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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36화 (336/488)
  • 336화

    며칠 동안 리노에게 약을 주지 않았다. 즉 지금 그의 상태는 포필렌에 취해 환각을 보는 게 아니란 소리다. 고문의 흔적으로 제정신이 아닌 건 맞지만, 그가 천재였다는 걸 감안하면 적어도 완전한 헛소리는 아니란 결론에 다다른다.

    대물림……. 정말로 ‘그’와의 만남은 대를 이어서 연결되고 있는 건가? 선황이 저지른 짓을 대신 받고 있는 거야? 선황이 바치기로 했던 아이가 이엘이라면, 그래서 이엘이 ‘그’를 만난 거라면.

    로빈은 이 가설이 확실해지면 정말로 그녀의 아이를 ‘그’에게 바치려고 할 것이다. 그때 뱀은 제게 그런 말을 했다.

    ‘날 막아도 좋아.’

    ‘…….’

    ‘이젠 나도 나를 돌이킬 수가 없거든.’

    ‘…….’

    ‘하지만 너도 마음이 바뀌거든, 내 손을 잡고 날 도와.’

    로빈은 이엘을 향한 노아의 사랑을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노아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제 손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 아이를 바칠 것이라고.

    “……미치지 않고서야.”

    하지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모양이지. 그 아이는 내 아이이기도 해. 내가…… 어떻게 해서든 그녀에게 안겨 주고 싶은, 내 마지막 소망이다.

    테오도로.

    확신한다. 나는 그 아일 만날 거야. 그리고 그 아이는 그녀의 뒤를 이어 다음 황제가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지킬 거고 만들 거니까. 노아는 주먹을 거세게 말아 쥐며 다시 한 번 강하게 다짐했다.

    *

    엄청난 눈보라는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일정이 밀린 터라 이엘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을 때, 그녀의 앞에 눈보라를 뚫고 재규어가 나타났다.

    “폐하. 모시러 왔습니다.”

    몇 달 만에 보는 이카르가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이엘에게 다가왔다. 그의 뒤로 한 무리의 재규어 떼가 보였다. 원래 개체수가 많지 않은 종족이라 아마 저 정도 인원이면 거의 모든 개체가 다 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게 내가 못 미더웠나?”

    “그럴 리가요. 하루라도 빨리 폐하를 뵙고 싶은 충신의 마음이라 생각해 주시죠.”

    능청스레 대답한 이카르가 그녀를 향해 또 한 번 웃었다. 그는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큰 손으로 소탈스럽게 털어 내곤 제 뒤를 따라온 재규어들을 이엘에게 소개해 주었다. 아주 잠깐의 휴식 후에 재규어가 선봉이 되어 지친 무리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이쪽 지리에 밝은 재규어들의 도움으로 지체되던 여정이 한결 수월하게 진행됐다. 이엘 역시 이틀째 곤히 잠든 포레스트와 함께 이카르의 등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뱀을 태워야 한다는 사실에 인상을 찡그리며 불쾌한 기색을 보이던 이카르는 그녀의 강경한 선택에 어쩔 수 없이 포레스트까지 등에 태워야 했다.

    눈보라를 맞으면서도 재규어들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퍽 신난 모양인지 저들끼리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기까지 했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그들의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가까웠는데 코앞에서 이틀이나 버렸네.”

    “그래도 오드 님이 함께 계셔서 다행이네요. 전 폐하께서 감기라도 걸리셨을까 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고작 감기 따위로 백작의 심장이 떨어진다고?”

    “그럼요. 인간의 목숨은 너무 약해서, 고작 감기 따위로도 빼앗길 수 있는걸요.”

    “그래. 내 어머니께서도 그랬지.”

    “…….”

    “아. 오해하지 마. 일부러 분위기를 가라앉히려고 던진 말은 아니었으니까.”

    “아닙니다. 폐하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제가 꺼릴 리 없죠.”

    여전히 이카르는 이엘을 편하게 해 주었다. 그와의 즐거운 대화 덕분에 쏟아지는 눈을 맞는 게 싫다기보다는 꽤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폐하. 제 영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렇게 친림하여 주시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여전히 짓궂구나.”

    “하지만 지금은 사실이에요. 폐하께서 이렇게 제 영지에 와 주실 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이카르와 재규어가 받은 영지는 아주 오래전 재규어 토벌 전에 그들이 지내던 곳이었다. 사실 선택지는 꽤 많았다. 건국 초기에 주인이 없는 땅이 많았기 때문에 이엘은 이카르에게 그 땅 중에 원하는 곳을 고르라고 했었던 것이다.

    그때 이카르와 재규어들은 원래 저희 영지였던 곳과 토벌 이후 숨어 살던 곳 중 고심하다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이곳을 택했다.

    “역시 좀…… 모자라죠?”

    “응? 뭐가?”

    “다른 영지들에 비해서요. 개간도 덜 됐는데 인력도 모자라서 많이 미흡합니다.”

    하필 그녀가 이곳에 오기 전 들렀던 곳들이 죄다 오래 자리 잡고 있었던 유서 깊은 귀족들의 영지들이라, 재규어의 영지는 그에 비하면 모자라고 미흡한 구석이 한둘이 아닐 터였다.

