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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40화 (340/488)

340화

“전에 말했던 궁정 화가. 러셀 후작의 영지에 머무르고 있는, 올리세스의 세작 노릇을 하던 자.”

이엘은 르네가 조언해 주었던 대로 그 궁정 화가를 통해 꿈에 나오던 소녀들을 그려 볼 생각이었다. 그림을 보고 누군가 그들을 아는 사람들이 나온다면 단서도 될 테고. 어쨌든 올리세스의 눈을 피해 궁정 화가 루벤을 데려오려면 오드도 하트와 함께 다녀와야만 했다.

“그래서 하트 경의 부재 기간 동안 그대가 르네 공과 함께 내 호위를 맡아 줘.”

“물론입니다, 폐하. 제게 맡기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는 이카르를 쳐다보며 이엘이 빙긋 웃었다. 그러곤 고개만 뒤로 돌려 어딘지 모를 곳에서 따라오고 있는 하트를 향해 소리쳤다.

“근위대장은 먼저 내 침실로 가서 취침 준비를 해 주게.”

“예, 폐하.”

텅 빈 복도에서 들려온 하트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그는 움직이는 소리도 없이 이엘의 침실로 먼저 향한 모양이었다.

“그럼 우리도 다시 걸을까?”

“예.”

근위대장은 왜 갑자기 보내신 거지? 둘만 남겨진 복도를 걸으며 이카르가 미간을 좁혔을 무렵이었다. 이엘이 그에게만 들릴 듯이 조용히 운을 뗐다.

“스완이 용에게서 물어봤대.”

“아…….”

선황후 리카르디스에 관한 이야기다. 이카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멈췄다.

“그녀가 내게 보여 준 꿈은 아니라고 하더라고.”

“그럼…….”

“응. 그냥 아무 의미 없는 꿈이었던 모양이야.”

“아……. 다행……입니다.”

이카르는 크게 안도했다. 여태 조마조마하며 불안했던 마음이 모조리 사라졌다. 리카르디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살해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이카르의 숨통을 조이며 며칠이나 괴롭혀 왔던 것이다.

이엘은 안도하는 듯한 이카르를 보며 엷게 웃었다. 그녀는 딱 거기까지만 이야기했다. 스완이 덧붙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꿈이 내가 만든 이상향이거나 내 잃어버린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잃어버린 기억이라면, 언젠가 기억을 다 찾게 되면 자연히 떠오르겠지. 선황에게 목이 졸린 대상이 누구인지. 도망치던 아이는 누구인지. 내 추측이 정말 맞을지.

그러니 리카르디스, 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이카르에게 더는 꺼내지 않을 생각이다.

“이카르.”

“예?”

“그럼 그대는 나와 내 쌍둥이 오빠를 어릴 때 본 적이 있어?”

“그럼요. 봤었죠.”

조금 전보다 기분이 나아진 건지 평소의 이카르로 돌아왔다. 줄곧 뒤처지듯 무겁게 걷다가, 이번엔 그녀를 이끌 듯 조금 앞에서 걷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행복한 기억을 뒤적거리듯 한참 생각했다.

“되게…… 되게 작았어요. 인간의 아이는 처음 봤거든요. 너무 작아서 쳐다보는 것도 불안불안했었죠.”

“어릴 때도 나랑 오빠가 많이 닮았었나?”

“예. 막 태어나셨을 땐 진짜 누가 황녀고, 누가 황자인지 전혀 못 알아봤다니까요.”

“후후. 맞아, 어릴 때 유모가 많이 헷갈려 했었지.”

“하지만 리키, 그러니까 선황후 폐하께서는 단번에 구별하시더군요. 그게 어머니인가 봐요.”

“그랬구나.”

“예전에도 리키는 어른스러웠는데, 아이를 낳고 나니까 정말 부모가 된 것 같았어요.”

이카르는 아직도 ‘선황후’라는 단어가 입에 붙지 않은 건지, 이따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때의 행복했던 기억을 회상했다.

“어머니에게 탈출을 제안했다고 했지? 그런데 아이가 생겨서 거절했다고.”

“예, 맞습니다. 아이들을 지켜야 해서 같이 갈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럼 백작은 나와 내 쌍둥이를 미워했겠구나.”

“아니라곤 말 못 하겠네요.”

“솔직하네.”

