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처음 하트가 제게 황자의 생사를 물었을 땐,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이카르는 이유 없이 심장이 꽉 조이는 듯한 기분을 좀처럼 떨칠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한 건지 이유가 있을 것 아냐.”
“근위대장이 내게 황자의 생사를 물었어.”
“하트 경이? 그가 왜?”
“그건 나도 몰라.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물었는데, 왜 자꾸 그게 마음에 걸리는 건지 모르겠어.”
횡설수설하는 이카르의 말을 들으며 노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하이에나가 근거도 없이 무턱대고 그런 질문을 할 놈은 아니다.
“다른 건 필요 없어. 네가 황자를 확실히 죽였다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때의 난 한시라도 빨리 전쟁을 마무리 짓고 싶었고, 어린 황자 하나에 매달려 있을 순 없었다.”
“그 얘긴…….”
“황자의 끝을 지켜보지 않았다는 거다.”
설령 숨이 붙어 있었다고 해도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노아는 숙달된 검술로 정확히 급소를 찔렀다. 어린아이가 엄청난 출혈을 감당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건 황자의 곁에 오드가 없었다면 벌어졌을 일이고.
“황자의 반지…….”
노아는 불현듯 황자의 반지가 떠올랐다. 지금 이엘이 끼고 있는 그 반지는 본래 황자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죽는 날까지 황자가 끼고 있었을 텐데……. 그랬나? 아르세니온 황자가 죽을 때 그 반지를 끼고 있었나?
그랬다면…… 지금 폐하가 갖고 있는 반지는, 죽은 황자의 손에서 빼셨다는 건가? 그럼…….
“황자의 마지막을 지켜본 건 폐하다.”
“폐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마지막을 지켰다고. 차갑게 식은 눈을 직접 가렸다고.”
“하지만 말이 안 돼. 황자가 살아 있다면, 이렇게 오래 어디서……!”
“…….”
“…….”
노아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입을 열지 못했다.
순간 무언가 떠오른 탓에.
“……이봐, 늑대. 난 이렇게까지 가정하고 싶진 않은데, 폐하께선 10년 동안 어디에 사셨다고 했지?”
“…….”
“넌 알고 있나?”
땅속. 그냥 그렇게만 말했다. 땅속에 오드가 쳐 둔 결계 안에서 겨우겨우 버티며 살아왔다고. 단지 그렇게만 언급하고 더 이상 말해 주지 않았다.
“거기에 황자가 살아 있다면?”
이카르가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지만 노아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노아! 무슨 말이라도 해 봐.”
“…….”
“황자는 살아 있으면 안 돼.”
“…….”
“그 애는 폐하의 발목을 잡을 거라고!”
그 순간 노아는 뱀의 말이 떠올라 눈을 커다랗게 치뜨며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고 말았다.
‘뭔가가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어. 그것 때문에 폐하는 ‘그’와 거래를 한 거야. 그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이라서.’
미치도록 소름이 돋는 로빈의 가설에, 기가 차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게도 요사한 뱀의 추측이 이렇게 적중하다니. 왜 그 뱀 새끼는 이런 건 쓸데없이 잘 맞히는 건지. 빌어먹을…….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찾아왔다. 각자의 머릿속엔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서, 숨 쉬는 것조차 괴롭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고 한참 만에 먼저 적막을 깬 건 노아였다.
“그럼 죽이면 돼.”
“뭐?”
“살아 있어도 괜찮아. 폐하의 발목을 잡는다면 죽이면 된다고.”
“미쳤어?”
“…….”
“너는 또 폐하에게서 황자를 앗아 갈 셈인가?”
이번엔 정말로 이카르의 눈동자에 살기가 담겼다. 그는 노아를 원수 보듯 쳐다봤다. 이미 죽었다면 몰라도, 살아 있는 황자를 또 죽이게 놔둘 마음은 없었다. 이엘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한들, 그는 이엘의 하나뿐인 피붙이이며 리카르디스의 아들이다. 그가 죽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마음은 없었다.
“네가 황자를 죽이려고 든다면, 폐하뿐 아니라 내 종족과도 갈라서는 걸 생각해야 할 거야.”
