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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35화 (335/488)
  • 335화

    “아…… 사제님. 저는 아직 작은 신님을 뵐 자격이 안 됩니다.”

    “노르드 님. 형제님이 자격이 없다면 누가 자격이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아직도 속세의 탐욕을 버리지 못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저런…….”

    사제 아스타로가 노아를 쳐다보며 잠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스타로를 비롯한 이 마을 사람들은 노아가 이곳을 떠날까 전전긍긍했기 때문에, 조금 전 노아의 말이 아스타로의 권유를 멈추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안 되겠군요. 사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노아를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럼 형제님은 이곳에 남아 다른 분들과 함께 잔치를 준비해 주십시오. 작은 신께서 곧 오실 테니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예, 아스타로 님.”

    아스타로와 마을 사람들이 작은 신이라고 부르는 자는 다름 아닌 올리세스 윌터였다. 그는 때마다 이곳을 찾았는데, 그를 본 사람들이 모두 ‘작은 신’이라며 그를 추앙했다. 그러니까 이곳은 진짜 신은 뒤로하고, 가짜 신인 올리세스 윌터를 숭배하는 곳이 된 것이다.

    변두리, 그것도 바다와 인접한 탓에 무시무시한 생물들이 수시로 침범하는 땅. 분명 이엘이 인간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도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음에도 이곳까지 떠밀려 온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것 역시 올리세스가 계획을 꾸민 거겠지.

    “아, 참. 노르드 형제님?”

    “예, 사제님.”

    “녹색 탑에 다녀와 주시겠습니까?”

    “아. 먹을 것을 들고 갈까요?”

    “아니요. 오늘은 그곳에 계신 형제님과 가벼운 대화를 해 주세요.”

    “…….”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약을 제때에 드리지 못했거든요.”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아스타로는 싱긋 웃으며 노아에게 가벼운 묵례를 하고 성전을 떠났다. 홀로 남은 노아는 들고 있던 트레이를 던져 버리고 덥수룩해진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젠장. 좀처럼 적응할 수 없는 이곳 생활에 점점 더 환멸을 느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긴 이르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캐내서 이엘과 만나야 한다.

    “녹색 탑…….”

    성전을 나와 저 멀리 솟은 뾰족한 녹색 탑을 쳐다봤다. 조금 전 아스타로가 말한 녹색 탑이란 바로 저 탑을 말한다.

    그리고 그곳엔 리노 윌터가 갇혀 있다.

    “가능하면 리노 윌터도 데리고 탈출하면 좋겠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여차하면 늑대로 변해서 달아나면 되지만 리노 윌터에겐 늘 감시가 붙어 있으니까. 아스타로가 자신을 믿고 저 탑에 출입시켜 준 것도 꽤 최근의 일이었다. 저곳은 접근 자체가 어려운 곳이다.

    그만큼 리노 윌터의 존재가 중요하단 소리이기도 하지. 노아는 그 생각과 함께 해진 망토를 주워 입었다. 성전 앞뜰을 지나치던 노아는 커다란 조각상을 가만히 쳐다봤다.

    “미쳤군. 누가 봐도 올리세스 윌터가 아닌가.”

    이 마을은 미쳤다. 세뇌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제대로 보여 주는 듯했다. 그 어느 때보다 신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한 이런 시대에, 약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수법으로 마을을 장악하다니.

    인간은 가장 총명했지만, 그건 신께서 주신 선물이었을 뿐이다. 그걸 빼앗기고 가장 약한 존재가 되고 나니 어딘가에 기대어 살아가지 않으면 숨 쉬는 것조차 눈치를 보는 작은 생물체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곳은 포필렌이 대량으로 재배되고 있고, 사람들은 치사량에 가까울 만큼 포필렌을 복용하고 있었다.

    “리노 윌터 역시…….”

    조금 전 아스타로가 리노 윌터에게 제때에 주지 못했다던 약은 다름 아닌 포필렌이었다. 틈을 보던 노아가 리노에게 주는 포필렌으로 만든 약을 전부 빼돌렸던 것이다. 그는 품속에서 약병을 꺼내 흔들었다. 그러곤 안에 든 물을 바닥에 쏟아 버리곤, 뜰 한구석에 위치한 우물에서 물을 끌어 올려 병 안에 대신 채워 넣었다.