    이엘에겐 늘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었던 이카르는 살짝 머쓱한 건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열심히 변명을 붙이고 있었다.

    “마, 많이 꾸민다고 꾸며 봤는데……. 역시 저는 이런 쪽으로는 많이 부족해서요. 민망하네요.”

    “아니. 근사해. 이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다워.”

    “빈말 안 해 주셔도 됩니다.”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야.”

    “…….”

    “오는 내내 재규어들이 신난 게 눈에 보였는걸.”

    “…….”

    “그건 그대가 종족을 아주 잘 이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이번엔 그녀의 칭찬에 머쓱해진 건지, 이카르는 또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확실히 개체수가 다른 종족에 비하면 현저히 적긴 하다. 성문 바로 앞에 집결한 숫자와 이엘을 데리러 왔던 재규어들을 다 합쳐도 그 숫자를 금세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이카르는 이 정도 인원이 살아남았다는 것에 감사했고, 이 인원을 끝내 찾아냈다는 것에 만족했다.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만큼 회복하는 건 어렵겠지만 적어도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된 현실에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폐, 폐하! 안녕하십니까!”

    “폐하를 뵙습니다!”

    “와…… 폐하다. 진짜, 폐하야…….”

    이엘이 성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몰려왔던 재규어들이 입을 쩍 벌리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른 종족들은 이따금 제도 내로 들어와 황궁에도 찾아오는 반면, 재규어는 영지에 할 일이 워낙 많은 터라 제도를 방문하는 개체가 별로 없었다.

    사실상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재규어들 대부분이 오늘 이엘을 처음 보는 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폐, 폐하. 무례가 아니라면 폐하의 손등에 키스를……,”

    “안 닥쳐? 그게 무례란 거야, 이 자식들아.”

    이카르가 이를 드러내고 그르렁거리며 위협하자 재규어들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뒤로 물러났다. 거참, 자긴 폐하께서 등에 올라타는 영광을 독차지한 주제에……. 꿍얼거리는 재규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카르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것들이 진짜. 황궁 예법이란 걸 모르네.”

    “놔둬. 활기차서 좋은데, 왜.”

    “폐하.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죠. 폐하를 처음 알현하는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하다니. 혼낼 건 혼내십시오.”

    이카르. 너도 저들과 별반 다를 게 없거든? 이엘은 그렇게 대꾸하려다 실소하듯 웃으며 그냥 상황을 넘겨 버렸다. 이엘이 이카르의 등에서 내려오자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줄곧 등에 업고 있던 뱀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근데 폐하. 이 뱀은 저희 선물인가요? 먹어도 돼요?”

    쓰러진 뱀을 사이에 두고 웅성거리던 재규어들이 그녀의 허락을 기다리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러나 이엘이 안 된다고 말하기도 전에 이카르가 먼저 그들의 이마를 주먹으로 콩콩 때려 버렸다.

    “야. 채신머리없게 이럴 거냐? 뱀이 얼마나 맛이 없는데. 비려.”

    “헐. 대장은 뭐 먹어 본 것처럼 얘기하네? 먹어 봤소?”

    “예전에 먹을 게 진∼짜 없어서 먹었던 적은 있다.”

    아마도 이엘과 함께 뱀의 영지에 머물렀을 때를 얘기하는 것 같은데……. 이엘은 이카르의 말을 들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이렇게 생긴 놈들은 진짜 맛이 없어. 입맛 떨어지니까 관심 꺼라.”

    “에이, 그래도 폐하께서 가져오신 선물인데 어떻게 거절합니까!”

    “이게 무슨 선물이야. 보면 모르냐? 그냥 이놈이 폐하께 들러붙은 거잖아. 딱 봐도 그냥 짐덩이구만.”

    이카르의 핀잔에 재규어들이 입을 삐죽거리더니 쳇! 소리를 내곤 자리를 떠나 버렸다.

    “죄송합니다, 폐하. 애들이 좀 우악스럽네요.”

    “응, 그래. 백작의 종족은 참 귀여운 종족이야.”

    “네……? 귀여…… 귀엽다고요?”

    다른 이종족들과 달리 오랜 시간을 야생에서 자라 온 탓인지 언행에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이엘은 진심으로 그들이 귀엽게 보였다. 마치 이카르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무사히 이카르의 영지로 도착한 이엘은 그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에 들어왔다. 처음 영지를 하사받고 저택을 짓는 등의 영지 개발을 할 때 하이에나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니, 이카르의 저택은 하이에나 세쌍둥이의 저택과 상당히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이엘은 신기한 듯 저택 구석구석을 살피며 이카르의 안내를 받았다.

    “사실 아직도 개간이 한창이라 따로 구경할 만한 곳은 없어요. 사자나 늑대의 영지처럼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야생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고 있어서, 보여 드리기 진짜 민망하네요.”

    “됐다니까. 내가 영지의 아름다움을 구경하러 온 게 아니잖아. 그냥 그대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또 내가 도와줄 건 없나. 그런 걸 확인하러 온 거야.”

    “뭐, 그렇다면……. 아, 일단 저 뱀 좀 치워도 되나요? 그냥 아무 데나 던져 놓겠습니다.”

    “그래. 괴롭히지만 말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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