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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44화 (344/488)
  • 344화

    그러나 몇 번의 실패 끝에 노아는 제 얼굴을 밖으로 쏙 내미는 것에 성공했고, 그를 발견한 하이에나들이 재빨리 능력을 사용해 노아를 들어 올렸다.

    “노아!”

    바닥에 툭 떨어진 노아는 제 앞으로 달려오는 이엘의 얼굴을 확인하며 작게 웃었다.

    “폐하.”

    “노아! 괜찮아? 몸이 얼음장이야!”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공작은 제가 태우겠습니다.”

    르네가 커다란 독수리의 모습으로 돌아가더니 몸을 낮췄다. 노아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독수리의 등에 올라탔고, 이엘 역시 르네의 등에 탔다.

    “눈이 다시 내리기 전에 도착해야 하니 우리는 먼저 출발하겠다. 다들 조심해서 최대한 빠르게 복귀해!”

    “예, 폐하!”

    그와 함께 르네가 땅을 박차고 날개를 펼쳐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독수리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내내, 그의 등에 올라탄 이엘은 눈을 감고 누운 노아의 안색을 살피기 바빴다. 몸은 차가운데 내뱉는 숨은 뜨거웠다. 입술까지 새파랗게 질린 채 저를 보고 웃고 있다.

    “그대는…… 지금 웃음이 나와?”

    “예.”

    “…….”

    “폐하께서 이렇게 저를 데리러 오셨잖습니까. 어떻게 웃음이 안 나오겠습니까.”

    그러면서 한참을 쿨럭거렸다. 이엘은 제 몸에 두르고 있던 겉옷을 벗어 노아의 몸 위에 덮었다. 그러나 노아는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의 옷을 도로 이엘에게 돌려주려 했다.

    “전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온몸이 이렇게 엉망인데.”

    “저보다 폐하의 건강이 걱정입니다. 전 우논이니 이런 추위쯤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안 돼. 덮고 있어. 체온이 계속 떨어지고 있어.”

    이엘의 따뜻한 손이 노아의 이마를 덮었다. 그 따뜻한 온기에 노아는 작게 웃으며 눈을 감고 조금 더 그녀에게 몸을 기댔다.

    “나타니엘. 정말 나의 엘이 이곳에 와 주었군요.”

    “아직은 정신을 놓으면 안 돼. 이카르의 영지에 돌아가서 쉬게 해 줄 테니까 눈을 감지 마.”

    이엘이 다정하게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노아가 정신을 잃지 않게 끊임없이 말을 붙였다. 그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노아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몇 달 만에 마주한 그녀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여전히 다정하고 상냥해서.

    “제가 그곳에 있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독수리와 재규어, 하이에나와 늑대의 도움을 받았지.”

    이엘의 말을 들으며 노아가 또 웃었다. 눈이 와서 냄새만으로는 찾기 어려웠을 텐데. 온갖 이종족이 동원된 덕에 구조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고맙다, 르네.”

    노아는 잊지 않고 저를 태우고 있는 르네에게도 인사를 전했다. 독수리는 대답 없이 날개를 퍼덕이며 나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돌아온 걸 환영해, 노아.”

    이엘은 노아의 머리를 제 무릎에 올리곤 허리를 숙여 그의 이마 위에 재회의 키스를 전했다.

    *

    “정신이 들었나 보지?”

    “내가 얼마나 잠들었지?”

    “하루 정도.”

    노아는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붙잡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깨자마자 본 얼굴은 이카르였다. 눈을 떴을 때 마주치는 게 이엘이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이었나……. 그 생각에 아주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왜. 눈 뜨자마자 본 게 내 얼굴이라 역겨웠나?”

    용케 제 속내를 간파한 이카르가 꼴좋다는 듯 비웃었다.

    “그만해라. 너랑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할 정신도 없으니까.”

    “폐하께선 침실에서 눈 붙이고 계신다. 널 밤새 간호하시느라 체력이 다하셨거든.”

    그래서 이 빌어먹을 시중 짓도 내가 하고 있는 거고. 이카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들고 있던 트레이를 협탁 위에 쾅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넌 예전부터 그랬지만, 역시 이번에도 타이밍이 좋았네. 폐하께서 떠나시기 직전에 널 구했으니 말이야.”

    “…….”

    “나로선 아깝게 됐어. 조금만 늦었더라면 폐하께서 그냥 두고 가셨을 텐데.”

    이카르가 비아냥거리듯 노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엘의 앞에선 노아를 공작 대접해 주긴 했지만, 이렇게 뒤에서까지 그를 대우해 줄 마음은 없었다.

    노아 역시 이카르의 빈정거림을 묵과하듯 한 귀로 흘려들었다. 다소 예의 없는 재규어의 말투에도 그가 화를 내거나 기강을 잡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 때문이었다.

    이카르의 종족을 무참히 학살한 루시우스 러셀은 당시 노아의 친우였고, 노아는 제 친구가 황제의 명령으로 끔찍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모르는 척 넘겼다. 그저 제 오랜 친구가 황명에 따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는 변명을 들며.

    어쩌면 노아는 자신이 루시우스가 아니라 재규어의 편에 서야 하는 걸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와의 우정이 그때의 자신에겐 너무도 소중해서.

    “그때 네 친구란 놈이 우리 종족을 무참히 도륙했을 때, 넌 네 친구를 감쌀 게 아니라 이종족의 편에 서서 함께 싸웠어야 했어.”

    “…….”

    “종족을 거의 다 잃고 홀로 남았던 내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너도 겪어 봐야 했다.”

