그러뜨린 이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오빠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날 때부터 차기 황제로 내정된 것과 다를 바 없이 자랐다. 아르세니온은 이엘이 생각한 가장 완벽한 성군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녀는 이온을 통해 꿈을 꿨다. 그가 만드는 세상에 자신의 소망을 두었다. 그는 자신의 이상향이었다.
“그런데 이온이 죽었어. 그날. 나를 구하기 위해 루스 경과 기사단을 내게 보내는 바람에, 습격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 버렸어.”
쓰러진 이온을 발견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녀도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르네의 검으로부터 겨우 살아남아 피범벅이 되어 눈만 뜬 채 이온을 찾아 헤맸는데……. 제 오빠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무서웠다. 차갑게 굳은 이온을 보는 순간 덜컥 겁이 밀려들어 왔다. 자신이 죽는 것보다, 어머니가 죽었던 것보다, 이온의 죽음은 그녀에게 더 큰 충격으로 와닿았다. 아비규환이 된 전쟁터보다 제 혈육의 고요한 죽음이 더 공포였다면 믿어지겠는가.
“아. 나의 아르세니온. 왜 나를 구했니. 왜 나를 살리기 위해 네가 죽었니.”
“…….”
“왜 내 꿈을, 내 소망을 무너뜨렸어. 난 너밖에 없었는데. 이 지옥 같은 학대에서 벗어날 길은 너 하나뿐이었는데.”
이온이 황제가 되면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황궁을 떠나 평범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