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
근위대장 하트와 함께 궁정 화가 루벤이 재규어들과 함께 성내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이엘은 걸치고 있던 숄을 안쪽으로 여미며 창밖에서 시선을 떼 침실을 바라보았다.
“노아.”
“…….”
정말 몸이 좋지 않나 보네. 이엘은 걱정이 담긴 얼굴로 잠든 노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언제나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 건 늑대의 몫이었는데, 오늘은 내가 그 일을 대신하게 되었구나. 피식 웃으며 침대로 다가가 끄트머리에 살짝 걸터앉았다.
“괜찮아. 내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염려할 것 없어.”
깊게 잠든 탓에 전혀 듣지 못하는 노아를 위로하듯, 이엘은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녀는 손을 뻗어 노아의 탄탄한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달간 올리세스의 영지에 머물렀던 노아의 이야기를 짧게나마 들었다.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이엘은 일단 그에게 휴식을 주기로 결정했다. 제 성격을 다 죽이고 인간인 척 그들과 어울려 사느라 고생깨나 했을 테니.
“쉬어, 노아. 저녁에 다시 올게.”
대답 없는 노아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니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근위대와 재규어가 인사를 하곤 저택의 문을 열어 주었다.
“다녀왔습니다, 폐하.”
“건강히 다녀와 줘서 고맙네, 근위대장.”
“예.”
가장 먼저 인사를 마친 하트가 옆으로 비켜서며 뒤에 있던 자와 이엘이 마주할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하트의 뒤에서 두 손을 모으고 몸을 한껏 앞으로 숙이고 있던 백발의 노인이 천천히 발을 떼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자세를 낮췄다.
“폐하를 뵙습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아닙니다. 이렇게 다시 한 번 폐하를 뵐 수 있는 영광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간 변고는 없었고?”
그녀가 묻는 변고란, 일라이저의 영지에 있는 루벤의 조카를 묻는 말이었다. 올리세스의 지령을 받아 일라이저의 영지에서 세작 노릇을 하고 있는 노인의 조카. 그가 특별한 일을 꾸미진 않았는지, 이엘은 루벤에게 묻고 있었다.
“예, 폐하. 아직은 무탈합니다.”
“그래. 우선은 응접실로 자리를 이동하지. 알폰스 경. 그를 응접실로 안내해라.”
“예, 폐하.”
루벤이 늑대들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간 뒤에, 하트와 함께 그를 데리고 왔던 재규어들이 이엘의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하얀 천으로 가려진 커다란 물건이었다.
“이게 뭔가?”
“저 인간이 가지고 왔던 겁니다.”
“…….”
“무엇인지는 저희도 잘 모릅니다. 대장이 폐하께 조심히 전달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발트의 대답을 들으며 이엘은 그 물건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 정도 크기에, 반투명한 천 사이로 비치는 여러 색감. 모를 수가 없다. 이엘은 그게 루벤이 그린 자신과 오드, 그리고 어머니의 초상화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발트 경. 그걸 짐의 침실에 가져다 놓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근데 이카르 백은 어디 있지? 오드 님도 보이질 않는데. 같이 온 게 아니었나?”
“나자르 님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대장이 남아서 그 나자르 님을 모시고 천천히 오겠다고 했습니다.”
“오드 님이?”
성력을 너무 많이 썼나. 좋지 않은 소식에 걱정부터 앞섰다. 오드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자신과 이온을 지키기 위해 땅속에서 결계를 발동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장기간 축적된 피로에다가, 바다에서 건진 보호석들을 모조리 파괴하느라 현재는 성력의 상당 부분을 잃어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내 인식표…….
손을 뻗어 제 쇄골 근처를 만지작거렸다. 이엘도 태어나자마자 몸에 인식표를 집어넣었다. 황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2차 전쟁이 터졌던 그 밤. 독수리의 습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땐 이미 인식표가 제거된 뒤였다. 당연히 오드가 제거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걸 제거하는 게 나자르만 가능하다는 건 처음 알았다.
