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포레스트가 움직였다. 여전히 눈도 못 뜬 채 스스로가 어떤 상태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뱀은 온기를 찾아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금방 따뜻하게 해 줄 테니 본체화는 하지 마. 널 감당하기 힘들어.”
뱀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그 크기가 어마어마해질 테니 정말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다행히도 포레스트는 본체화를 하지 않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엘의 다리 위에 머리를 벴다.
“저, 저……!”
“노아 님께서 안 계신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듯하네요.”
늑대의 말에 알폰스가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주제도 모르는 뱀이 감히 폐하의 무릎에 얼굴을 올려? 마음 같아선 저 눈보라가 세차게 부는 곳으로 놈을 내던지고 싶었다.
“포레스트가 잠들었으니 차라리 잘됐어. 다들 한곳에 모여라. 오드 님이 따듯하게 해 주실 거야.”
이엘이 오드를 향해 살짝 묵례하자, 뒤로 물러서 있던 오드가 앞으로 나와 결계를 드넓게 펼쳤다. 그러자 언제 눈이 왔냐는 듯, 오드의 성력이 뻗치는 범위 안은 고요해졌다. 뿐만 아니라 따뜻한 온기가 공간을 데우고 있었다.
말은 안 해도 제법 추웠던 건지 이종족들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기사단장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터라, 하트가 총지휘감독을 맡아야 했다. 그리고 그 옆을 르네도 함께 도왔다.
“폐하. 야영 준비를 하겠습니다. 뱀은 그곳에 두시고 편히 쉬십시오.”
하트를 대신해 그녀의 호위를 맡은 알폰스가 조용히 말했다. 이엘은 알폰스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제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포레스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일정한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진 뱀의 얼굴이 처음보다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미세한 추위를 느끼는 건지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이 불만이었던 건지 알폰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말렸다.
“차라리 여기에 버리고 가십시오, 폐하.”
“가만 보면 알폰스 경이 그 누구보다 냉정한 듯하구나.”
“그렇다기보다는…….”
“포레스트는 지금 이 무리에서 가장 약자야. 게다가 이곳 모두와 식성이 맞지 않아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아무도 그를 챙겨 주지 않았고.”
“그건…….”
“경을 탓하려고 한 말이 아니야.”
이엘은 작게 웃으며 포레스트의 검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뱀은 그녀의 손길을 따라, 조금 더 깊게 얼굴을 파묻었다. 그 꼴을 넋 놓고 지켜봐야만 하는 늑대들은 하나같이 탐탁지 않은 낯으로 뱀을 노려보고 있었다.
“딱히 정의로움을 논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가장 약할 때 목숨을 빼앗기에는 이 아이가 잘못한 게 너무 없지 않니?”
“…….”
“물론 지금 이 상황에 내 다리에 누워 있는 게 로빈이었다면 말이 달라졌겠지만.”
“폐하, 그건!”
“그러니 그냥 두라고. 이 아이도 저 나름대로 민폐 끼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아남고 있지 않니.”
그렇게까지 말하는 이엘에게 더는 잔소리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알폰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앞에 장작을 더 피워 놓은 채 멀찍이 떨어져 호위하는 것에 집중했다.
“슈프. 가까이 와도 돼.”
저 멀리서 고개만 쏙 내밀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슈프를 발견했다. 그녀의 부름에 몸을 숨긴다고 숨기고 있던 하얀 늑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민망한 건지 다가오지 못하는 슈프를 향해 가까이 오라며 이엘이 다시 한 번 손짓했다.
“추우니까 이쪽으로 더 가까이 와.”
“네에…….”
도둑질을 하다가 걸린 아이처럼 슈프가 뜨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도 뱀을 지켜보라는 노아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이엘 몰래 포레스트를 잘 지켜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녀가 모르게 뱀을 지켜보기엔 슈프의 덩치가 더는 작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거기서 뭘 하고 있었니.”
“그, 그냥…… 폐하께서 안전하신가 지켜보고 이, 있었습니다…….”
어쩜, 거짓말도 저렇게 서투를까. 이엘은 속으로 웃으며 괜찮다고 다독여 주었다. 그제야 슈프는 꼬리를 아래로 내려뜨린 채 이엘과 포레스트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슈프. 안 추워?”
“네! 저는 추위 따위 무섭지 않은 자랑스러운 늑대니까요!”
“어머. 역시 우리 슈프는 남다르구나. 다른 늑대들은 눈보라를 맞을 때마다 앓는 소리를 내던데.”
그녀의 장난스런 말투에 저 멀리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일부 우논 늑대들이 움찔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반면 이엘의 치켜세움을 받은 슈프는 조금 전의 의기소침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양어깨를 으스대듯 잘난 체하는 자세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저는 젊으니까요!”
……그럼 우린 늙었다는 소리냐? 알폰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튼 어린 테르들은 폐하의 칭찬만 들으면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니까. 그러나 그 역시 끝에 가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래 봬도 건강한 몸 하나는 노아 님과 비슷할걸요!”
땅을 짚고 선 네발이 덜덜 떨리는 주제에 무슨……. 다른 우논들이 저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어쨌든 슈프는 기세 좋게 큰소리를 치다가 그녀의 설득에 밀려, 결국 따듯한 모닥불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슈프. 힘들진 않아?”
“네, 그럼요.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그래. 네가 있어 내가 아주 든든하구나.”
어찌나 기분이 좋으면 꼬리가 뱅뱅 돌아가고 있다는 것도 모를까. 이엘은 몸만 자란 새끼 테르를 다정히 바라보며 포레스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어느 정도 체온이 돌아왔다. 그래도 아직은 품에서 떨어뜨리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온도에 예민한 종족이니까.
