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48화 (348/488)

348화

“포르 자작은 폐하를 깊게 존경하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

“폐하의 이야기가 나올 때, 표정이 밝아지더군요.”

“그래? 경이 알아차릴 정도면 코르넬의 표정이 정말 밝았나 보구나.”

이엘이 놀리듯이 말하자 하트는 저도 모르게 살짝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그러다 금세 표정을 풀고는, 다시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렉토스는 올리세스의 동생인 리노가 코르넬의 친척이었다던 그 사람의 제자라고 했어.”

“그 사실 진위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노아가 확인했다.”

“늑대 공작이 무사히 돌아왔습니까?”

“응. 며칠 전에. 내가 구조하러 다녀왔어.”

“다행이군요.”

노아가 안전해서 다행이라는 건지, 그녀의 걱정이 하나 덜게 되어 다행이라는 건지. 어쨌든 ‘어울리지 않는’ 하트의 안도를 들으며 이엘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리노 윌터는 정말 존재하고 있고, 올리세스는 그의 존재를 철저히 감추기 위해 고립된 마을에 동생을 숨겼어.”

“그 마을의 위치도 알아낸 겁니까?”

“응, 노아의 말에 의하면…… 조금 이상한 마을이라더군.”

가짜 신을 만들어 믿는 집단.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하는 포필렌. 간략한 노아의 설명을 들으며, 이엘은 올리세스 윌터가 생각보다 머리를 잘 쓰는 놈이라는 걸 알게 됐다.

“아무튼 리노를 직접 만난 노아의 말에 의하면, 그는 정말로 코르넬의 친척인 그 사람의 제자였던 모양이야. 물론 리노 윌터가 온전한 정신이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코르넬 포르 자작이, 아는 것을 다 말해 주었습니다.”

“정말? 그가 무엇을 알고 있었나?”

“테런스 포르. 코르넬의 친척이자, 1제국의 연구원 소속이었다던 그 평민의 이름이 테런스 포르입니다.”

이엘은 하트를 데리고 조금 더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재규어의 영지에서 훔쳐 듣는 놈이 누가 있겠냐마는,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는 판단하에서였다. 두 사람만 온전히 남겨진 곳에 도착하자 하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코르넬은 테런스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그가 어릴 때부터 제도 내에 있던 성전 근처에서 자랐던 터라 다른 인간들보다 신앙심이 좋았다고 했습니다.”

“신앙심이 좋았는데…… 연구소에 들어갔다고? 혹시 차자였나? 가문의 성을 받지 못하는 차자였다면 도피처로 연구원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아닙니다. 코르넬의 말에 의하면 테런스 포르는 장자였고 가문의 성을 받았다고 합니다.”

“…….”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연구원이 되었고 그로 인해 2차 전쟁 때 가장 먼저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그랬겠지. 2차 전쟁은 악의 근간이 된 황실과 연구소를 박살 내는 게 이종족 모두의 목표였을 테니까.

“그리고 이종족을 딱히 싫어하진 않았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좋게 생각했기 때문에, 포르 가문에서도 그를 별종 취급했다고 합니다.”

“그건 좀 어폐가 있는걸. 이종족을 좋게 생각하는데 하필 연구원에 들어가다니. 그것도 장자였다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을 텐데? 당시에 연구소는 이미 타락하여 이종족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는 곳이 되었어.”

“그건 모르겠습니다.”

성전 근처에서 자라면서 나자르를 자주 접했을 것이고, 그들에게서 선한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면…… 연구원이 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엘은 테런스 포르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또?”

“코르넬이 테런스 포르를 직접 만난 건 아주 어릴 때이고 그마저도 몇 번 되지 않아 그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랬겠지. 그때 코르넬은 어렸으니까.”

“테런스는 딸이 둘 있었고,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일찍 죽었다고 합니다. 두 딸은 아마 2차 전쟁 때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 중입니다.”

이엘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눈가를 찌푸렸다. 크게 기대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정보가 적을 줄이야……. 오히려 노아에게서 들은 내용이 더 정보 가치가 있었다.

“노아는 올리세스의…….”

“폐하?”

그 순간이었다. 말을 하다가 만 이엘의 행동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하트가 제 허리춤에 있는 검을 빼내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그의 허리 쪽으로 훅 들어왔다. 그 짧은 순간에 하트는 자신이 검을 꺼내는 것보다 이엘이 제 것을 가져가는 게 빠르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겉옷을 들춰 그녀가 손을 대기 용이하게 해 주었다.

촤악─! 검집에서 뽑힌 검이 부드럽지만 힘이 잔뜩 실린 채 호선을 그리며 지저분하게 솟아 있던 잡초를 베어 버렸다.

그리고 잡초가 사라지며 트인 시야 안에 새파랗게 질린 채 덜덜 떨고 있는 뱀이 보였다.

“사, 사, 살려, 살려, 살려 주, 주……!”

