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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46화 (346/488)
  • 346화

    이카르에게 통솔권을 받은 발트의 구호를 시작으로 재규어들과 하트가 영지 안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이카르는 순식간에 사라진 그들의 흔적을 쳐다보다가 뚜벅뚜벅 걸어가 오드의 앞에 섰다.

    “오드 님.”

    “이카르 백. 역시 백작이 왔군요.”

    “저를 부르시기 위해 제 영지가 아닌 여기서 기다리신 겁니까?”

    “글쎄요. 근위대장에게서 들었겠지만, 여러 사건으로 인해 꽤 지친 상태입니다. 하여 최소한의 성력을 아껴 두고자 이곳에서 그대들을 기다렸을 뿐입니다. 백작을 부르기 위해 이곳에서 대기하던 건 아니랍니다.”

    “저는 오드 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럼 잠깐 시간을 낼까요? 마침 듣는 귀도 없으니까요.”

    오드가 이카르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 웃음엔 어떤 악의나 저의도 없어서, 도리어 이카르 자신이 오드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아마 오드를 마주하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생각을 할 것이다. 마치 신을 직접 마주하는 것과 같은 죄악감이.

    “백작. 편하게 말해요. 괜찮습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폐하께 여쭤보기 전에…… 오드 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우선이란 생각이 들어서요.”

    “네. 물어보세요.”

    “선황후였고 폐하의 어머니셨던 리카르디스 론. 그녀와 제가 특별한 관계였다는 건 오드 님도 잘 아실 겁니다.”

    “네.”

    “그래서 제겐 폐하가 누구보다 소중합니다. 전 가족을 다 잃고 동족도 다 잃었던 터라 삶의 의지가 전혀 없었을 때에 폐하를 만났습니다. 제겐…… 폐하가 제 전부예요.”

    누군들 아니겠냐마는, 이카르는 다른 누구보다 이엘을 특별하게 생각했다. 다들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라볼 때, 자신은 그녀를 제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모두가 동족과 함께 살아갈 때, 이카르는 이엘만을 제 동족으로 받아들였다.

    “그 발단은 폐하가 리카르디스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

    “달리 말하면, 그때 제가 만난 사람이 폐하가 아니라 아르세니온 황자였어도 저는 마찬가지로 그를 지켰을 거란 말씀이고요.”

    “그렇군요.”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하니,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봅니다.”

    “…….”

    “아르세니온이 살아 있습니까?”

    퍽 우습게도 말꼬리가 살짝 떨렸다. 제어하지 못하는 감정이 그 한 마디에 실린 탓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이종족의 직감……이라고 말씀드리면 오드 님께선 웃으시겠죠.”

    “그럴 리가요. 저는 이종족의 감을 꽤 신뢰하고 존경하고 있으니, 그런 염려는 마세요.”

    하아……. 이카르는 긴 한숨을 쉬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폐하 앞에서 그 이름을 꺼내는 것보다 나자르의 앞에서 꺼내는 게 더 쉽긴 하구나. 그 생각에 아주 잠깐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백작은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한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내겐 사정이란 게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오드 님.”

    나자르는 어떤 말도 함부로 내뱉어선 안 된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카르도 애초부터 오드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작은 단서라도 들을 수 있다면……. 그게 아주 하잘것없는 단서라도 좋다. 아르세니온과 관련한 이야기를 노아와 다른 이들보다 먼저 알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어떤 말씀이라도 좋습니다.”

    “알겠어요. 백작은 똑똑한 사람이니, 내 말뜻을 잘 이해할 거라고 믿어요.”

    “…….”

    “나자르는 신의 음성을 듣고 사람들에게 신탁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내려온 신탁들은 인간과 이종족에게 전해지는 신의 음성이므로, 절대로 거짓을 섞거나 진실을 감춰서는 안 돼요.”

    오드가 마치 아주 먼 옛일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으로 잠깐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다 짧은 한숨을 쉬며 이카르를 향해 빙긋 웃었다.

    “아주 오래전에 우리는 마지막 신탁을 받았어요.”

    “…….”

    “다음에 태어날 아이는 신의 선택을 받아, 그분의 뜻대로 이 땅을 씻어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그건……!”

    “그러나 당시 선황후 폐하께선 쌍둥이를 임신하고 계셨지요.”

    이카르도 몰랐던 내용이었다. 물론 당시에 그는 도망자의 신세였으니 신탁의 내용을 들을 수 없는 처지이긴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만난 리카르디스도 그런 내용은 제게 말해 준 적이 없었다.

    “둘 중 어떤 아이가 신께서 말씀하신 아이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었어요.”

    “…….”

    “그래서 쌍둥이 모두를 살려야 했지요.”

    “하지만 신탁의 내용을 듣고. 알렉산드로가 폐하와 황자를 살려 뒀을 리가……!”

    “맞아요. 당시 황제였던 폐하의 아버지 알렉산드로는 살육에 미쳐 있었고, 권력에 눈이 먼 자였습니다.”

    “…….”

