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드디어 뱀을 눈앞에서 치워 버렸다. 계속해서 포레스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늑대들까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 옛날. 저 상처 입고 쓰러졌던 재규어를 주워 이렇게 잘 키운 보람이 있구나, 라는 허튼 생각을 하며.
“이카르. 사실 그대에게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잠깐 시간 좀 내 줘.”
“그러면 저와 함께 영지 안을 돌아보시면서 말씀 나누실까요?”
“응. 그러자. 하트 경. 경은 이곳에 남아 정리를 맡아 줘. 르네 공. 공작은 근위대와 기사단 정비를 부탁할게. 다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오늘은 푹 쉬고 환영 만찬은 내일로 미룰까 하는데. 괜찮겠나, 이카르 백?”
“물론입니다. 폐하. 연회는 내일로 미루겠으니 오늘은 모두 푹 쉬십시오. 발트. 가서 손님들 머물 공간을 안내해 줘라.”
“예, 대장!”
“호칭 좀 바꾸라니까.”
이카르는 이엘의 눈치를 슬쩍 보며 킥킥거리는 재규어들을 툭 쳤다. 사실 아직도 백작이란 작위가 영 어색하기만 하다. 그래서 재규어들이 저를 어떻게 부르든 그냥 두었던 것이다.
그래도 작위를 내려 주신 폐하 앞에선 이러면 안 되겠지. 한때는 소백작으로 불렸던 것 같은데, 왜 그게 머나먼 얘기 같은 건지……. 이카르는 뒷목을 긁적이며 이엘을 향해 겸연쩍게 웃었다.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죠?”
“응. 내 생각보다 더 자유롭네.”
“그나마 남아 있던 놈들은 줄곧 자유롭게 살아왔던 놈들이라서요. 아직은 규율 안에 얽매이는 게 불편한가 봐요.”
“후후. 언젠가 백작이 내게 자유를 주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네.”
“그러게요. 그때만 하더라도 폐하 한 분 정도는 제가 거뜬히 책임질 자신이 있었는데 말이죠.”
“지금은 수하에 식솔이 많아졌지?”
“예. 뭐, 좋긴 한데 그만큼 약점이 많아졌단 소리이기도 하니까요.”
이엘과 이카르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영지의 경계를 기준으로 이곳 안쪽엔 눈이 그친 터라 산책하는 데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쌓인 눈이 녹지 않아, 이카르는 이엘이 넘어질까 그쪽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카르.”
“예, 폐하. 말씀하십시오.”
“전에 내가 말했던 건데.”
“예. 폐하, 앞에 얼음이 있습니다. 밟지 말고 제 손을 잡고 건너십시오.”
이카르는 여전히 이엘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이엘은 그의 크고 단단한 손을 붙잡으며 얼음을 가볍게 피했다. 하지만 얼음을 무사히 피했는데도 이카르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냥 산책이 끝날 때까지 저가 에스코트하겠다며.
그러다가 이엘이 그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걸음을 멈춰 세웠다.
“폐하?”
“듣는 귀도 없으니 여기서 얘기 좀 할까?”
“알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전에 말했던 건데, 내 어머니 말이야.”
“리카르디스…… 아니. 선대 황후 말씀이십니까?”
“응.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서 백작과 논의하고 싶은 게 있어.”
리키의 죽음을 왜……. 그러고 보니 몇 달 전에 귀족회의가 있어 제도로 올라갔을 때 이엘이 그런 말을 했었지. 선황후가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냐고. 이카르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선황이…… 어머니를 살해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폐하! 어찌 그런…….”
선황이 악랄하고 잔혹하기는 해도 황후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가문인 론 후작가는 제국 내에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 그녀의 아비와 선황은 사이가 좋기까지 했다. 두 사람의 결혼으로 황가와 후작가는 더 돈독해졌고.
“그냥 추측이야. 놀라지 말고 들어 줘.”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신 건지,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
“폐하.”
이엘은 손으로 이마를 덮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이게 그저 망상이길 바란다. 사실이 아니어야만 해. 정말로 선황에게 살해당한 거라면 너무…… 너무 끔찍하잖아.
한편 이카르는 저도 모르게 잡고 있던 이엘의 손을 놓아 버렸다. 머릿속이 멍해지고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두 번이나 언급하셨다는 건…… 뭔가 짚이는 게 있어서다. 그 생각을 하니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폐하. 뭔가 알게 되신 겁니까……?”
“꿈을 꿨는데.”
“…….”
“내가 꿈에서 선황에게 목이 졸려…… 죽는 꿈을 꿨어.”
이미 여러 번 꾼 꿈이었다. 이엘은 꿈속에서 어떤 여자의 모습이었고, 선황이 제 목을 있는 힘껏 조르기를 반복하던 꿈.
“내 몸이 아니고 다른 여자였는데……. 모르겠어. 난 왜 그게 내 어머니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걸까.”
“…….”
“그때. 선황이 목을 조르는 모습을 누군가 목격했어. 그래서 선황이 목격한 사람을 죽이려고 뒤따라가려는 걸 내가 막았고.”
필사적이었다. 선황이 그냥 그 목격자를 잡으러 가게 뒀다면, 어쩌면 여자는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선황을 붙잡아 따라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 결국 숨이 막혀 죽고 말았고.
“목격한 사람은 아주 작았어.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는데, 죽을힘을 다해 뛰는 속도도 아주 느렸어. 성인에 비하면.”
“설마 그게……,”
“아마도 황자가 아닐까 싶어.”
적어도 이엘의 기억엔 그런 장면이 없었으니까. 어쨌든 그녀의 추측이 맞다면, 꿈속의 여자는 선황후일 테고 그녀가 절박하게 지키고자 했던 목격자는 이온일 것이다.