    이카르의 말을 들으며 노아가 자조하듯 낮게 웃었다. 애석하게도 저 어린 재규어가 하는 말에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그때 이종족을 모아 반기를 들었더라면, 적어도 1차 전쟁 때 무력하게 당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폐하께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겠군?”

    “맞아. 난 널 찾고 싶지 않았어. 그냥 그대로 확 사라져 버리길 바랐지.”

    “…….”

    “근데 폐하께서 널 간절히 기다리시니까.”

    이카르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걱정을 외면할 순 없었다. 이엘에겐 그 늑대가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에게 노아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자처하여 나서겠다는 말까지 했고.

    “넌 다 지난 이야기를 자꾸만 언급하는 내가 싫겠지. 루시우스가 결국 1차 전쟁 때 네 종족을 배신했던 것까지 떠오른다면, 내 종족을 멸족시켰던 그 토벌전이 네게도 기억하기 싫은 과거가 될 테고.”

    “…….”

    “근데 이제 와서 널 미워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카르는 들고 온 붕대를 노아가 누워 있는 침대 위로 무심하게 툭 던졌다.

    “원흉은 선황이지만, 우리 모두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해.”

    “…….”

    “내가 루시우스에게 내 가족을 빼앗겼지만 루시우스의 가족을 모조리 죽여 버린 것처럼.”

    일라이저의 이야기를 하고 있군. 노아는 이카르의 말을 들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토록 미워하던 루시우스의 아들을 이제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건 누군가 억지로 등 떠민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 마음을 먹고 과거에서 나와야만 한다.

    “내 원망은 네게 쏟아져야 할 게 아니니까.”

    그 말을 끝으로 이카르는 성큼성큼 걸어가 닫힌 창문을 활짝 열었다. 열린 창문을 타고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방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오늘도 노는 것에 미쳐 버린 제 종족이 연회를 연 탓에 밖은 왁자지껄했다.

    “날 용서한단 소리야?”

    노아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이카르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말했잖아. 내가 널 미워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고, 잘못된 원망이라고.”

    “…….”

    “그렇다고 선황을 원망하기엔…….”

    “폐하가 마음에 걸리고?”

    노아의 말에 이카르는 침묵으로 대신 답했다. 여기 모인 모든 종족은 원흉의 딸인 이엘을 따르기 때문에 모든 걸 눈감고 있다. 그녀가 원흉의 딸이면서, 동시에 원흉의 또 다른 희생양이기 때문에.

    “폐하는 어릴 때부터 많은 것을 양보했어.”

    이카르는 밖으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자세로 창틀에 걸터앉았다. 그는 노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끄러운 밖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모두의 관심도. 모두의 칭찬도. 마땅히 받아야 할 교육의 질마저, 전부 오라비인 황자에게 양보했지.”

    “…….”

    “이런 얘기를 들으면 너흰 폐하께서 차별받았다는 것에만 관심을 갖겠지만, 난 달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제대로 얘기해.”

    “아르세니온.”

    “…….”

    “어떻게 죽였어?”

    다소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카르의 새카만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노아도 순간 그의 반응에 놀라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 방어 자세를 취할 뻔했다. 아마 조금 전 대화가 아니었다면 그가 제게 살기를 가졌을 거라 착각했을 것이다.

    “그걸 왜 묻지? 이제 와서.”

    “목을 잘랐어?”

    “…….”

    “아니면 불에 태웠나?”

    이카르는 이엘과 이온이 아주 어릴 때 만난 적이 있었다고 했다. 게다가 그는 선황후와 특별한 유대감이 있었으니, 그녀의 소중한 아이들에게도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겠지. 실제로 저 재규어는 그런 이유로 이엘을 처음 만났던 날부터 지금까지 따르고 있었다. 노아는 무슨 의도로 이카르가 황자의 죽음을 이야기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번엔 내가 황자를 죽인 것을 원망하려는 건가?”

    “말해. 어떻게 죽였냐고.”

    “검으로 찔렀다.”

    “…….”

    “황자의 곁엔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그는 무기를 갖고 있지도 않았으니까. 어린아이 죽이는 것쯤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어.”

    “확실히 죽였어?”

    “왜 묻는 거야, 그딴 걸.”

    “황자가 살아 있을 확률도 있나?”

    “뭔 헛소리를……!”

    발끈하며 미간을 찌푸렸던 노아가 일순 입을 다물었다.

    “황자가 살아 있을 확률은, 전혀 없는 게 확실해?”

    “…….”

    “말해. 네가 황자를 검으로 찔러 죽이고 목까지 베었다면. 황자는 살 수 없잖아.”

    아니. 가능할지도 몰라……. 노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깐 숨을 멈췄다.

    르네가 어린 황녀를 죽였다고 했지만, 그녀는 버젓이 살아 있다. 이엘의 몸속에 있던 인식표가 제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다.

    “오드 님이 있어서…….”

    “뭐?”

    “오드 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지?”

    “근위대장과 함께 황궁으로 가셨어. 근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묻는 건……,”

    “난 황자의 목을 자른 적이 없다.”

    “…….”

    “불에 태우지도 않았고.”

    그저 자신이 한 건…….

    “검으로 찔렀을 뿐이야.”

    “……숨이 멎은 건 확실해?”

    “그땐 확신했는데.”

    “…….”

    “지금은 확신이 안 서.”

    노아의 말에 이카르가 절망하듯 머리를 감쌌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적막은 노아가 먼저 깨 버렸다.

    “황자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나?”

    “…….”

    “이카르.”

    “모르겠어. 그냥 느낌이…… 느낌이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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