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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41화 (341/488)
  • 341화

    *

    “젠장.”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 낸 노아는 욕을 짓씹으며 커다란 나무 뒤에 제 몸을 숨겼다. 그의 얼굴은 흐르는 땀과 거뭇한 재로 엉망진창이었다.

    “확실해? 방화범이 이곳으로 도망쳤다고?!”

    “내가 봤다니까?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놈이었어!”

    “젠장. 하필 사제님께서 안 계실 때 이런 소동이 일어나다니.”

    “근데 녹색 탑은 괜찮은 거야?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어서 피해는 없는 것 같았는데…… 설마 도망친 건 아니겠지?”

    “어, 좀 전에 확인해 보고 내려오는 길이야. 저번처럼 탈출했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얌전히 있더라고.”

    제 뒤를 쫓아온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노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젠장……. 역시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군. 노아는 혀를 차며 손바닥으로 제 눈가를 덮었다. 차라리 기다리라는 말을 하질 말았어야 했나…….

    처음부터 실패할 것을 염두에 두고 세웠던 계획이었다. 노아는 이 이상한 마을을 떠날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때마침 사제 아스타로가 마을을 비운 틈을 타 광장에 불을 지르고 혼란을 야기했던 것이다. 마을에 혼선을 줘야 리노 윌터를 데리고 도망칠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이 홀로 떠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리노 윌터까지 데리고 이 마을을 빠져나가는 건 실패할 확률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 리노는 놔두고 자신만 떠나는 게 맞는 일이다. 원래 자신의 성격대로라면 앞뒤 재지 않고 성공 가능성이 높은 것을 택했을 텐데…….

    그냥 놈을 이곳에 놔두고 떠나려니 이상하게 마음이 복잡했다. 여기 오기 전엔 일면식도 없는 놈이었는데. 괜한 짓을 벌이느라 시간까지 지체됐다. 노아는 초조한 듯한 표정으로 저 멀리 보이는 녹색 탑의 꼭대기를 쳐다봤다.

    마을에 연기가 피어오르면 데리러 올 테니 정신을 놓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을 리노에게 전했다. 포필렌 약을 끊은 지 꽤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볍게 말했던 것도 없잖아 있었는데…….

    “사제님은 언제쯤 돌아오시는데?!”

    “작은 신님을 뵈러 가셨어. 돌아오시려면 며칠 걸릴 텐데, 그 전에 우리끼리라도 수습을 해야 돼.”

    “그럼 난 그 후드 쓴 놈을 찾아볼게.”

    “알겠어. 그럼 난 사람을 좀 모아 볼게.”

    두 사람은 그렇게 작전을 짜고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몸을 숨기고 있던 노아가 풀숲을 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저 너머 불에 타 엉망이 된 마을이 보였다. 아마 지금쯤 화재 진화를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 얘기는 마을 밖을 지키는 경비가 소홀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마을은 유입하는 사람은 있어도 밖으로 빠져나가는 사람은 없었는데, 그게 다 마을 경계선에 숨어서 지키고 있는 올리세스의 사병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필 사제가 자리를 비우고 떠난 틈에 벌어진 방화로 놈들도 어지간히 당황했겠지. 아마 허둥지둥 이곳으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설령 여전히 밖에서 대기 중이라고 해도 노아는 늑대로 변해 빠져나가면 되므로 크게 상관은 없었다.

    불을 지른 건 전적으로 리노 윌터 때문이었지만…… 역시 실패했다. 다시 탑으로 돌아가 놈을 데리고 나올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 데다가, 놈을 태우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건 더 큰 위험을 동반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포기해야겠군.”

    그는 저 멀리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탑을 잠깐 바라보았다가 재빨리 늑대의 모습으로 변했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희박했다. 놈은 병색이 완연했고 저렇게 폐쇄적인 곳에 계속 갇혀 있다가는 금방 시들어 버리고 말 테니.

    노아는 아주 잠깐 리노를 걱정했다가, 머리를 흔들며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쓸데없이 정에 휘둘리는 건 이제 그만두기로 했으니까.

    게다가 이런 기회는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 아마 귀족회의가 열리는 탓에 놈들이 ‘작은 신’으로 취급하는 올리세스 윌터가 자리를 비웠겠지. 그 건으로 사제도 마을을 잠깐 떠난 거고.

    머릿속에서 리노를 지워 버렸다. 재규어의 영지에서 폐하를 만나려면 한시가 급하다. 늑대는 발소리를 잔뜩 죽인 채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

    황궁에 모인 귀족들은 상석에 앉은 패티스를 탐탁지 않게 지켜보고 있었다. 원래 귀족회의는 1제국 때부터 해 왔던 회의이며, 현 제국이 건국되기 전의 냉전 상태에서도 줄곧 이어져 왔다. 다만 그때는 하이에나가 참석할 수 없었고, 또 참석했어도 그 입지가 상당히 좁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황제의 부재를 대신하여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도할 만큼 상당한 권력을 갖게 됐다. 그 모습이 다른 종족들에게 달가울 리 없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선 인간도 이종족과 같은 마음이었고.

    “어서 오십시오. 부득이하게 폐하께서 시찰 중이시라 제가 회의를 이끌게 된 점, 양해 바랍니다.”