“하지만 리키는…… 론 후작 영애는…… 그러니까 선황후께서는 분명 병사로…….”
이카르가 횡설수설하며 말을 제대로 이어 나가지 못했다. 그는 엄청난 충격에 빠진 건지 비틀거리다가 끝내 주저앉아 두 손바닥 안에 제 얼굴을 숨기고 말았다.
“아, 안 됩니다. 그건 안 됩니다……. 제발요. 제발 그건…… 그건 안 돼요, 폐하.”
“이카르.”
“그, 그럼 저는 리키도 지키지 못한 겁니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누님, 정말이야? 정말로 누님…… 살해당했다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난 뭐 하나 제대로 지킨 게 없냐. 절망에 빠진 이카르가 숨을 가쁘게 쉬었다.
“이카르. 우선 진정해. 확실한 게 아니라고 했잖아.”
“…….”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대 잘못도 아니야.”
“제 잘못입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끔찍한 황궁에서 탈출시켰어야 했어요.”
할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에게 그녀 한 명 정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말했던 건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비록 숨어 다니는 신세는 됐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그녀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었다. 그 정도는 자신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생겨서…….”
“…….”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아이들이 생겨서…….”
이엘은 이카르를 진정시키기 위해 뻗었던 손을 거두고 주먹을 말아 쥔 채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 때문에 바닥이 축축했지만 그녀도, 이카르도 개의치 않았다. 지금 두 사람에겐 그런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예전에 예지몽 같은 악몽을 자주 꾼다고 했던 것 기억나지?”
“……예.”
“그 꿈을 보여 주는 사람이 있어.”
“…….”
“꿈을 능력으로 사용하는 이종족. 용이야.”
“용이라면 날씨를 바꾸…… 설마 암컷……을 만나셨습니까?!”
“응.”
암컷이 살아 있었다니. 충격의 연속이었다. 하긴. 용의 수컷도 존재하는데 암컷이 없겠는가. 어딘가에 살고 있기는 했겠지.
이엘은 혼란에 빠져 있는 이카르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간단히 정리해 알려 주었다.
“그럼 조금 전에 폐하께서 말씀하신 선황의 살해도 그 여자한테 물어보면 되겠군요.”
“응. 그러려고. 지금 나는 만나지 못하지만 스완은 그녀를 비교적 자주 만나고 있다니까, 스완을 통해 확인해 볼게.”
“알겠습니다.”
이카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에겐 꼭 말하고 싶었다. 리카르디스와의 추억은 딸인 이엘보다 오랜 친구인 이카르에게 더 특별하고 깊을 테니까.
“하지만 백작이 자책하길 바라고 한 얘기는 아니야.”
“…….”
“그때의 백작이 설령 어머니의 죽음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고 한들, 그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알고 있습니다.”
“단지 선황의 죄가 더 무거워질 뿐이야.”
그녀의 단호한 말에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이카르는 바들바들 떨리는 제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실소하듯 피식 웃었다.
“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누님과 형님을 황궁으로 몰아넣고, 끝내 두 사람 다 지키지 못한 채 저만 이렇게 홀로 살아남았군요…….”
“어머니가 그대와 도망쳐 살지 못하게, 나와 황자가 태어났고.”
“폐하. 그런 뜻은…….”
“나도 그렇게 살아남았어.”
“…….”
“어머니의 희생으로. 황자의 희생으로. 또 다른 누군가의 희생으로.”
여기 있는 모두가 그랬다.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보고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이엘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손을 뻗어 눈이 조금 묻은 이카르의 머리카락을 털어 주었다.
“그러니까 우리 악착같이 살아남자.”
“……폐하.”
“살아갈 이유를 만들자. 응?”
“예…….”
“고마워. 내 어머니가 조금이나마 숨 쉴 틈을 만들어 줘서.”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아냐. 도망치자는 그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을 줬을지, 난 알 것 같거든.”
적어도 퇴로를 하나 확보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을 얻는다. 아마 그때의 어머니도 그랬으리라. 외롭고 괴로운 황궁 생활에서 언제든 도망칠 수 있다는 말 한 마디가 그녀를 더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고마워. 그 외로운 황궁에서 어머니의 가족이 되어 줘서.”
“누님께서 제 가족이 되어 주셔서 감사했는걸요.”
“그리고 내 가족이 되어 줘서 고마워, 이카르.”
“…….”
“그러니까 이제 나도 그대의 가족이 되어 줄게. 그대의 종족을 위해, 내가 힘이 되어 줄게.”
……그러네. 정말로 그 말 한 마디가 사람을 구원하는구나. 이카르는 이엘의 말을 들으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손을 뻗어 차갑게 얼어 버린 이엘의 손을 잡았다.
“폐하의 말이 저를 몇 번이나 구원하네요.”
“나도 같은걸.”
“저 역시 폐하의 힘이 되어 드릴 겁니다.”
“지금도 충분해.”
“후에 외롭지 않으시도록. 죽는 날까지 제가 함께할게요.”
“그래. 내가 늙으면 꼭 그대가 내 말동무가 되어 줘야 해.”
이엘이 웃으며 던진 농담에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다.
아주 오래전에 다짐했다. 이엘이 로빈의 영지에서 자살 소동을 벌였을 때, 이카르는 다짐했다. 다시는 이엘과 떨어지지 않겠다고. 닥쳐올 죽음도 그녀와 함께할 거라고.
그 얘기는 그녀를 위해 이 긴 수명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였다. 이카르는 지금 이 시기를 넘기고 제국에 안정기가 찾아오면, 스스로 노화를 선택해 영존하는 우논의 삶을 포기할 것이다. 그렇게 홀로 죽음을 향해 갈 그녀와 속도를 맞출 거라고, 이미 아주 오래전에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