“하지만 저도 품에 안긴 아기들을 보는 순간, 그녀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꼬물거리는 그 작은 손가락. 뻐끔거리는 입 모양. 마치 보석을 잘 세공해 집어넣은 듯한 초롱초롱한 녹색 눈동자. 이카르는 리카르디스의 아이들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마음을 단숨에 빼앗겨 버렸다.

“신기하네요. 그때 그 아이가 이렇게 자랐다니.”

“그렇게 말하니 마치 백작이 내 부모라도 된 것처럼 느껴지는구나.”

“한때는 그렇게 되고 싶었죠. 폐하가 황자가 아닌 황녀였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부터는 정말로, 제 모든 걸 걸고 당신을 지켜 드리고 싶었어요.”

리카르디스는 제 가족이었고, 이엘은 그녀의 가족이다. 그것만으로 이카르는 이엘을 제 자식 품듯 감싸고돌 이유가 충분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건강하게 자라셔서 다행이네요. 어릴 땐 너무 자주 아파서 리키가 마음고생을 했거든요.”

“내가 어릴 때부터 이렇게 자주 앓았나?”

“네. 리키의 몸속에서부터 그랬죠. 당시 황궁의와 연구원들은 선황후 폐하가 아이를 잃을지 모른다는 말을 했으니까요.”

“아이를 잃어? 그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어?”

“예. 출산해도 쌍둥이 중 하나는 죽을 거라고 했거든요. 그 얘기를 듣고 리키가 많이 속상했다고 했어요.”

아마 그녀가 아이들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된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똑같이 열 달을 배 아파 낳았는데, 그중 하나가 죽을지 모른다는 소리가 얼마나 선득하게 들렸겠는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은, 선황이 어떻게든 아이들을 살려 내라고 황궁의와 연구소에 압박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둘 중 그 누구도 죽어서는 안 된다면서요.”

“선황이?”

“그래서 리키는 선황이 어렵게 얻은 자식들을 끔찍이 아끼는 모양이라고, 그때는 조금 웃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황궁에 남았다. 적어도 선황이 제 자식들만큼은 아끼는 것이라고, 리카르디스는 믿었던 것이다.

이엘은 이카르의 말을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태어나기 전에는 그토록 아꼈으면서, 막상 태어나고 나니 나와 이온을 학대했다고? 기억이 돌아오기 전엔, 선황이 자신만을 학대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지만 몇 달 전, 스완의 능력과 용의 능력이 충돌했던 자리에서 이엘은 잃어버렸던 기억 중 하나를 떠올리게 됐다. 화가 난 선황이 이온을 피아노 위로 집어 던지는 모습을. 그는 자신뿐 아니라 이온도 똑같이 학대해 왔던 것이다.

“혹시 그때의 일 중 기억나는 것들은 더 없어?”

“뭔가 찾으시는 게 있습니까?”

“아니. 그냥 궁금해서. 어머니와 내 어린 시절에 관해 물어볼 곳이 별로 없으니까.”

“달리 없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게 다예요. 저 역시 리키가 황후가 된 뒤로는 만나기 어려워졌으니까요.”

이카르는 고민에 잠긴 듯한 이엘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딱 한 가지. 말해 줄 수 없는 게 하나 있다. 이제는 말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지만, 그래도 리카르디스가 죽을 때까지 감추려 했던 비밀이었기에 이카르 역시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진실이.

그건 당사자인 이엘에게도 말해 줄 수 없는 진실이었다.

“내가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고 그랬지?”

“예, 폐하.”

“죽을 고비도 자주 왔나?”

“그렇죠. 어릴 땐 몸이 더 약하셨으니까, 같은 강도로 아파도 어린아이는 견디기 힘들죠. 그래서 원래는 다른 가문으로 입적하려고 했었는데 불발됐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 얘기는 유모에게서 언뜻 들은 것 같아.”

흔한 얘기다. 승계권을 다투는 남매 사이에서, 여자아이를 일찍 혼인시키거나 다른 가문으로 입적시키는 얘기는. 이엘도 어렴풋하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이엘과 이온이 쌍둥이로 태어난 탓에 혹시 모를 승계 다툼이 생길까 걱정한 모양이지.

“당시 리키의 가문, 그러니까 론 후작가의 방계 중 하나가 폐하를 입양해 가문을 이어 가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고, 리키 역시 그러는 편이 황녀에게 좋을 거라 판단하여 그러겠노라 답서를 보냈죠. 물론 선황이 단칼에 잘라 내 버렸지만.”

