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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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회의에 갈 줄 알았는데. 그대가 보여서 놀랐네, 유클리드 백.”
“불참 의사를 적어 제도로 보낸 전서는 아마 오늘쯤 당도할 것 같군요. 참석하지 않아 받는 불이익은 감당할 생각입니다.”
이카르는 뻔뻔하게 제 영지에 들이닥친 유클리드를 황당하게 쳐다봤다. 제도에서 귀족회의가 열리는데도 그곳엔 불참하고 이곳으로 올 줄이야. 그러나 이엘은 마치 그가 올 거라고 예상한 것처럼 태연하게 유클리드를 맞았다.
“아무튼 어서 오게. 백작의 영지에서 본 이후로 거의 반년이 지났군.”
“예, 폐하. 오랜만에 뵙게 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이렇게 낯선 곳에서 만나 뵙는 폐하는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보다 더욱 아름답고 멋지시군요.”
“오느라 수고했어.”
“애정을 담은 키스를.”
이엘이 내민 손등 위에 입술을 맞췄다가 떨어진 유클리드가 특유의 그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행동에 이카르의 뒤에 있던 재규어들이 일제히 표정을 찌푸렸다. 갑작스레 저희 영지에 스라소니를 맞이하게 된 것이 못마땅한 건지, 얼굴에 대놓고 ‘역겨움’이란 글자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카르 역시 제 종족을 말리기는커녕 누구보다 유클리드를 짜증스럽게 쳐다보았다.
저 새끼가 그 새끼지? 이카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유클리드를 위아래로 훑었다.
몇 년 전에 이엘과 함께 하이에나의 영지에 머물다가, 패티스의 도움으로 어렵게 찾아낸 동족들을 만나기 위해 그녀의 곁을 잠깐 비웠던 때가 있었다. 그때 겁도 없이 하이에나의 영지로 쳐들어와 다짜고짜 이엘과 하트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던 놈이 저놈이랬지? 이카르는 유클리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반면 유클리드는 제게 쏟아지는 따가운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이엘과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뒤, 이카르를 향해 비웃음을 담은 말을 붙였다.
“영주께서 몹시 화가 나신 듯한데. 며칠 좀 묵겠습니다, 영주님? 괜찮겠지요?”
만면에 웃음을 드리운 유클리드는 이카르를 아주 귀여운 새끼 보듯 쳐다보며 여유롭게 그의 허락을 구했다. 쯧쯧. 어리긴.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고 자랐다더니, 하는 꼴이 참 어리기 그지없다.
유클리드는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놈이 영주라면 그 종족은 알아볼 것도 없다. 전부 하나같이 형편없겠지.
“유클리드 백.”
순간적으로 서릿발 같은 이엘의 목소리에 유클리드가 정신을 퍼뜩 차렸다.
“예, 폐하. 말씀하십시오.”
“감히 짐의 앞에서 짐의 사람에게 빈정거리는 것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오해십니다.”
“그대는 정식으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네. 헌데 영주인 이카르 백의 앞에서 무슨 낯으로 그리 말하는 것이지?”
“…….”
“경망스러운 언동은 삼가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유클리드가 마른침을 삼키며 이엘을 향해 살짝 묵례했다. 이런. 내가 또 무례하게 굴었군. 그녀는 이런 데에 있어 가차 없는 편이니 조심해야겠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유클리드는 이엘의 옆에 서 있는 이카르를 향해 웃으며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이카르 백작. 이렇게 직접 만나 인사를 나누는 것은 처음인 듯하오. 부득이하게 정식으로 방문 요청서도 보내지 못한 상태로 찾아와 실례하게 되었소. 괜찮다면 며칠만 신세를 져도 좋을지 부탁하고 싶소.”
이것 봐라? 진짜 폐하 앞에선 바짝 엎드리네? 이카르는 슬금슬금 치솟으려는 비웃음을 겨우 숨기고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이엘은 이카르를 향해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유클리드의 인사를 받지 않고 뭘 하느냐는 눈짓을.
