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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39화 (339/488)
  • 339화

    “아는 사이가 아니라, 그냥 조언하는 거야. 어쨌든 네게 성력을 넘겨준 사람이잖아. 그러면 너보다는 잘 쓰겠지. 나랑 성전기사단은 빌려 쓰는 정도밖에 안 되니, 실질적으로 네가 사용하는 것과는 결이 달라.”

    “그건 그렇지…….”

    “굳이 도움을 얻는다면 나보다는 네 아버지가 더 잘 알 테니까.”

    보아하니 빈센트가 스완에게 다 얘기한 건 아닌 듯했다. 성력을 전부 넘겨주고 나면 우논이라 해도 죽는다는 걸. 드레인은 자신이 애기해 주는 것보다, 빈센트에게서 진실을 듣는 게 낫다고 생각해 에둘러 조언했다. 물론 자칭 눈치가 빠르다는 백조께선 말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신 듯했지만…….

    “이래 봬도 나 효자야.”

    “어, 그래…….”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다 잘한다고.”

    “그래, 그래. 너 잘났다.”

    진짜 전혀 이해 못 했네.

    “어쩐지 기분이 나쁘다?”

    “언제는 내 말에 기분이 좋았니?”

    그녀의 말에 스완은 뒷머리를 긁적이곤 그건 또 그렇네, 라는 말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알겠어. 아버지도 보고, 훈련도 열심히 하고, 폐하께도 네 말 전해 주고. 그렇게 열심히 살 테니까 이제 그만 나 돌려보내 줘.”

    “누가 들으면 내가 널 억지로 붙잡고 있는 줄 알겠구나.”

    “어서! 피곤하단 말이야, 오늘은.”

    “알겠어. 아, 참 그리고 말이야……,”

    “으악! 잔소리 그만 좀 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스완이 제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그 기이한 행동에 드레인은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참 말이 많았네. 백조 따위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어.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돌아가. 더 안 붙잡을 테니까.”

    “할 말이 뭔……! 아악!”

    쟤는 돌아갈 때마다 반응이 저런단 말이야. 대체 언제쯤 적응할는지. 드레인은 반쯤 사라진 백조를 향해 소리쳤다.

    “뱀과 어울리지 마. 넌 뱀 곁에도 있어선 안 돼.”

    이 정도 조언은 괜찮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흔적도 없이 사라진 빈 공간을 응시했다.

    *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생각 때문에, 이카르는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인상을 찌푸렸다.

    ‘자, 이카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야.’

    ‘안녕, 도련님. 안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이카르. 거기 숨어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 봐.’

    ‘날 기억 못 하나 봐.’

    ‘그땐 너무 어렸으니까.’

    사촌 형이었던 카시온이 어느 날 한 소녀를 데리고 제 앞에 나타났다. 한눈에 봐도 대단한 귀족가의 자제인 듯했다. 같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귀족과 이종족의 귀족은 태생부터 그 위치가 달랐다. 당시 이카르는 아주 어렸지만 그 정도의 경계선은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 정말 많이 컸네. 예전에 봤을 땐 아기였는데.’

    ‘지금도 아직 어려.’

    자신을 바라보는 카시온의 눈동자엔 사랑이 잔뜩 묻어 있었다. 소심한 성격 탓에 무리와 곧잘 어울리지 못하던 이카르를 부모처럼 업어 키운 게 카시온이었다. 이카르와 카시온은 이종족으로 치면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편은 아니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성장의 차이가 꽤 컸다.

    그래서 카시온과 비슷한 또래였던 리카르디스는 이카르를 아주 어린 아이처럼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안녕, 이카르. 난 리카르디스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

    ‘그렇게 숨어 있으면 나는 네 멋진 모습을 볼 수 없는데. 이쪽으로 와서 우리 같이 놀자.’

    그게 이엘의 어머니였던 리카르디스 론과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었다.