‘그 아이들은 그냥 시간을 멈춰 놓은 것과 똑같다네요. 드레인, 그러니까 그 암컷 용이 두 아이를 살리기 위해 인식표를 제거하자마자 꿈속에 데려간 거래요. 그것 때문에 깨어나지 못하는 거고요.’
언젠가 스완이 전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이엘의 꿈속에 나왔던, 용이 보여 주었던 두 소녀는 드레인이 2차 전쟁 때 몰래 빼돌린 아이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자르와는 달리, 용은 신의 성력을 그대로 받아서 사용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오드처럼 인식표를 완벽하게 제거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스완은 그것에 굉장한 부담을 갖고 있었다. 아직 성력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데, 드레인은 스완이 성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소녀들을 깨울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듯했다. 그 때문에 드레인이 스완을 꽤나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모양인데.
그래서 이엘은 기회를 봐서 오드에게 넌지시 부탁해 볼 예정이었다. 그녀의 꿈속에 잠든 소녀들을 깨워 달라고.
물론 오드도 알고 있겠지. 드레인이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러 죽어야 할 존재를 살린 것과 다를 바 없으니. 그 용은 지은 죄가 있어, 신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오드는 이엘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진 않을 테니 그녀는 저가 드레인과 스완을 대신해 오드에게 부탁해 볼 심산이었다.
“근데 몸이 안 좋다니…….”
짧게 한숨을 쉬며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어쩌면 오드는 이카르와 단둘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 정황을 볼 때 오드의 몸이 지친 건 확실하다. 이엘은 제 소중한 사람에게 힘든 부탁을 할 만큼 염치가 없진 않았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돌아오자마자 그녀의 뒤를 지키던 하트가 낮은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이엘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것 아냐. 그보다 경은 쉬지 않아도 되겠나? 내일 곧장 이곳을 떠날 예정인데.”
“괜찮습니다. 경계까지는 오드 님의 능력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피로함 없이 편히 왔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러셀 후작은…… 역시 같이 오지 않았구나.”
“재규어의 영지라서 그런 듯합니다.”
“…….”
“그는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폐하.”
하트의 어울리지 않는 어설픈 위로를 들으며 이엘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손을 등 뒤로 모아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포르 자작은 만나 봤나?”
“예.”
패티스가 황궁에 있으니 하트는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됐지만, 그가 굳이 참석한 이유는 궁정 화가 루벤을 데려오기 위함과 코르넬 포르를 만나기 위함 때문이었다.
포르. 렉토스로부터 새롭게 알게 된 내용에 포르 가문이 엮여 있다. 코르넬의 친척 중 한 사람이 과거 제국의 연구소 소속이었는데, 그가 이엘의 스승과 친구였다는 건 이엘도 원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렉토스로부터 들은 새로운 내용은 올리세스의 동생이자, 지금 이상한 마을에 잡힌 채 반쯤 미쳤다던 리노가 그 코르넬의 친척이라던 자의 제자였다는 것이다.
이엘은 하트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속삭였다.
“내겐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 단 두 명뿐이야.”
“…….”
“하나는 그대들이 잘 알고 있는 일라이저의 아비인 선대 러셀 후작. 황실기사단의 제 2기사단장이었지.”
루시우스 러셀. 그에게서 이엘은 검술을 배웠다. 원래 황녀는 검과 총을 손에 쥘 수 없었지만, 간신히 허락을 받아 루시우스에게서 황실 검술을 배웠다.
“그리고 모리아 출신의 스승님이 한 분 계셨다.”
당시 모리아는 가장 하층부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이종족과 맞먹는 취급을 당했고, 버려진 인간들이 모여서 근근이 살아가던 낙오된 지역. 자랄 수 있는 작물 같은 건 전혀 없는 황폐한 땅이었으나, 최근에 올리세스가 그 땅에서 그녀 몰래 포필렌을 대량으로 재배했다가 유클리드가 모조리 태워 버렸던 곳. 그곳이 모리아였다.
“천대받는 지역 출신인 사람이 어떻게 황녀의 스승이 되었을지 궁금하지?”
“…….”
