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맞습니다. 노아 님께서 직접 죽이셨습니다.”
이미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인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지? 알폰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솔직히 자신들에게 죽은 황자는 이엘의 쌍둥이 오빠라는 개념보다는 죽어야만 했던 선황의 아들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죽이는 게 마땅했던 존재.
“이번 수색……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이카르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무리에게 힘주어 강조하고는 먼저 저택을 향해 걸었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자신이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상하게 그 가정이 현실처럼 느껴져서…….
“아냐…….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황자가 살아 있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야. 늑대의 공작이 직접 처단했다고 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그 늑대가 직접 손에 피를 묻혔는데 어떻게 살아 있겠는가.
“…….”
걸음이 멈췄다. 다리가 마비라도 온 것처럼 덜덜 떨려 바닥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만약에…… 만약에 아르세니온 황자가 정말 살아 있다면……. 나는 그 순간부터 지켜야 할 존재가 하나 더 늘어난다. 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존재가 폐하 말고도 하나가 더 늘어나게 돼.
다른 놈들은 오직 이엘만이 중요하겠지만 그는 아니었다. 이카르에겐 이엘과 이온 모두 중요하다. 둘 다 리카르디스의 아이니까.
“살아 있으면 안 돼…….”
이카르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흠칫 놀라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살아 있어선 안 된다니……. 왜 이런 말을 했지?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주먹을 꾹 쥐었다.
리키가 쌍둥이를 어떻게 지켰는데……. 두 아이 모두 살리기 위해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 황자가 살아 있다면, 그래서 언젠가 나타난다면…… 이엘의 황위가 위험하다. 가뜩이나 탄탄하지 못한 지지층은 세게 흔들릴 테고, 내부 분열도 일어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위험성이 황자에게도 향한다는 점이었다. 지금의 동맹족은 오직 이엘만을 위해 하나가 됐다. 먹이사슬까지 파괴해 가며 만들어진 이 동맹은 그녀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맹목적인 집단이다. 이엘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불사할 것 같은 종족도 있다.
이런 와중에 그녀의 황위를 위협할지 모를 황자를 알게 된다면. 혹은 그녀의 약점이 될지 모를 황자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모두의 화살은 아르세니온을 향할 것이다.
동맹족은 이엘을 지키기 위해. 동맹이 아닌 종족은 이엘을 겁박하기 위해.
“살아 있어선 안 돼.”
제발 살아 있지 마. 제발…… 살아 있으면 안 돼. 리키……. 누님, 제발 당신의 아이를 살려 두지 마.
그 아이는 무슨 이유로든 나타니엘의 발목을 잡을 거야.
*
“젠장.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군.”
노아는 제 앞으로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차가운 입김을 내뱉었다. 늑대의 모습으로 달리고 있음에도 좀처럼 속도가 붙질 않았다. 이종족의 본능으로 방향 감각을 상실하지는 않았으나 정면으로 들이치는 눈보라를 견디는 건 아무리 우논이라 해도 역부족이었다. 결국 노아는 커다란 동굴을 발견하곤 그 안으로 몸을 숨겨야 했다.
“빌어먹을. 이런 식으로 어느 세월에 도착하지?”
푸르릉 소리를 내며 몸 위에 쌓인 눈을 털어 냈다. 노아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동굴 밖을 바라보았다. 어찌저찌 여기까지 오긴 왔는데 이카르의 영지를 코앞에 두고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뱅뱅 돌고 있었다. 이래서는 길을 잃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재규어의 영지는 과거에도 악명이 높았던 땅이었다. 가는 길이 험난하고 만만치 않아, 외부에선 쉽게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영지를 홀로 찾아가려니 아무리 노아라 해도 어려움을 맞닥뜨릴 수밖에. 모든 게 최악인 상황이었다.
“그나마 들키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몸에 자잘한 화상 자국을 남기긴 했지만 다행히 정체를 들키지 않고 도망쳤다. 아수라장이 되었던 마을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의 마을에서, 그것도 정체를 숨기고 몇 달을 살았다는 걸 제 종족이 알게 된다면 무슨 반응을 할까. 아마 앤디는 거짓말 치지 말라며 믿지도 않을 것 같고, 안드로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부터 내쉴 듯하다.
그리고 폐하는…….
생각을 덧대던 노아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 차가운 바닥에 엎드렸다. 앞발을 포개고 그 위에 제 얼굴을 올린 늑대가 그림처럼 눈이 쏟아지는 동굴 밖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엎드려 있으니 마치 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움과 피로함으로 온몸이 노곤하다.
심신이 지쳤나. 노아는 자신답지 않은 서정적인 생각이 들어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감아 버렸다. 아주 잠깐 쉬었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긴장이 풀린 탓인지 온몸에 뜨거운 열기가 감싸는 게 느껴졌다.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인데. 그 생각을 끝으로 그는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아?!”
“……하! 각하!!”
“……실해?! 알폰스!”
“예!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럼 어서 각자 자리에 서서 눈을 치워!”
“예, 폐하!”
폐하……? 잠결에 들은 그리운 호칭에 노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곤 직감적으로 제게 닥친 상황을 느낀 건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주변이 온통 캄캄했다. 분명 잠들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동굴 입구가 커다랗게 뚫려 있었는데, 지금은 입구 따윈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빛 한 점 느껴지지 않았다.
“막혔나? 아, 목이…….”
