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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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의 영지는 꼭두새벽부터 소란스러웠다. 오랜만에 영주가 자리를 비우는 터라, 경비를 비롯한 영지의 체계 인수인계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느라 분주했던 것이다. 그 중심에 서 있던 엔리케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르네를 따라 영지 곳곳을 살피느라 바빴다.
“혹시나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내게 속히 보고하도록 하게.”
“예, 각하. 그리 하겠습니다.”
“믿을 만한 자들을 선별해 뽑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그대가 하나하나 체크해 주었으면 해.”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경비를 철저히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게.”
홀가분한 낯의 르네를 바라보며 엔리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최근 며칠 동안 르네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는데 황제와 함께 떠나게 되어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어쩌면 일라이저 러셀이 예정과 달리 후작령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더 이상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엔리케는 아주 잠깐 일라이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를 가까이서 본 횟수는 손에 꼽힐 정도로 엔리케는 일라이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아비를 닮아 아름답고 총명한 얼굴만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다.
그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그걸 바라고 던진 말이었지만, 엔리케는 그 순간 커다란 죄라도 지은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선득해지는 걸 느꼈다. 우습지만 그 순간, 작은 동정심을 느꼈다. 연민을 느꼈고, 어쩌면 동병상련…… 그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엔리케는 아들을 제 손으로 죽였다. 제 아들을 비롯하여 몇몇 우논들이 뱀과 손을 잡고 죄 없던 인간 여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기 때문에, 그는 르네의 명령으로 그 우논들을 모두 죽였다. 아들도 예외는 없었다.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 제 아들을, 제 손으로 직접 처단했다.
그리고 그 결과, 메이슨은 어미도 잃고 아비도 잃은 아이가 되어 버렸다.
‘우리 아빠는 잘못하지 않았어요! 그게 왜 잘못이에요?!’
그 어린것이 아비의 죽음이 억울하다며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엔리케를 여러 번 때렸다. 어려서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엔리케는 그 일을 완전히 묻고 살았다. 메이슨도 모든 걸 잊고, 그렇게 잘 자라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이는 잊지 않았다. 메이슨은 제 아버지의 부재를 매 순간, 매 시간 누구보다 강하게 느끼며 자라고 있었다. 어떻게 잊겠는가. 자신은 죗값이라는 명목으로 아들을 묻었지만, 메이슨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아비를 그리워하며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충격으로 물든 일라이저의 눈동자를 보았을 때, 마치 다 자란 메이슨을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굳이 진실을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었을까? 가뜩이나 부모 없이 자란 자에게, 굳이 이런 비극을 전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엔리케.”
“예, 각하.”
르네의 낮은 음성에 엔리케가 겨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뭔가 고민이 있는 듯한데.”
“아닙니다.”
“말해 보게. 그간 경이 내 고민을 들어 주었으니, 나 역시 도움이 되고 싶다.”
“…….”
“경도 내 종족이야.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 내가 어찌 마음 편히 떠날 수 있겠나.”
엔리케는 아주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춘 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쓸데없는 짓을 벌였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데.”
“러셀 후작에게…… 릴리 님에 관해 알려 주었습니다.”
“…….”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주제넘은 짓인 걸 알고는 있군.”
“…….”
입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애초에 일라이저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엔리케를 불러 그 자리를 파하게 만든 게 르네였다.
아무리 일라이저가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알려 달라 부탁했어도, 그 이야기는 르네의 허락 없이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후회가 조금씩 밀려들어 왔다.
“됐다. 그런 걸로 경을 책망할 만큼, 과거에 연연하지 않으니까.”
“각하.”
“일어나라. 중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리 고개를 숙일 필요 없어.”
어차피 다른 이종족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일화였다. 릴리의 짝사랑과 그 끔찍한 말로는, 르네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입에서도 가볍게 오르내리는 가십거리였다. 제 가족의 죽음엔 끔찍할 정도로 격노하는 자들이, 타인의 죽음은 쉽게 논한다는 게 우스운 현실이었지만.
어쨌든 그에 비하면 일라이저는 르네처럼 관계자에 가까우니 이런 걸로 엔리케를 벌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러셀 후작도 언젠간 알게 될 사실이었다. 생각보다 고집이 있어 보였으니, 어떻게든 알아냈겠지.”
“…….”
“그래서. ……러셀 후작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조금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어림짐작하고 있었던 듯싶기도 하고요.”
르네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엔리케를 뒤로하고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떠났던 모양이군……. 원래 예정대로라면 일라이저는 이엘이 영지 시찰을 마칠 때까지 그녀의 호위를 맡아야 했다. 별안간 영지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고 해서 의아했더니, 엔리케에게서 들은 진실에 어지간히 큰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정신력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 가지로 피로가 겹친 탓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르네는 제 머릿속에서 일라이저를 지웠다. 노아까지 없는 마당에 자리를 오래 비우지는 않을 것이다. 금방 돌아오겠지.
일라이저는 홀로 떠난 상태였다. 그가 이끄는 제 2기사단은 그녀의 곁에 여전히 남아 있지만 어쨌든 단장이 없으니 르네의 일이 막중해졌다. 현재로선 근위대장인 하트와 궁수대장인 자신이 이 많은 무리를 이끌며 황제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공작.”