“스승님은 출신지를 숨기셨어. 본래 레타와 모리아 같은 지역들은, 그 지역 특유의 억양과 은어를 사용하는데 스승님은 그걸 감추셨거든. 가까이서 오래 지켜보며 지냈던 나조차도 그 사실을 바로 알아채지 못했지.”
어쨌든 그 덕에 이엘이 레타와 모리아 억양을 구사할 수 있어, 예전에 암시장이 열렸던 곳에서 출신지를 의심받지 않았던 것이기도 했다. 이엘은 그때 생각이 난 건지 흐리게 미소 짓다가 이내 걷는 속도를 늦춰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비밀이란 건 그렇게 쉽게 감출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끝내 출신지가 들통나 처형당하시고 말았지.”
“…….”
“그래서 모리아인들을 책임지고 싶었던 것이기도 해.”
어릴 땐 힘이 없어 스승님을 지켜 드리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그분의 출신 지역을 지켜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이유로 모리아 사람들을 전부 제도로 옮겼던 건데……. 빈 영지에 포필렌을 키워 반역의 싹을 만들고 있었다는 올리세스를, 이엘은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말이 샜네. 어쨌든 내가 코르넬 포르를 주의 깊게 보기 시작했던 건 내 스승님 때문이었어. 우연히 코르넬의 친척 중 한 사람이 내 스승님과 친우였다는 걸 알게 됐거든.”
“폐하께서 즉위 전에 러셀 후작과 머물렀다던 인간 마을에서 말씀이십니까?”
“응. 그때도 코르넬은 머리가 굉장히 뛰어났어. 그 많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다만 공포심이 강해서 극도로 예민하고 소심한 탓에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지만.”
게다가 그곳은 로빈이 이엘을 납치하기 위해 쳐들어왔을 때, 그녀와 마을 아이들을 뱀에게 떠넘겨 버렸던 바로 그 마을이기도 했다. 코르넬도 그 자리에 있었다. 3기사단장인 라니에로도 마찬가지로.
모두가 방관자였다. 그녀가 뱀에게 끌려가는 것을 그저 지켜봤고 모른 척 눈감았다.
라니에로와 코르넬은 이엘과 아이들을 외면했던 그날을 기점으로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됐다. 심지어 그들이 밀어냈던 어린아이들 중 한 명이 마을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던 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여 라니에로는 속죄를 위해 그녀의 검이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원래도 체술이 좋았던 데다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던 일라이저에게 황실 검술도 배운 덕에 금세 기사가 되었고 기사단장까지 오를 수 있었다.
반면 코르넬은 이엘에 대한 죄책감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소심한 성격인데 그날 자신이 저질렀던 방관이 얼마나 큰 죄였는지를 사무치게 경험한 탓인지, 코르넬은 계속해서 작아져 갔다.
“난 그가 좋았어. 그의 머리, 그의 지혜, 그의 재치가 좋았어.”
“…….”
“소심해도 가끔 할 말은 하는 그 모습이, 좋았어.”
이엘이 웃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코르넬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지. 그녀는 코르넬을 미워할 수 없었다. 그를 볼 때마다 스승이 자꾸 떠올랐으니까.
코르넬도 피해자다. 뱀의 협박에 그 어떤 인간이 나설 수 있었겠는가.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코르넬을 용서할 이유는 충분했다.
결국 코르넬은 이엘과 일라이저, 라니에로의 도움으로 일어서는 데 성공했다. 이엘이 즉위한 그해는 코르넬이 없었다면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애쓰며 그녀가 황제로 제국을 통치하는 것을 보필했다. 그의 지혜로 이엘은 몇 번이나 흔들리는 제국을 단단히 만들어 갈 수 있었다.
그런 코르넬에게 재상의 자리를 맡기려 했지만, 그는 아직 자신은 그럴 깜냥이 되지 않는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이엘은 코르넬의 의견을 존중하며 아쉽지만 그에게 자작 위를 주는 것으로 공로를 치하했다.
“언젠가 그가 내게 더 큰 힘이 되어 줄 거라고 난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