    리노 윌터는 이 모든 사건의 핵심이다. 올리세스에게 동생 리노는, 제정신이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미치거나 죽어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리노에게 주어지는 약은 포필렌에 다른 약을 첨가해서 만드는 특별한 물이었다. 따라서 한 번 만들어 놓은 것들이 사라지면 다시 만드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단 소리다.

    노아는 비장한 표정과 함께 성전 뜰을 벗어나 탑을 향해 걸었다. 처음만 하더라도 그를 잔뜩 경계하던 마을 사람들은 어느새 노아를 완전히 신뢰하는 듯했다. 탑으로 향하는 내내 그를 반겨 주는 모습을 보면.

    “노르드! 아까 사제님께서 찾으시던데 어디 있었나?”

    “그렇잖아도 조금 전에 뵈었어. 녹색 탑에 다녀오라고 하셔서 가는 중이다.”

    “너도 참 안타깝다. 힘만 세면 뭘 해. 검술이 그렇게 형편없어서야.”

    다갈색 머리의 남자가 다가와 노아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최근 윌터 백작의 사병으로 뽑혔다던 자였다. 이곳에 들어와 꽤 오랜 시간을 포필렌 재배하는 일에 매진하던 남자는 노아가 약간의 조언을 줌으로써 검을 쓰는 실력이 확 늘어나더니 곧장 사병으로 뽑혔다.

    물론 이곳에서 노아는 검을 전혀 쓰지 못하는 척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인간이라고 보기에 어려운 외모에 체격까지 좋은 터라 괜한 의심을 살까 봐. 그러면서도 올리세스의 본거지에 있는 사병들의 정보를 캐기 위해 잠입시켜 놓을 인간을 물색해 키웠다. 그러나 남자는 그게 노아의 덕분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지 말고 내게 검술을 배우라니까? 응? 이런 자질구레한 심부름 따위나 하지 말고. 그쪽이 벌이도 좋고 전망도 좋다니까? 그리고 이건 우리끼리 비밀인데, 포필렌도 더 많이 주더라고.”

    “포필렌을?”

    “그래. 여기선 내 몫의 양밖에 받을 수 없지만, 백작님의 사병이 되면 그 이상을 가질 수 있어. 이걸로 돈을 벌 수도 있다고.”

    역시……. 이제 본격적으로 포필렌을 제국 내에 유통시킬 생각인 것이다. 그 꽃의 중독성은 인간에게 더 약하니 한번 퍼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질 것이다. 서둘러야겠어. 빨리 일을 처리하고 폐하를 만나야 한다. 시간을 지체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돼.

    “어쨌든 나는 이만 가 보겠다. 다음에 또 보자.”

    “그래. 수고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남자를 뒤로하고 부지런히 걷던 노아는 숲 깊숙한 곳에 도착한 뒤에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 재빨리 산을 올랐다.

    산꼭대기에 위치한 녹색 탑이 지척으로 가까워진 정도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탑은 높이가 높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주 낡고 형편없어서, 탑이라기보다는 흡사 감옥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어서 와라, 노르드. 오늘은 네가 담당이냐?”

    “네. 가서 좀 쉬세요.”

    “아우, 그래. 피곤해 죽겠다.”

    마침 탑을 나오던 중년의 남자가 노아를 발견하곤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며칠째 이 탑을 지키고 있느라 꽤 피곤했던 모양이다. 노아는 남자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지나쳤다. 이 마을에 지내면서 유일하게 익숙해진 습관은 이렇게 가식적인 웃음을 짓는 것뿐이었다.

    아마 안드로가 지금 자신의 웃는 얼굴을 본다면 큰 충격에 빠져 새파랗게 질릴지도 모르겠다. 노아는 불쑥 떠오른 제 종족 생각에 탑으로 들어서던 걸음을 잠깐 멈췄다.