사실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다. 지금은 제 편을 들어 주었지만 자신이 계속해서 비뚤게 나가면, 끝내 자신마저 혼낼 사람이다. 이카르는 이엘의 곁에서 짧지만 깊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이런 쪽으로 눈치가 빨랐다.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며칠 정도는 묵게 해 드릴 수 있소.”
제법 의젓하게 대답하는 이카르의 모습에 가장 크게 놀란 건 재규어들이었다. 와, 대장의 저런 모습 정말 낯설다……. 재규어들은 저희끼리 숙덕거리며 이카르와 유클리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마침 유클리드 백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네. 이카르 백이 허락해 준다면 이곳에 함께 머물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이카르 백.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폐하. 유클리드 백작이 머물 곳을 안내하겠습니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또한 무례를 용납해 준 백작에게도 감사를 표하오.”
“발트. 빈 숙소를 백작에게 안내해 주도록.”
“예, 대장.”
그녀에게 한 번 크게 혼난 뒤로 유클리드는 무례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겸손한 태도로 안내를 받기 위해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소문이랑은 좀 다르네요.”
스라소니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이카르는 퉁명스런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엘은 그의 등을 살짝 쳐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스라소니를 오래 이끈 자가 아니니까. 이카르. 그대도 조심해. 겉만 보고 만만하게 생각해선 안 돼.”
스라소니는 1제국 때부터 굉장히 까다로운 종족이었는데, 그런 종족을 아주 오랜 시간 이끌고 있는 게 유클리드였다. 겉으로 보이는 외모는 레온보다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지만 실제로 살아온 시간은 누구보다 길었다. 그 긴 시간을 종족의 수장으로 지내며 전쟁광 소리를 들어 온 자이기도 했다.
“수틀리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불편하겠지만 당분간 그대의 종족에게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당부해 줘.”
“알겠습니다.”
“간단한 대화만 마치고 금방 돌려보낼게.”
“저놈이 올 줄 알고 계셨습니까?”
“응. 내가 동맹 종족의 영지에 머물 때 찾아올 거라고 예상했었어. 여기가 아니라면 다음은 하이에나의 영지로 찾아오겠거니 하고.”
다만 예상치 못했던 건 노아의 부재다. 이엘은 유클리드의 방문보다 노아의 귀환이 더 빠를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여전히 소식이 끊긴 늑대 생각에 이엘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폐하. 저놈을 정말 믿어도 되는 겁니까?”
“적어도 로빈보다는 낫지 않겠어?”
“글쎄요.”
솔직히 이카르의 눈엔 유클리드나 로빈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둘 다 믿을 만한 자들이 못 된다. 하지만 이엘이 이미 마음을 먹었고, 그녀의 반지마저 유클리드에게 주었다고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반대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 이카르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뭐, 도움은 되겠네요. 스라소니의 병력은 제법 쓸모 있으니까요.”
“쓸모 있는 정도가 아니지. 실제 전력으로 쓰기엔 그만한 종족도 없을 거야.”
“저희도 그 정도는 합니다.”
어쩐지 삐친 듯한 이카르의 말투에 이엘이 웃음을 꾹 눌러 삼키곤 열심히 동의해 주었다.
“그럼, 당연하지. 내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종족이 재규어니까.”
“…….”
“자유롭고 정의로운 종족 중에 하나잖아. 안 그래?”
“그런 면에선 확실히 늑대보다도 낫죠.”
“암, 그렇고말고.”
이어진 이엘의 칭찬에 이카르는 어깨가 한껏 위로 올라갔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이엘이 웃었고 그녀의 뒤에 있던 독수리와 하이에나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걸 보면 어리긴 하다니까, 라는 생각을 공유하며.
한편 늑대의 이야기가 나온 이후로 이엘의 표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아마 노아가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져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수심에 이카르도 미간을 찌푸렸다.
이카르는 여전히 노아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놈의 친구였던 루시우스 러셀이 제 종족을 잔인하게 학살했고, 노아는 알면서도 눈감아 주었으니까. 그래서 한편으론 그가 이엘에게 영영 돌아오지 않기를 내심 바라기도 했다.