    “폐하께서 안 계시면 회의를 미뤄도 됐을 텐데.”

    구귀족 중 하나가 툴툴거리자 그걸 신호로 여기저기서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패티스는 웃는 낯을 고수하며 태연하게 나무망치로 테이블을 쿵쿵 내려쳤다. 마치 이런 상황이 닥칠 줄 예견한 듯이.

    “미뤄야 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

    “폐하께서 근위대장을 통해 직접 안건을 보내 주신 것이 있으니 그것부터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큼큼.”

    “되셨으면 착석하세요, 다들. 전 기다리는 걸 제일 싫어하니까요.”

    상대를 잘못 골랐군. 하트는 패티스를 만만하게 여긴 인간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맞은편에 앉아 불안한 듯 눈치를 보는 코르넬 포르 자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름은 코르넬 포르. 제 2기사단장인 일라이저와 제 3기사단장인 라니에로의 오랜 친구야. 내가 황제가 되기 전에 잠깐 머물렀던 인간 마을에서 알게 된 사이고.’

    제도로 떠나기 전, 이엘은 하트를 불러 은밀히 지시했다. 코르넬 포르와 접선해 그의 친척이었다던 연구원에 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내라고.

    코르넬은 친구인 일라이저나 라니에로와는 달리 겁이 많고 소심한 성격이었다. 두뇌가 상당히 명석한 편이고 신중한 성격 탓에, 이엘은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려 했지만 코르넬은 한사코 그 자리를 거절했다. 원래 주려 했던 백작 위도 거듭 거절했기에 별수 없이 자작 위를 내렸지만, 그녀는 후에 다시 한 번 그를 등용할 생각이었다.

    그만큼 이엘은 코르넬의 비상한 머리를 신뢰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집안 내력이었나 보군. 코르넬의 친척 중에 연구원이 있을 줄이야. 아무튼 코르넬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전부 알아내.’

    ‘알겠습니다.’

    ‘그는 겁이 많고 경계가 심한 편이라 아마 경이 홀로 접근하면 도망칠지도 몰라. 이번 귀족회의도 패티스가 반강제로 끌고 왔으니까.’

    코르넬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이엘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황궁에 있을 때 몇 번이나 귀족회의에 참석하라는 전서를 보냈지만, 매번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들어 참석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어린놈이 건방지게 군다는 귀족들도 더러 있었는데, 어쨌든 이엘은 코르넬의 유약한 성정을 잘 아는 터라 그간 참석하지 않아도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하지만 패티스는 다르다. 렉토스에게서 코르넬 포르가 언급된 이후로 그는 포르 자작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노아가 올리세스의 영지에서 소식이 끊겨 코르넬을 만나지 못한 뒤로는 이 귀족회의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포르 자작을 이렇게 회의에서 보는 건 처음인 듯하오.”

    패티스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코르넬에게 알은체를 하자, 코르넬이 흠칫 놀라더니 잔을 들고 있던 손을 달달 떨기 시작했다. 제게 시선이 집중되는 게 불편하고 괴로운 모양이었다.

    “포르 자작은 원래 몸이 약하기 때문에, 그간 폐하께서도 이해하셨소.”

    코르넬의 근처에 앉았던 일라이저가 제 친구를 변호하듯 나섰다. 그의 목소리에 코르넬만 주시하던 하트의 시선이 돌아갔다.

    독수리의 영지에서 본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엘의 곁을 절대 떠나지 않을 것처럼 굴던 일라이저는, 갑작스럽게 마음을 바꿔 제 영지에서 몇 달 쉬었다가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물론 이엘은 흔쾌히 그에게 휴가를 주었다.

    “아아. 러셀 후작님. 오해하진 마십시오. 그저 반가움의 인사였습니다.”

    패티스가 미려한 웃음으로 어색해진 상황을 무마했다.

    ‘일라이저에게 미리 말해 둘게. 그는 코르넬의 오랜 친구이니, 그와 함께 대화를 요청하면 코르넬도 마냥 피하지는 않을 거야.’

    이엘은 하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코르넬이 피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트에게 일라이저를 붙여 주려 했던 것이지만……. 사실 문제는 코르넬이 아니라 다른 쪽이었다.

    하트가 이곳 제도에 도착한 이후로 일라이저는 계속해서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눈을 마주치길 싫어했다. 코르넬이 문제가 아니라 러셀 후작이 문제겠군. 그렇게 생각한 하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일인 거지? 이엘이 아무렇지 않게 일라이저를 언급하던 것을 보면 자신의 염려처럼 일라이저가 고백을 한 건 아닌 듯했고……. 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제 영지로 꽁지가 빠져라 도망친 건가? 생각보다 소극적이고 한심하군.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현명하고 도움되는 방법이긴 했다. 괜히 쓸데없이 그녀에게 제 감정을 쏟아 내어 난감한 상황을 만드는 것보다는 저쪽에서 알아서 숨어 주면 고맙지.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패티스가 나무망치를 두드리면서 소란스럽던 장내가 조용해지더니 하나둘 착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트는 고요한 눈동자로 일라이저와 코르넬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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