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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33화 (333/488)

333화

용의 암컷들이 갖고 있는 능력은 꿈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엘은 예지몽을 비롯해, 자신이 꾸는 꿈의 대부분이 용이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몇 번씩 꿈속에 나왔던 의문의 여자들 또한, ‘그녀’가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역시 폐하는 영민하셔. 내가 좋은 카드를 선택했어.”

“뭐야! 그럼 진짜야? 네가 그, 그 여자들을 일부러 폐하께 보여 주고 있었던 거라고?!”

“내가 직접 폐하와 접선하는 건 어려워. 그분 옆엔 늘 어두운 존재가 지키고 있거든.”

“뭐?”

“나도 내 나름대로 폐하께 힌트를 주고 있었단 소리란다, 고니야.”

‘목소리’가 이엘의 곁을 늘 지키고 있다. ‘그’는 보이지 않고, 만날 수 없으며 이쪽 세계의 일엔 간섭할 수 없지만 그녀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존재였다.

용은 몇 번이고 이엘과 만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자신은 스완처럼 성력을 직접적으로 쓸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힘에서 밀렸던 것이다.

그래서 간접적인 방법인 꿈으로 접근하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렇게 스완을 직접 만나는 것처럼 자신의 능력 안에 이엘을 불러들이는 건 어려웠다.

레타에서 용이 이엘과 만날 수 있었던 건 스완의 능력 속에 용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매개체인 스완이 없으면 이엘과 용이 직접적으로 만나는 건 현재로선 어려운 일이었다.

“대체 그 여자들이 누군데? 일부러 보여 준 거면 꽤 중요한 사람들이란 거 아냐?”

스완의 말에 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야. 정확히는 내게 소중했던 사람의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해야 하나.”

“…….”

“내 친구가 죽기 전에 내게 맡기고 떠난 아이들이거든. 그 애들.”

“맡겼다고? 그럼 설마…… 살아 있어?! 그 여자들?!”

“글쎄. 그렇게 말하기가 좀 어려운 상태야.”

용은 골치 아픈 일을 떠올린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뭔가 엄청 일이 꼬였나 본데. 스완은 호기심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봤다.

“뭔데, 뭔데.”

“……너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거 아니지?”

“에이, 설마∼ 내가? 절대 아니지! 걱정하고 있는 건데?”

“…….”

“진짜야! 그러니까 말해 봐. 또 알아? 내가 도움이 될지 말이야.”

“다른 건 몰라도 네가 도움이 안 된다는 건 확실히 알겠어.”

“거참, 듣는 사람 배려 안 해 주는 화법은 여전하네.”

입을 삐죽이며 토라진 체하던 스완이 다시 자세를 고쳐 앉고는 의자를 움직여 여자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응?”

“너. 인식표 알아?”

“응. 알지. 암컷이랑 인간 여자의 쇄골쯤에 넣어 놨던 거잖아.”

“그거 제거하면 죽는 것도 알지? 원인 모를 독이 퍼져서 말이야.”

“알지.”

“지금 그 애들은 인식표를 뜯어낸 상태로 잠들었어. 내 꿈속에서.”

“뭐?!”

“그 애들은 내가 2차 전쟁에서 빼돌린 애들이야.”

2차 전쟁이라면 이종족이 인간 여자들을 무참히 죽여 버렸던 그 전쟁 아닌가. 그때 모든 인간 여자들이 죽어 버렸다. 물론 이종족에게 목숨이 빼앗긴 자들도 많았지만, 상당수가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인식표를 뜯어내다가 해독할 수 없는 독기가 퍼져 죽었다.

“그럼 인식표를 뜯어내자마자 네 능력 속에 숨겼다는 거야?! 그게 가능해?!”

“안 돼. 그건 금기와 다를 바 없어. 그러면 안 됐지. 내 실수야.”

“무슨…….”

“그래서 내 꿈속에 갇혔다고 말한 거야. 그 애들은 내 능력을 벗어나면 죽어. 나는 그냥 아주 잠깐의 시간을 벌어 놓은 것에 불과해.”

그렇게 십여 년의 시간 동안 꿈속에 살고 있단 건가? 스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용은 스완의 놀란 표정을 힐끗 보고는 자조하듯 엷게 웃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서 고개를 흔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들은 내 능력 속, 멈춘 시간에 살고 있어. 나이를 먹지도, 성장하지도 못한 채 눈을 감고 그대로 멈춰 있어.”

“잠깐만! 그건 이 세계의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짓이잖아.”

“맞아.”

“…….”

“내가 신께 돌아가지 못하게 된 이유야, 그게.”

보호석을 만들고 파괴하는 것처럼, 신이 만든 세상의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짓은 명백히 신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할 암컷 용이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지르다니. 그녀는 나자르 외에는 허락되지 않는 일을 벌였다.

“그래서 백조. 네 도움이 필요해.”

“무슨…….”

“네가 성력을 마음껏 운용할 수 있게 되면, 그 아이들의 독을 제거해 줘.”

“내, 내가 어떻게 해!”

“할 수 있어. 폐하께서 살아 계신 게 그 증거야.”

“…….”

“폐하께서도 2차 전쟁 때 인식표를 제거했지? 그런데도 지금까지 살아 계시단 건, 그분 옆에 있는 나자르 님이 그녀를 살렸다는 뜻이야.”

“그럼 오드 님이 직접…….”

“안 돼. 내 잘못으로 저지른 일이니 나자르 님은 거절하실 거야. 신께서 원치 않으시는 일일 테니까.”