이엘은 이곳 생태계를 알게 됐다. 약한 자는 살아남지 못하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이곳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알폰스에게 말했듯, 지금 이 무리에서 가장 약자는 포레스트다.
모두가 배척하는 뱀이라는 종족에, 그가 매달릴 곳은 오직 이엘 하나뿐인데 그녀는 뱀을 챙겨 주지 않았다. 오히려 방목하여 그가 어떻게 살아남는지 지켜보는 쪽에 가까웠다.
일부러 그랬다. 로빈이 이 뱀을 제게 보낸 이유가 너무 투명했으니까. 포레스트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 첩이 됐든 정부가 됐든 무슨 자리라도 얻어 오길 바랐겠지.
그래서 그랬다. 내 마음에 들기를 원한다면 로빈의 부추김이 아니라, 포레스트가 스스로 이 무리에서 살아남아 가치를 증명해 보이기를.
물론 저들이 이 뱀을 핍박하거나 괴롭히는 일 따윈 하지 않을 테니,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말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지만.
“제가 할게요, 폐하!”
이엘의 생각을 깨운 건 뜬금없는 슈프의 외침이었다. 하얀 늑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그녀의 앞에 가까이 다가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그 뱀. 제가 감쌀게요!”
“뭐? 아니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저는 이종족이니까 체온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어요. 제가 털로 감싸면 뱀도 금방 따뜻해질 거예요. 폐하께서도 편하실 거고요.”
얼른 제게 주세요! 우렁차게 말하는 슈프를 뒤쪽에서 지켜보던 늑대들이 쾌재를 불렀다. 개중엔 우리 막내가 다 컸구나, 이런 표정으로 지켜보는 자들도 있었다. 그래. 폐하 곁에서 저 얄미운 뱀을 떨어뜨리는 데에 성공했으니 됐다. 다 컸구나, 슈프야!
한편 이엘은 얼결에 슈프에게 포레스트를 맡기면서 저 작은 늑대의 호의에 큰 감동을 받았다. 물론 포레스트의 삿된 짓을 두고 보지 말라는 노아의 명령이 있던 건 사실이겠지만, 슈프는 그것 때문에 움직인 건 아닌 듯했다.
“으으, 따뜻해…….”
저가 끌어안고 있는 게 뭔지도 모르는 포레스트가 슈프의 하얀 털을 꽉 잡으며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래도 그간 이엘의 손길을 받고 자랐다고, 포레스트를 감싼 슈프의 자세가 제법 익숙해 보였다. 이엘은 어색한 듯 어색하지 않은 두 종족을 지켜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노아 님은 언제 오실까요.”
어느덧 막사 정리가 마무리되는 듯했다. 시끄럽게 떠들던 소리가 점차 줄어들 때쯤, 슈프가 혼잣말을 하듯 이엘을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늑대의 목소리에 이엘은 돌멩이로 바닥에 낙서를 하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소식이 꽤 오래 끊겼네.”
“괜찮으시겠죠?”
“물론. 생각지 못한 일을 만나 연락을 하지 못하는 것일 테니까. 걱정 말렴, 슈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엘도 슬슬 걱정이 밀려오던 차였다. 노아에게서 연락이 끊어진 게 두 달을 훌쩍 넘었던 것이다.
일이 복잡하게 된 걸까. 혹시 올리세스에게 붙잡힌 건가 싶어서 독수리를 보내 올리세스의 영지를 살펴보게 했지만 노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잠입했던 자들을 통해, 올리세스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떠났다는 말까지 들었다.
예정대로라면 올리세스의 영지를 떠나 바로 근처에 있는 포르 영지에 들러 포르 자작을 만난 뒤에 자신들과 합류했을 텐데, 노아는 올리세스의 영지를 떠나 포르 자작령을 들르지 않았다. 그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분명 일행이 늘었는데…… 갈수록 인원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지네.”
이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만 뒤로 돌려 상황을 살폈다. 원래대로였다면 저곳을 지휘하는 건 노아와 일라이저였을 텐데. 고작 두 사람이 빠졌을 뿐인데 그 자리가 제겐 더없이 크게 느껴졌다.
*
“어서 오세요, 노르드 형제님. 환영합니다.”
“반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제님.”
“형제님은 우리 마을에 꼭 필요한 분이신걸요. 형제님을 보내 주신 신께 매일 제물을 바쳐도 모자랄 정도랍니다.”
노르드. 노아가 이 괴이한 이름으로 이곳에서 살아간 지 벌써 두 달을 한참 넘었다. 신체가 건강하다며 마을 사람들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던 그는 이 괴상한 영지의 실질적 세력인 가짜 사제와 성전을 파헤치기 위해 위장 잠입하여 지내고 있었다.
슬슬 폐하께서 재규어의 영지로 향하실 때인가. 이곳은 사람의 혼을 쏙 빼기 위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날짜가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노아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일을 대비하여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기록해 두었다. 그렇게 날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재규어의 영지에서 그녀와 합류해야 한다. 다른 곳은 보는 눈이 많지만, 동맹족인 재규어의 영지는 비교적 안전하니까. 만일 여기서 타이밍을 놓쳐 합류하지 못하게 되면 다음 목표는 하이에나의 영지가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또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는 꼴이었다.
“노르드 님?”
“아, 예. 사제님. 부르셨습니까?”
“오늘은 저와 함께 작은 신을 모시러 가시는 게 어떠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