이엘은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못마땅한 딸이었다면 차라리 다른 가문으로 보내 버렸으면 될 일인데……. 아니. 그렇게 되면 그녀의 혼인으로 얻을 이익을 빼앗기게 될 테니, 그걸 막기 위해 거절한 것이리라.

“표면적 이유는 황녀의 몸이 병약한 탓이라고 했지만, 제가 보기엔 그런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나를 팔아 치워 이온의 황위를 단단하게 하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있지만, 뭔가 좀 이상했어요. 그때의 황제는 어딘지 모르게 다급해 보이고 초조해 보였다고 해야 하나.”

“그자는 원래 인성이 포악하고 괴랄스럽다. 그때만이 아니야.”

“그건 그렇긴 한데……. 아닙니다. 제가 너무 앞서갔나 봅니다.”

그사이 두 사람은 이엘의 침실 앞에 도착했다. 때마침 침실 정리를 마치고 나오던 하트가 그녀를 발견하곤 살짝 묵례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아무튼 오늘 고생했네. 그만 돌아가 쉬도록 하게, 이카르 백.”

“예, 폐하. 쉬십시오.”

“하트 경. 경도 오늘은 좀 쉬어. 안에서 책을 좀 보다 잘 생각이거든. 문제가 생기면 경을 부르겠네.”

“그럼 이 층을 한번 확인한 후에 문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그래.”

이엘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곤 먼저 문을 닫고 침실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카르는 그녀가 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곤 뒤돌아 제 침실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백작님.”

그러나 하트가 조용히 그를 불러 세웠다.

“근위대장? 내게 볼일 있소?”

하이에나와 재규어는 조금 애매한 관계에 있었다. 자신이 혈혈단신일 때 이엘과 함께 그들의 영지에서 머무르기도 했고, 뿔뿔이 흩어진 제 종족을 찾은 것에 도움을 줬던 것도 하이에나였다.

그러나 우호적인 관계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이카르는 이엘에게 집착하는 세쌍둥이들을 썩 좋아하지 않는 터라,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애매한 관계로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트가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말을 건넨 건 처음이었다. 패티스면 몰라도 말수가 적은 근위대장과는 말 한마디 섞어 본 기억이 없었으니까.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근위대장이 날 부른 건 처음인 듯한데.”

“백작님은 폐하께서 어릴 때부터 알고 계신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오늘따라 옛날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이카르는 무심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폐하의 동기, 쌍둥이 오빠라던 사람도 알고 계십니까?”

“죽은 사람 이야기는 왜 꺼내는 것이오?”

“그 사람이 정말 죽었습니까?”

“그걸 나한테 물어봤자 내가 알 도리가 있소? 황자를 죽인 건 내가 아닌데.”

“…….”

“내가 듣기론 늑대 공작이 황자를 죽였다던데. 그에게 물어보는 게 더 빠르지 않겠나.”

뜬금없이 죽은 황자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건지 모르겠다. 이카르는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가던 길을 가려다가 그 자리에 멈칫하며 우뚝 섰다.

“근위대장.”

“…….”

“뭔가 알아낸 게 있소?”

“아닙니다.”

“아니긴. 경이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이오?”

한껏 예민해진 얼굴로 하트를 돌아봤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하트는 정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냥 궁금해 여쭤보았을 따름입니다. 쓸데없는 이야기였으니 그냥 잊어 주십시오.”

“…….”

“당분간 폐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쉬십시오, 백작님.”

그 말을 끝으로 하트는 자신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더니 이내 자취를 감췄다. 홀로 남겨진 이카르는 피곤한 얼굴을 마른세수하듯 한 번 쓸어내렸다가 깊은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좀 쉬는 게 좋겠어. 당분간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폐하의 안전에만 신경 써야지. 괜한 생각에 사로잡혀 페하의 호위마저 망치면 안 되니까.

“그래도 다행이네. 그 꿈이 거짓이었다니…….”

용이 보여 준 꿈이 아니라 다행이다. 정말 폐하의 말씀처럼 리카르디스가 선황에게 목이 졸려 살해당했던 거라면…… 자신은 너무 괴로웠을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줄도 모르고 탈출하자는 실용성 없는 말이나 내뱉었던 과거의 자신을, 정말 후회하고 또 후회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무거웠던 발걸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이카르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자신의 침실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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