목이 완전히 잠겼다. 노아는 엉망진창인 제 상태가 황당해 실소했다. 깨닫고 보니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있는 게 완연히 느껴진다. 잠들기 전에 걱정했던 대로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노아는 인간처럼 한없이 약해진 제 몸 상태에 어이가 없어져 헛웃음을 터뜨렸다.
“……니다! 폐하, 다치십니다!”
“……하겠나? 그렇게 해서 되겠어? 내가…….”
꿈이 아니었나? 코를 킁킁거리며 조금이라도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곳을 찾던 노아가 귀를 쫑긋 세웠다.
“……둘, 셋!”
그때였다. 쾅! 소리와 함께 동굴 안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밖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대화 소리에 집중할 때가 아니다. 노아는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대기했다.
쾅! 다시 한 번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동굴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파스스 소리를 내며 동굴 입구를 막았던 눈들이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노아는 눈이 사라지며 만든 작은 틈으로 빛을 보았다.
“노아?!”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정신이 아득해지는 노아를 붙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쾅! 소리와 함께 동굴이 흔들렸다. 귀에 이명처럼 듣기 싫은 소음이 아주 잠깐 들렸다.
“노아!”
“…….”
“노아, 안 돼. 정신 차려! 눈 떠!”
“폐하. 한 번 더 할까요?”
“안 돼. 그랬다가는 동굴이 무너질지도 몰라. 근위대! 각자 자리에 서라.”
나타니엘? 노아는 흐릿한 시야 사이로 그녀의 모습을 발견했다. 카랑카랑 울리는 저 고음은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의 것이 틀림없다.
“2인이 1조가 되어 눈을 뭉쳐서 이동시켜. 한 사람은 눈덩이를 띄우고 다른 한 사람은 재빨리 눈을 뭉쳐서 옆으로 이동시키는 식으로 시간을 줄여라.”
“예, 폐하.”
“노아. 정신 차려! 금방 구해 줄게!”
엘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분명 꿈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했는데도, 노아는 지금의 모든 상황이 꿈만 같아서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몇 달 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가 제 가슴을 파고들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환청이라도 듣고 있는 건가?
“하나, 둘, 셋!”
그녀의 구령에 맞춰 하이에나들이 움직이는 듯했다. 입구를 막고 있던 커다란 눈덩이들이 조각나듯 곳곳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노아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짐작하지 못한 채였다.
“폐하. 공작이 파묻힌 동굴의 깊이가 너무 깊습니다! 주변을 폭발시켜서 파헤치는 건 어떠십니까?!”
“그랬다가는 무너져! 입구를 막은 눈만 치우면 노아가 나올 수 있을 거야. 노아! 내 말이 들려?”
노아는 뜨거운 몸을 일으켜 미세한 틈이 보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아!”
“폐하?”
“노아! 정신이 들어?!”
“예. 저는 괜찮습니다.”
“맙소사. 목소리가 왜 그래? 상태가 안 좋잖아. 많이 아픈 거야?”
“괜찮습니다. 살짝 열 기운이 있을 뿐입니다.”
“움직일 수 있겠어?”
“예, 폐하.”
사실 움직일 힘이 전혀 없었지만, 이엘이 저를 걱정하는 듯해서. 노아는 괜찮다며 공간이 생기면 곧장 나가겠다고 대답했다.
“시간이 없어! 언제 다시 눈이 내릴지 모르니, 그 전에 노아를 구출해야 돼.”
대충 상황을 들어 보니 눈이 너무 많이 온 탓에 동굴 전체가 파묻힌 모양이었다. 노아가 처음 발견했을 때도 높이가 낮고 작은 동굴이었는데, 밤새 쏟아진 눈으로 완전히 파묻힌 듯했다.
아니. ‘밤새’가 아니라 ‘며칠’이 지났을지도 모르지. 노아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아챘다. 아마 긴장이 풀려, 그동안 미루었던 잠이 쏟아진 걸지도 모른다. 며칠이나 이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눈이 입구를 막을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한 스스로를 탓했다.
“폐하! 눈을 치운 자리에 또 다른 눈이 쏟아져서 동굴 입구를 메우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을 거예요!”
“알겠어. 노아! 내 말이 들려?”
“예, 폐하. 듣고 있습니다.”
“안쪽도 눈으로 막혀 있지?”
“예.”
“흔들리지 않는 선에서 그 눈을 파헤치고 미세하게 보이는 틈이 있는 곳까지 올 수 있겠나?”
“해 보겠습니다.”
노아는 뒤로 물러났다가 빠른 속도로 내달려 딱딱하게 굳은 눈을 밟고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미세한 틈으로 몰아치는 차가운 바람을 코끝으로 느끼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잘했어, 노아. 이제 조금씩 구멍을 넓혀 볼게. 타이밍에 맞춰 몸을 내밀어.”
“알겠습니다.”
바깥 공기를 마시니 어지럽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정리됐다. 노아는 아직도 제 몸을 짓누르고 있는 열기를 간신히 참아 내며 어떻게든 작은 틈새로 몸을 내밀려고 노력했다.
밖에서 하이에나들이 능력으로 눈을 공중에 띄우거나 치우면, 늑대들이 그 주변을 발로 열심히 파헤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합이 맞지 않아 계속해서 실패했다. 틈이 벌어질수록 동굴 안으로 들이치는 눈의 양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