    “그래서 나자르들은 신탁을 그대로 전하면 안 될 거라 판단하고 선황에겐 거짓을 고했습니다. 두 아이가 황제를 도와 제국을 더 부강하게 할 것이며 황제에게 커다란 힘이 될 것이라고.”

    “그런…….”

    “그러므로 두 아이가 모두 필요하다고.”

    이카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신의 음성은 절대로 거짓을 섞어선 안 된다고 조금 전에 말한 게 오드였다. 그럼 나자르들은 저질러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 황녀와 황자를 살리기 위해 거짓을 말한 것인가?

    “우리는 신께서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보낸 자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들을 바르게 이끌지 못했어요.”

    “…….”

    “인간들을 따라 보호석을 만들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에 가담하기도 했죠.”

    이카르는 씁쓸한 표정을 짓는 오드를 바라보았다. 아마 그때의 오드는 몇 안 되는 나자르인들 중에서 어린 축에 속했을 테니 직접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겠지만, 동일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기에, 마지막으로 거짓 신탁을 전했던 거예요.”

    “왜 그렇게까지…….”

    “글쎄요. 어쨌든 우리는 육체가 죽으면 신의 품으로 돌아가게 될 테니, 죽음이 무섭지 않아서였겠지요?”

    “…….”

    “말이 조금 길어졌네요. 백작이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

    “나 역시 신탁에서 말하는 아이가 황녀인지, 황자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건…….

    “그래서 모두를 살려야 했어요.”

    “…….”

    “하지만 어떤 것이든 대가가 필요해요. 거저 얻을 수 있는 건 없죠.”

    이카르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져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경험을 너무 오랜만에 하는 터라, 주먹을 쥔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독수리에게 해를 당했던 황녀는 숨이 꺼지기 직전에 내가 인식표를 제거하면서 살렸지만.”

    “…….”

    “황자는 너무 늦게 도착해 숨이 멎은 뒤였습니다.”

    “그런…….”

    “생명의 무게는 그 어떤 것보다 무거워요. 같은 무게만큼의 가치가 필요하죠. 생명을 살리기 위해선, 같은 생명이 필요합니다.”

    요컨대 이미 죽은 자의 생명은 돌려놓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아르세니온은 대체 어떻게…….

    “살았으나 살아 있지 않은, 그런 상태예요.”

    주어가 생략됐지만 이카르는 오드의 말을 이해했다.

    아르세니온은 살아 있다. 하지만 살아 있지 않다.

    자신들처럼 숨을 쉬며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억지로 생명을 이어붙인 상태라는 의미였다. 마치 용의 능력에 갇혔다던 그 소녀들처럼.

    “이게 내가 백작에게 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답한 이카르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상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이게 어떤 변수로 작용하게 될까. 살아 있는 건 아니니 그녀의 황위엔 큰 위협은 안 될 것이다. 살아 있지 않다는 건 눈앞에 나타날 리 없다는 소리와도 같으니, 아르세니온의 존재 자체만 감추면 지금처럼 평온할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죽은 건 아니라니까……. 저로선 리카르디스의 두 아이를 모두 보살펴 줄 수 있는 상황이니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닌데, 그게 죽은 것과 뭐가 달라.”

    저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실소하며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리키. 누님. 이제 난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모든 걸 알게 됐는데. 누님의 또 다른 아이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내가 모른 척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내 삶은, 내 생은 모두 누님의 딸에게 주었는데. 누님이 사랑으로 낳은 또 다른 아이에게 더는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그러다 눈을 가린 손을 치우고 다급히 오드를 불러 세웠다.

    “오드 님. 조금 전에 생명은 생명으로만 치환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죠?!”

    “생명의 무게는 같은 생명밖에 없다고 했지요.”

    “아르세니온을 완전히 살릴 방법이…… 있는 거군요.”

    “이카르. 그대의 생명은 불가능해요.”

    이카르의 마음을 꿰뚫어 본 오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백작은 이미 남은 생과 삶을 폐하를 위해 내놓지 않았습니까?”

    “…….”

    “폐하를 위해 남은 삶, 수명까지 전부 버리고 포기했잖아요. 그대는 노화를 선택했고, 우논으로서의 영존을 버렸습니다.”

    “……생명값의 무게가 가벼워졌단 의미인가요? 벌써요?”

    오드는 말없이 이카르를 쳐다보았다. 그는 몇 년 전, 영존하게 살 수 있는 우논으로서의 삶을 포기했다. 이엘을 지키기 위해, 인간으로서 언젠가 죽어야 할 그녀가 외롭게 떠나지 않도록 자신의 삶과 생명선을 버리고 인간처럼 노화를 선택한 것이다. 비록 그게 지금 당장 진행되는 일은 아닐지라도 한 번 선택된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허탈해진 이카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게 닥친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황자를 포기하겠습니다.”

    “…….”

    “이제까지처럼 황자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겠습니다.”

    무겁고 어려운 다짐이었다. 어쩌면 이엘을 만나, 리카르디스의 아이를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때보다 더. 이카르에겐 한없이 무겁고 어려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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