“늑대 공작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응. 유클리드보다 빨리 돌아올 줄 알았어.”
“귀환이 늦어지고 있군요.”
그러게……. 이카르의 말에 이엘이 작게 대답하며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을 떠날 때까지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오드를 보내서라도 노아를 찾아낼 생각이었다. 노아의 생사가 염려되는 건 아니었지만 소식 한 통 못 보낼 정도로 큰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싶어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 이엘의 마음을 알면서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카르는 저가 먼저 제안했다.
“애들을 풀어서 소식을 알아 올까요? 누굴 찾는 데에 저희 능력만큼 쓸 만한 것도 없으니까.”
재규어는 몸을 작게 줄이거나 크게 키울 수 있기 때문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게다가 재규어의 개체수가 어느 정도인지도 외부로 알려지지 않아 다른 종족의 추적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그 말에 이엘이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할게. 알폰스 경과 함께 논의해서 노아 공이 어디에 있을지 수색해 줘.”
“알겠습니다.”
역시 폐하껜 그 늑대 놈이 필요한 모양이네. 이카르는 누군가를 찾기 바쁜 이엘의 모습을 씁쓸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쳐다봤다.
“알폰스 경. 잠깐 이리 오게.”
뒤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던 커다란 늑대가 순식간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녀와 이카르의 앞에 섰다.
“예, 폐하. 부르셨습니까.”
“공작을 찾아야겠어.”
“수색대를 꾸릴까요?”
그간 말은 못 해도 알폰스도 제 주인의 생사가 염려됐던 건지 그녀의 말에 눈에 띄게 낯이 좋아졌다. 이엘은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규어와 함께 다녀와. 재규어는 외부로 전력 노출이 적고, 능력은 수색용으로 적합하니 같이 움직이면 금세 찾을 수 있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렇게 몰려든 재규어들과 알폰스는 노아를 찾기 위한 수색대를 꾸리기 시작했고 이엘은 산책을 좀 더 하고 돌아가겠다며 먼저 돌아섰다. 이카르 역시 무리와 함께 제 저택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러다가 순간 멈칫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이틀 전에 마주했던 하트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폐하.”
“응?”
제 부름에 그녀가 고개만 뒤로 쏙 돌려 쳐다봤다. 이렇게 있으니 그녀의 얼굴 위에 아주 어렸던 황자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무슨 일이야? 불러 놓고 아무 말도 없다니.”
“무례하고 불쾌한 질문인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줄곧 여쭤보고 싶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뭔데?”
“혹시 폐하께선 황자님의 마지막을 지켜보셨습니까?”
“…….”
제 질문에 그녀가 침묵했다. 뜬금없이 황자의 마지막을 묻는 게 퍽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였다. 이카르는 마른침을 삼키며 이엘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궁금하여 여쭈었습니다.”
“…….”
“제가 처음 폐하를 뵈었을 때, 저는 폐하께서 황자님인 줄 알았으니까요.”
“봤어.”
“…….”
“묻어 주진 못했지만 차갑게 식은 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고, 내 손으로 오빠의 눈을 가려 주었다.”
그렇군요……. 이카르는 그녀의 안색이 나빠진 걸 곧장 알아채고 웃으며 상황을 무마했다. 별일 아니었다는 듯, 다소 과장스러운 말투로 손까지 내저으며.
“그저께 폐하와 나누었던 이야기 때문인지, 갑자기 황자님이 생각나서요.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오빠를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건 내게 기쁜 일이야.”
“…….”
“잊지 말아 줘.”
“…….”
“아르세니온이라는 아이가, 살아 있었음을.”
그대만은 기억해 주길 바라. 이엘은 담담하게 그 말을 남겨 두고 빠른 걸음으로 이카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갑자기 죽은 황자 이야기는 왜 꺼내신 겁니까?”
그의 옆에 있던 알폰스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이카르를 향해 물었다. 이카르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가 사라진 방향만 응시하다가 뻑뻑한 목을 돌려 천천히 알폰스를 쳐다봤다.
“알폰스 경.”
“예.”
“황자를 죽인 게 각하가 맞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