    외로움이란 단어를 너무 오랜만에 느꼈다. 이엘을 만나고 그녀와 함께 지내면서 잊고 살았던 감정을 너무 오래간만에 재회한 셈이었다.

    무리 생활을 하는 종족의 특성 때문일까. 아니면 이렇게 홀로 떨어진 게 처음이라 그런 걸까. 지긋지긋하던 안드로의 잔소리마저 그리울 정도였다.

    “아냐, 정신 차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냐.”

    양 뺨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치고, 탑의 문을 열고 들어가 높디높은 계단을 올랐다. 늑대로 변한 뒤에 오르면 금방 오를 테지만, 건물 내부의 모든 곳이 낡아서 본체화를 했다가는 금방 무너져 버릴 것 같아 인간의 모습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했다.

    가장 높은 곳엔 문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이 안엔 그가 있다.

    똑똑. 예의상 가벼운 노크를 하곤 익숙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밖은 대낮이라 훤한데, 이곳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노아는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공간 속 한구석에 몸을 최대한 작게 말 듯이 웅크린 남자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리노.”

    낮지만 힘 있는 노아의 목소리를 듣고 남자가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그는 거의 네발로 기다시피 노아의 앞에 다가왔다.

    “노, 노르드…….”

    “쉿. 먹을 것을 좀 가져왔어.”

    “야, 약……. 약을 줘. 제발 약을…….”

    “안 돼.”

    “…….”

    “참기로 약속했잖아, 나랑.”

    노아의 단호한 목소리에 리노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울음을 참는 듯했지만 끝내 눈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그 모습에 노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큰 소리를 냈다가는 일이 커질 텐데.

    “리노. 쉿.”

    “으, 응…….”

    “어때. 어제보단 몸이 좀 괜찮은 것 같아?”

    “아니. 무거워……. 몸이 너무 무거워서 자꾸 바닥에 묶인 것처럼 버거워.”

    “그게 당연한 거야. 익숙해져.”

    그간 약에 취해 한없이 몸이 가벼웠겠지, 쯧. 노아는 혀를 차곤 리노의 발목을 살폈다. 다행히 며칠 전에 자신이 널널하게 채워 둔 쇠고랑의 상태가 여전했다. 조금 전에 이곳을 지켰던 중년의 남자는 이 방까지 들어오진 않았던 모양이다.

    “발은 괜찮아?”

    “아니,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아스타로가 리노의 발목에 쇠고랑을 묶어 둔 이유는 그가 탈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 때문도 있지만, 언젠가 포필렌 약에 취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려 했던 전적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물론 그날 이후로 이곳의 창문을 전부 막아 버려 지금은 햇빛 한 점 들어오지 못해, 이렇게 깜깜한 동굴이 되어 버렸지만.

    “약을 줘. 제발 약을 줘, 노르드……!”

    “알겠어. 줄게.”

    “정말?!”

    “그래. 여기 있어.”

    어쩔 수 없다는 듯, 노아는 품에서 꺼낸 약병을 리노에게 건넸다. 리노는 기다렸다는 듯 약을 벌컥벌컥 마시곤 행복한 표정으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살 것 같아.”

    물론 이건 진짜 약이 아니다. 아까 우물에서 퍼 온 물이었다. 그러나 리노는 방 안이 깜깜해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간절했던 탓에 진짜 약인 줄 알고 마셨다.

    “리노.”

    “응.”

    “네가 전에 했던 말. 진짜야?”

    “응. 나는 거짓말하면 안 돼. 거짓말하면 혼나…….”

    “선황이 정말…… ‘악마’를 만나려고 했어?”

    “응. 그리고 자식을 바치려고 했어. 정말로.”

    “…….”

    “그리고 나를…… 나를 괴롭혔어……. 무서웠어. 돌로 내 머리를 치고, 목을 조르고, 물이 가득한 곳에 내 머리를 집어넣고, 또…… 또……!”

    “그만.”

    “…….”

    “됐어. 알겠으니까 더 말하지 말고 푹 자.”

    “응…….”

    감은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지곤 금세 잠들었다. 노아는 그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전부 사실이었어. 로빈의 말이…… 전부 다 사실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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