용의 말에 스완은 갑작스레 심각한 부담감을 떠안게 됐다. 가뜩이나 통제할 수 없는 성력의 크기 때문에 매일같이 성전기사단장에게 호된 훈련을 받고 있는데…….

조금 전에 사용한 성력도 아주 미약했다. 고작 그 정도의 성력을 사용한 것에도 스스로를 칭찬해 줘야 할 정도인데, 어떻게 마음대로 운용하라는 말인가. 솔직히 이런 식이면 몇십 년이 지나도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는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그만큼 나자르가 아닌 존재가 성력을 사용한다는 건,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나, 난 못 해……. 나한텐 너무 힘든 요구야.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어. 너만 할 수 있어.”

“하지만…….”

“좋아. 네가 그렇게 부담스럽다면 강요하진 않을게.”

다행히 용이 먼저 한발 물러서는 것을 택했다. 스완은 티 안 나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지금 내 목숨 부지하는 것도 괴로운 판국에, 내가 누구 목숨을 구해? 절대 못 해, 그런 건.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능력을 강하게 부정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처음 땅을 밟고 올라왔을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소극적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오히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뛴다며 앤디에게 한 소리 듣기까지 했다.

그랬던 자신이었는데……. 힘겨운 시간을 몇 년이나 보내고 나니 간이 정말 콩알만 해지기라도 했나.

“어쨌든 네가 성력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어.”

“…….”

“그게 너 자신을 위해서든, 폐하를 위해서든.”

“…….”

“혹은 더 많은 생명을 위해서든 말이야.”

스완이 마른침을 삼키며 미간을 좁혔다. 윽, 저 표정. 왠지 낯익은데…….

“그래서 난 앞으로 널 상당히 혹독하게 가르치려고 해.”

“뭐?!”

“폐하께서 내 생각보다 빨리 내 처지를 눈치채 주셨으니까. 미적거릴 틈이 없지.”

와……. 저 약아빠진 용 좀 봐. 어떻게 여기서 폐하를 거론해?! 따지지도 못하게……. 불만을 가득 품은 스완의 얼굴이 점점 불퉁해졌지만 여자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팔짱까지 끼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백조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그에게 제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정식으로 인사할까? 내 이름은 드레인이야. 만나서 반가워, 백조.”

“참 나. 나도 이름 있거든?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난 스완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그래.”

“윽! 무, 무슨 힘이 이렇게…….”

악수하기 위해 마주 잡았을 뿐인데 용의 무지막지한 힘에 기가 잔뜩 눌렸다. 그러나 스완은 제 눈앞에 선 여자에게 힘으로나 능력으로나 한참 밀릴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투덜거리던 입을 꾹 다물었다.

“스완. 근데 언제까지 그렇게 앉아만 있을 거니?”

“뭐? 네가 앉혔잖아! 내가 앉은 게…… 아, 아니라…….”

말꼬리를 흐리며 드레인의 시선을 피했다. 와, 진짜 살벌해. 그간 스완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마구 날뛰어도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던 건, 그가 이엘과 목숨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력을 배우기 위해 찾아간 성기사단장 사피라 역시, 스완을 아주 황가의 사람처럼 깍듯이 대했다.

하지만 드레인은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쓰고 배려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래? 그럼 내가 또 직접 일으켜 세워 줄까?”

“아, 아냐! 내가 일어설게!”

벌떡 일어선 스완은 매섭게 변한 드레인의 얼굴을 마주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 난 정말 용이랑 안 맞는다니까! 속으로 몇십 번이나 그 말을 되뇌었다.

*

시간은 계속해서 빠르게 흘렀다. 르네의 영지를 떠나 여러 영지를 돌고, 마침내 이카르의 영지를 코앞에 두었을 땐 두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즉, 매서운 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가는 겨울의 한복판이란 소리다.

“폐하! 눈보라가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래도 잠깐 쉬었다 가심이 좋을 듯합니다!”

앞서 정찰을 나갔던 늑대 한 마리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눈이 쌓인 머리를 흔들며 소리쳤다. 이엘은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그가 알폰스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만큼 그는 온몸이 눈으로 흠뻑 젖은 채였다.

이엘은 알폰스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주고는 몸을 돌려 진영을 살폈다. 긴 여정이었으나 근위대는 지친 기색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건 겉으로 봤을 때의 판단이고. 실제로는 꽤 피로가 쌓여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이종족이라고 해도 반년이 넘게 이어지는 여정이 즐거울 리 없었다.

거기다 그녀의 무리엔 이종족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우고 영지로 돌아간 일라이저의 2기사단 역시 이곳에 있었다. 인간인 그들이 긴 여정을 소화하며 이 혹한까지 견디는 건 어려웠다.

“그럼 우선은 쉬도록 하자. 다들 한곳에 모여라.”

“폐하. 뱀이 쓰러졌습니다.”

앞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던 이엘이 하이에나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말처럼 포레스트는 바닥에 쓰러져 덜덜 떨고 있었다. 르네의 영지를 떠나 북부 영지를 순회하면서부터 뱀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추운 곳은 살기 어려운 종족이라 그렇겠지.

이엘은 혀를 가볍게 차더니, 모로 누워 입김을 내뱉으며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는 포레스트의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제 손은 비교적 따뜻한 편이었다. 그녀는 정신을 못 차리는 뱀의 이마를 짚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포레스트.”

“으으…….”

“이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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