    이카르는 시간이 지날수록 리카르디스에게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카르가 가장 좋아하던 카시온과 매우 닮았으니까. 어린 이카르의 눈에도 두 사람은 굉장히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카르는 두 사람이 언젠가 결혼하지는 않을까, 막연히 그런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왜?! 왜 누님을 만나면 안 돼?’

    ‘이카르. 그녀는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었어.’

    ‘어째서? 왜? 나랑 형님을 두고 어딜 가? 누님이 어딜 가!’

    ‘황궁에.’

    ‘황궁엔 왜?’

    ‘곧 황태자비가 될 거야.’

    늘 밝게 웃던 카시온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아주 잠깐 드리워졌다. 이카르로서는 처음 보는 형의 모습이었다. 다급히 카시온의 옷 끝을 움켜쥐자, 언제 그랬냐는 듯 카시온은 다정하게 웃으며 이카르를 품에 안아 올렸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보고 싶다고 해도 만날 수 없는 건 똑같았을 거야. 그녀는…… 우리와 다르니까.’

    ‘형. 누님한테 가지 말라고 하면 안 돼? 누님한테 황태자비가 되지 말아 달라고 하면 안 되는 거야?’

    ‘응, 안 돼.’

    ‘…….’

    ‘제국엔 그녀가 필요해.’

    ‘나도 필요해! 나도 누님이 없으면 싫어!’

    ‘이카르. 넌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나중에 크면…… 알게 될 거야. 우리가 그녀를 막을 주제가 안 된다는 걸.’

    그때는 왜 자신을 어린애 취급 하냐며 엉엉 울었지만,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카시온의 말에 틀린 게 하나 없었다. 자신들에겐 리카르디스를 잡을 자격 따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들의 종족을 지키기 위해 황궁으로 팔려 가다시피 끌려가 결혼했다. 당시 황태자였던 선황으로부터 재규어의 안전을 약속받고 약혼을 진행했던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어떤 마음으로 황태자비가 되었는지, 어린 이카르는 알지 못했다.

    ‘누님. 형님을 버릴 거야?! 형님은 누님밖에 없는데! 누님이 어떻게 형님을 두고 황태자비가 되는 거야!’

    ‘미안, 이카르. 방법이 없었어.’

    ‘리키!’

    ‘원래 귀족의 삶이란 다 이런 것이란다. 가문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법이지. 뭐, 그거에 비하면 나는 약속받은 게 하나 있으니 아예 밑지는 장사는 아니구나.’

    그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한 건, 재규어 토벌을 앞둔 상황에서였다.

    ‘어서 도망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어서 도망쳐, 카시온!’

    ‘리키?’

    ‘아버지가 하는 말을 엿들었어. 곧 재규어를 토벌하러 갈 거야. 너희만이라도 도망쳐, 제발!’

    이카르가 기억하는 그녀는 늘 단정하고 우아해서, 옷차림이나 자세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허용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리카르디스는 조금 달랐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얼굴 곳곳엔 눈물 자국을 고스란히 묻힌 채로 때마침 제도에 머물고 있던 카시온과 이카르를 찾아왔다.

    그때까지도 어린 이카르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처음 보는 낯선 리카르디스의 모습에 겁에 질려, 벽 뒤로 숨어 덜덜 떨었을 뿐. 그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한 건 조용히 듣기만 하던 카시온이었다. 아마도 그는 그 토벌전의 목표가 자신이었음을 직감했겠지.

    그 이후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제도에서 자신들의 영지까지 어떻게 돌아오게 되었고, 가족과 종족의 품을 떠나 어떻게 숨어 살게 되었는지. 이카르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르 백?”

    “…….”

    “이카르.”

    “…….”

    “이카르 백작!”

    “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커다란 목소리에 이카르가 정신을 퍼뜩 차렸다. 반쯤 넋이 나간 채 주변을 둘러보던 이카르는 저를 걱정스레 쳐다보는 이엘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카르 백. 잠을 설쳤나?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폐하.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며칠째 연이은 연회에 재규어들은 신난 건지, 술에 잔뜩 취해 노래를 부르며 저희끼리 어깨동무를 한 채 춤까지 추고 있었다. 이카르는 자신이 언제부터 여기 앉아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대장. 뭐 하쇼. 왜 그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소?”