“폐하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폐하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든 해. 그게 설령 폐하의 피붙이라고 하더라도.”
“네가 뭔데 목숨의 무게를 정해?”
“…….”
“내겐 폐하와 황자 모두 중요하다. 둘의 목숨을 비교할 수 없다고.”
아. 목숨의 무게……. 내가…… 내가 지금 목숨의 무게를 비교하고 있었나? 폐하가 살아야 하니, 그녀의 발목을 잡는 황자를 한 번 더 죽이겠다고? 내가…… 몇 달 전 로빈이 했던 말과 다를 바 없는 말을 했다고?
‘하지만 너도 마음이 바뀌거든, 내 손을 잡고 날 도와.’
젠장, 빌어먹을. 제발…….
‘그게 내 사랑의 방식이야.’
내 사랑이, 뱀의 사랑과 다를 바가 없었다니……. 노아는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럽고 괴로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켜야지. 폐하께 소중한 사람이면, 그를 지킬 생각을 먼저 해야지. 마음이 조급해서 또 그녀의 마음을 상처 입힐 생각을 하다니.
웃음이 나왔다. 매사에 여유가 넘쳤던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초조하고 참을성이 없어졌다는 게. 제지할 수 없는 커다란 힘과 맞서 싸워야 하는 현실이 노아를 매일매일 괴롭혔다.
“일단 넌 좀 쉬어. 미친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이카르의 일갈에 노아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미친 소리라니. 내가 이딴 말도 듣는 날이 오는군. 자꾸만 밀려들어 오는 자괴감을 느끼며 노아는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
이엘은 음식과 물건이 담긴 트롤리를 밀고 노아가 머무는 방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공작.”
그러나 방 안에서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엘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카르가 고민 끝에 그녀에게 다가가 트롤리를 대신 쥐고 제 쪽으로 당겼다.
“제가 공작님에게 전달하겠습니다. 폐하는 가서 쉬시는 건 어떠십니까.”
“…….”
“폐하……?”
“노아. 대답해.”
이엘은 이카르의 말을 듣지 않고 조금 전보다 세게 문을 두드렸다.
“아니면 내가 문을 박살 내고 들어갈까?”
그녀의 살벌한 어조에 이카르가 마른침을 삼켰다. 노아가 눈에 파묻혔던 동굴에서 구출되어 이곳에 도착한 지 나흘이 지났건만, 그는 침실에 틀어박혀 좀처럼 나오질 않았다. 알폰스를 포함한 늑대들이 간단한 식수와 물건들을 담은 트롤리를 문 앞에 두고 갔지만, 노아는 방문도 열지 않는 건지 매번 트롤리엔 손댄 흔적이 없었다.
“아픈 게 아닌가 걱정이 돼서 그래.”
조금은 누그러진 듯한 그녀의 말투에 이카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엘이 정말로 저 단단한 방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갈 것 같아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이카르는 낮게 한숨을 흘리며 여전히 굳게 닫힌 방문을 쳐다봤다. 노아가 이렇게 방에서 나오지 않는 건, 아마도 자신과 나눴던 얘기 때문이겠지. 아르세니온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가정 때문에…….
사실 이카르도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노아보다 마음이 더 다급할지도 모른다. 저 늑대는 이엘을 지키기 위해 아르세니온을 죽인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노아에게 말했던 것처럼, 죽었다고 생각했을 땐 그냥 넘어갔을지 몰라도 정말 아르세니온 황자가 살아 있다면 이카르는 그를 이엘과 똑같이 지킬 생각이었다.
“폐하.”
“이카르 백. 난 노아와 할 얘기가 있어. 호위는 괜찮으니 백작은 먼저 돌아가도록 해라.”
“그게 아니라…….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물어볼 용기가 없다. 엄두도 내지 못했다. 노아가 방문을 꼭 닫고 그녀의 물음에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이카르 역시 덜컥 겁이 밀려와 물어보지 못했다.
“노아. 명령이야. 문 열어.”
“…….”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으면 강제로 문을 열 거야.”