포레스트의 뺨 위에 붉은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겁에 질린 뱀은 털썩 주저앉은 채 아래턱을 연신 떨고 있었다.

“사, 사, 살려 주세요, 폐, 폐, 폐하…….”

“…….”

“모, 모릅, 니다…… 정말, 정말 하나도, 하, 하나도 모릅니다…….”

“누가 네게 영지 안을 돌아다닐 자유를 주었지? 나는 허락한 적이 없는데.”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설원에서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기절했던 뱀은 이곳에 도착하고도 한동안 몸을 추스르지 못하다가 며칠 전부터 기운을 차린 듯했다. 때마침 노아와 귀족회의 등으로 인해 이엘도 정신이 없던 터라 포레스트를 잊고 지냈다. 대신 그의 방문 앞을 근위대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했던 것 같은데.

“근위대장.”

“예, 폐하.”

엄한 목소리로 하트를 부르니, 분위기를 읽은 하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한껏 낮추며 대답했다.

“근위대가 해이해졌군.”

“죄송합니다.”

“뱀 하나 지키지 못해 이 사달이 났나?”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포레스트의 방을 지켰던 자들을 당장 불러와.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예, 폐하.”

서늘한 그녀의 목소리에 하트가 곧장 근위대를 소집하기 위해 몸을 틀었을 때였다.

“폐하! 저를 벌해 주세요!”

“…….”

“그, 근위대는 잘못이 없습니다.”

“…….”

“정말입니다. 제가, 제가 틈을 보다가 나왔습니다. 몰래 빠져나온 건 저입니다! 근위대는 경비를 허술히 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밖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근위대의 경비가 허술했다는 뜻이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근위대를 벌하진 말아 주세요…….”

“왜? 근위대를 벌하든 벌하지 않든, 너완 관계없는 일이잖아.”

“그렇지만…….”

뱀의 반응이 의외였던 건지 이엘은 자리를 떠나려던 하트를 붙잡았다. 그러곤 벌벌 떠는 포레스트의 목에 검을 갖다 대며 단호히 말했다.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해. 그건 들어선 안 되는 말을 들은 너 역시 마찬가지고.”

“죄송합니다, 폐하…….”

“그러니 솔직히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었고, 로빈이 네게 어떤 명령을 내렸는지.”

포레스트를 뱀의 영지에서부터 데리고 온 건 그를 이용해 로빈의 계략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록 포레스트는 이렇다 할 행동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이엘은 차라리 이걸 기회 삼아 그를 이용해 로빈의 속셈을 파악할 요량이었다.

“공작님은 다른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폐하께 가까워지라고…….”

“포레스트. 나와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했잖니.”

“…….”

“내가 미적거리고 에둘러 말하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은 진심이다. 포레스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할 수만 있다면 폐하의 애첩이라도 되어, 폐하의 즐거움이 되라고……. 폐하께선 제 목소리를 좋아하시니, 그걸 무기로 삼아 환심을 사라고 했습니다.”

“…….”

“아, 아이를…….”

“…….”

“폐하의 마음에 들어, 황손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넌지시 했습니다.”

하트의 표정이 사납게 구겨졌다. 이엘이 가장 싫어하는 말을 저따위 하찮은 뱀에게조차 할 정도로, 로빈의 머릿속은 온통 아이밖에 없는 것이다. 역겹고 구역질이 났다. 하트는 제 눈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포레스트에게 로빈을 투영시키고 검으로 그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무, 물론 저는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

“폐하의 마음이 제게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처음엔 자신만만했었다. 이엘이 수많은 뱀들 중에서 로빈도 아닌 자신을 골랐다는 점에서, 포레스트는 의기양양했고 자부심도 높아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황제는, 나를 이용하고 있는 거야…….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포레스트는 갈등에 사로잡혔다. 가치가 없어지면 분명 내쳐지겠지. 버려질 것이다. 어쩌면 살해당할 수도 있고. 그러기 전에 그녀의 곁을 떠나 자신이 살던 영지로 돌아가는 게 맞을 텐데…….

그러나 떠나기 싫었다. 자신을 천대하고 역겹게 쳐다보는 타 종족이 있어도 상관없다. 그저 단 하나뿐인 인간 여자의 옆에서 죽는 날까지 머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감히 제가 어떻게 폐하의 애첩 자리를 바라겠습니까.”

“…….”

“감히 황손을…… 어떻게 제가 꿈꾸겠습니까.”

“그 얘기는 마치 네 주인이 로빈이 아니라 나라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전 뱀이고, 종족이 없으면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

“하지만 폐하께서 종족을 버리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트는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표정으로 다른 검을 빼 들었다. 아마 이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테니 여기서 저놈의 목을 베어 처리할 것이다. 놈은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

“폐하. 그냥 빠르게 처리하겠습니다.”

“폐하! 살려 주십시오! 절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