    “아…….”

    “쯧쯧. 넋이 나갔구만. 그렇게 좋소?”

    재규어 한 마리의 농담에 모두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와중에도 이카르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카르 백.”

    “……예, 폐하.”

    “들어가 쉬는 게 어떠한가?”

    아까부터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이엘이 돌아가 쉴 것을 거듭 권했다. 그제야 이카르는 뻑뻑한 목을 움직이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눈물이 왈칵 차오를 뻔했다. 이엘의 얼굴 위로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겹쳐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카르는 간신히 참아 냈다. 여기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면 이엘이 눈치챌 것이고, 그러면 며칠 전에 했던 이야기 탓임을 알게 되겠지. 이카르는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영지 일이 바빠 밤을 지새웠더니 이렇게 표가 나나 봅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폐하.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편히 즐기시고 조심히 돌아가셔서 쉬십시오.”

    “이카르 백.”

    “예?”

    “나 역시 돌아가 쉴 생각인데, 백작이 내 호위를 맡아 주겠나?”

    “…….”

    “강요는 아니야. 그대가 편할 대로 해.”

    아주 잠깐 머뭇거리던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앞에 팔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청했다.

    복도를 걷는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제 팔을 잡고 있는 이엘 역시 어떤 말도 하지 않는 터라 불어오는 바람이 스산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이런 적막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 먼저 말을 붙였을 텐데. 하지만 지금의 이카르는 걸음을 옮기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해 다른 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결국 적막을 깬 건 이엘이었다.

    “백작은 연회가 따분했나 본데.”

    “따분한 건 아니지만, 썩 즐거웠던 것도 아니에요.”

    연회 준비를 모조리 제 수하들에게 맡겼는데 어찌나 엉망진창이던지. 솔직히 이카르의 마음에 드는 연회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의 말에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연회를 지시한 자신도 불만이 있다는 말투로. 그에 이엘이 웃음을 터뜨리며 걸음을 멈췄다.

    “그대는 동족에게도 가차 없구나.”

    “물론입니다. 재미없는 걸 재밌다고 거짓말할 만큼 착한 성격은 아니니까요.”

    “그게 백작의 매력이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건 폐하밖에 없을 겁니다.”

    그제야 이카르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이엘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이카르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를 끌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참. 백작도 소식 들었지? 제도에서 귀족회의가 열린다는 것.”

    “예. 며칠 전에 서신이 도착해서 확인했습니다.”

    “영지 시찰을 하는 기간엔 회의를 미룰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올리세스의 동태 때문에 걱정이 돼서 패티스에게 맡기기로 했어.”

    무엇보다 제도에 있는 패티스가 귀족회의가 열리길 간절히 원했다. 그는 올리세스의 영지에 간 뒤로 소식이 끊긴 노아를 대신해 올리세스의 상황을 살펴보고 싶다고 전해 왔다. 또한 노아가 만나지 못한 코르넬 포르 역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어쩌면 붙잡혔을지 모를 노아가 올리세스의 감시로부터 도망칠 시간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이엘은 스완을 통해 간단한 안건들을 패티스에게 넘겨주었다. 아마 이번 회의는 패티스를 비롯한 하이에나가 주축이 되어 이끌어 가겠지.

    “저희는 참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폐하께서 이곳에 계신 데다가, 저를 제외한 종족의 전력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는 편이 나으니까요.”

    “그래, 잘했어. 어차피 이번 회의는 형식적인 모임이고, 우리 쪽도 많이 참석할 예정이거든. 하트 경이 잠깐 다녀오기로 했어.”

    “하트 경이요?”

    “응. 어차피 한 번은 제도에 다녀와야 했어. 가서 데려올 사람도 있고.”

    “데려올 사람이 누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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