이카르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며 자꾸만 고개를 뒤로 돌려 상황을 지켜봤다. 그렇게 몇 번 노아를 타이르는가 싶던 이엘은, 별안간 뒤로 물러서더니 가볍게 몸을 풀고 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설마 몸으로 문을 여시려고……?! 깜짝 놀란 이카르가 잽싸게 그녀를 막기 위해 달려가려 할 때였다.
“폐하.”
방문을 연 노아가 제 품 안으로 쏟아지듯 달려온 이엘을 끌어안았다.
“죄송합니다.”
“…….”
“몸이 좋지 않아서. 고집을 좀 부렸습니다.”
피곤에 지친 채 이엘을 품에 안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노아의 지친 목소리를 들은 이엘은 그에게 화를 내려다가 짧게 한숨을 쉬는 것으로 서운함을 사그라뜨렸다. 그녀는 팔을 뻗어 커다란 노아의 등을 여러 번 쓸어내렸다.
“몸이 안 좋으면 그렇다고 내게 말을 해야지.”
“죄송합니다.”
“곧 있으면 제도에 간 오드가 올 거야. 오드에게 몸 상태를 봐 달라고 부탁할 테니까 좀만 더 버텨.”
“……예.”
그녀를 품에 안고 고개를 숙였던 노아가 시선을 틀어 이카르와 눈을 마주쳤다. 미간을 찌푸리는 재규어를 향해 늑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언젠가 그녀에게 직접 물어 확인해야겠지만, 노아는 그게 지금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이카르는 먼저 돌아서야 했다. 자신 역시 늑대와 같은 생각이다. 아직은 이엘에게 물어볼 때가 아니다.
그리고 아르세니온의 존재를 꼭 확인해야 한다면……. 그가 살아 있다는 걸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건 노아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이카르는 이엘과 노아가 방 안으로 사라지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저택을 빠져나왔다.
“대장! 근위대장이 권역 끝을 넘어섰답니다!”
“알았어. 내가 직접 간다.”
“대장이요?”
“어. 몇 명 더 데리고 따라붙어.”
말을 마친 이카르가 커다란 재규어로 변해 들판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로 재규어 몇 마리가 따라붙어 경계를 향해 달렸다.
제도로 향했던 하트 일행은 오드가 함께 있기 때문에 성력을 사용한다면 곧장 이곳으로 도착했을 텐데도, 굳이 재규어의 권역 끝에서 멈췄다는 건 다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오드. 그는 나자르다. 자신들은 절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신의 대리자. 신의 뜻이 그에게 전해지고, 그가 움직이는 게 곧 신의 뜻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을 마쳤을 때였다.
“대장! 저 앞에 근위대장인 것 같은뎁쇼?!”
그의 뒤를 따르던 재규어 중 하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눈과 안개로 인해 새하얗게 번진 시야 사이로 커다란 하이에나 한 마리와 인간 두 명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카르는 달리던 속도를 천천히 줄이곤 이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트 경.”
“오셨습니까, 백작님.”
“왜 거기서 멈춰 있나? 폐하께서 기다리시는데.”
“오드 님께서 성력을 많이 소모하신 탓에 잠깐 쉬고 있었습니다.”
“옆에 인간은…….”
“폐하께서 말씀하신 자입니다.”
백발의 노인이 이카르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아마 그녀가 말했던 궁정 화가인 듯했다. 그의 손엔 하얀 천으로 가려진 커다란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이카르는 유심히 쳐다보다가 무리를 정렬시키는 발트를 불러 세웠다.
“발트.”
“왜 부르셨소, 대장.”
“한 놈은 저 노인을 등에 태우고, 넌 저 인간이 들고 있는 물건을 잘 챙겨라.”
“저게 뭡니까?”
“글쎄. 폐하께서 시키신 물건인가 보지. 물건이 상하지 않게 조심히 다뤄서 폐하께 드리도록.”
하얀 천으로 가려진 것에 자꾸만 시선이 빼앗겼다. 이카르는 그것을 들춰서 보고 싶은 욕망을 누른 채 저를 따라왔던 제 종족들에게 노인과 하트의 호위를 맡겼다.
“난 오드 님을 호위해서 천천히 돌아갈 테니 너희는 먼저 출발하도록.”
“알겠소, 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