때마침 가벼운 숄을 걸치고 밖으로 나와 있던 이엘이 그를 발견하고 먼저 알은체를 해 왔다. 르네는 공손히 인사하고 성큼성큼 그녀의 곁으로 걸어갔다.
“폐하를 뵙습니다.”
“새벽부터 영지가 시끄럽던데. 아직 할 일이 남았으면 출발을 하루 뒤로 미룰까?”
“아닙니다. 마지막 점검을 마쳤습니다. 여기는 문제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야. 떠나는 우리 쪽도 문제없을 테니까.”
불안한 제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이엘이 웃으며 그를 달랬다. 르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걷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었다. 어느덧 추운 계절을 코앞에 두고 있었는데, 이엘이 처음 제 영지에 머물렀던 때가 겨울이었던 터라 르네는 늘 그 계절을 그리워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그 계절을 사랑하게 된 건 오롯이 이엘 때문이었다.
“러셀 후작이…… 뭔가 알게 된 거지?”
“…….”
“공작을 탓하려는 게 아냐.”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또. 그런 말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짐짓 화난 얼굴로 경고하듯 힘주어 말했다. 르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일라이저는 금방 돌아올 거야.”
“…….”
“그 남자는 그렇게 강하니까.”
“예.”
“그러니까 우린 너무 마음 쓰지 말고, 기다리자. 아니. 기다리는 건 내가 할 테니, 공작은 공작의 일에만 신경 써.”
“명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작의 정원에 들렀다가 갈까? 나와 같이 가 주겠나?”
“영광입니다.”
제게 내민 그녀의 손등 위에 짧은 키스를 하곤, 르네는 이엘을 호위하며 정원을 향해 걸었다. 그녀의 말이 옳다.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에 일일이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맡은 일에 집중하는 것.
그러기 위해 일라이저도 잠시 쉬러 간 것일 테니.
*
“어? 어어?! 어어어!”
“넌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여자가 혀를 쯧쯧 찼지만, 스완은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건지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왁왁! 괴상한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용은 백조를 한심스럽게 쳐다봤다. 왜 하필 저런 놈이……. 갑자기 저런 놈과 계약을 맺은 나타니엘이 불쌍하게 느껴져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와! 성공했어!!”
“야. 너 언제까지 그렇게 오두방정을 떨 건데.”
“내가 성공했다고! 와! 내가 성력을 사용하는 것에 성공했다아!”
“안 되겠네. 다음에 얘기하자.”
“자, 잠깐만!! 어디 가!”
“지금 네가 대화할 상태가 아닌 것 같아서.”
“미안.”
냉큼 미안하다고 사과한 스완은 히죽 웃으며 용을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생긴 기회인데 다음을 기약해? 그 다음이 언제 올 줄 알고. 일단 성력을 사용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기쁜 마음은 잠시 접어 두자. 스완은 여자의 앞에 앉아 얌전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용은 기가 찬 건지 팔짱을 낀 채로 백조를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 난리 법석을 떨던 모습은 어디 가고 조신하게 자세를 잡은 게 못내 웃겼던 것이다. 얌전이란 단어가 이토록 어울리지 않다니.
“자! 이제 입 다물 테니까 하고 싶은 말 해도 돼. 네 말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하고 있을게.”
“갑자기 왜 이래?”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폐하께서 꼭 물어보라고 하셨거든.”
“폐하께서 내게? 뭔데?”
“대답해 줄 거야?”
“글쎄. 어떤 질문인지 들어 보고 결정할래.”
“안 돼. 무조건 알려 줘야 해.”
“그런 생떼가 어디 있니.”
여자가 가볍게 손가락을 퉁기니 새하얀 공간에 폭신한 소파가 나타났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스완을 쳐다봤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내가 벌을 주는 것 같네. 용은 소파 옆에 작은 의자를 만들어, 능력으로 스완을 들어 그 의자에 앉혀 버렸다.
“우와. 너 지금 나 아플까 봐 배려해 준 거야?”
“……뭐?”
“내 소중한 무릎이 다칠까 봐, 이렇게 안전하고 폭신하고 튼튼한 의자에 앉혀 준 거잖아. 그치?”
“…….”
“역시 용은 달라. 이렇게 자애로운 이종족은 정말! 생전! 처음 봐! 내 편견을 깨뜨려 준 이종족은 네가 처음이야.”
이젠 저 백조가 어디까지 헛소리를 지껄일지 궁금해질 정도다. 대체 얼마나 중요한 내용이기에 이렇게까지 내 비위를 맞춰 주려 하는 거야? 그녀는 스완의 의중을 간파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참을 쳐다봤다.
그녀의 매서운 눈빛에 스완은 입가에 경련이 일 때까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용의 눈초리는 날카로워졌고, 결국 스완이 먼저 손을 들고 말았다. 더는 그 무서운 눈빛을 이겨 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아, 알겠어. 대답 꼭 해 줬으면 좋겠지만, 어쨌든 대답해 주는 건 네 마음이니까……. 근데 난 네가 꼭 대답해 줬으면 좋겠거든. 폐하께서도 엄∼청 바라고 계셔. 그러니까……,”
“사설이 너무 길어. 그만하고 본론이나 말해.”
“알겠어. 전에 네가 나한테 했던 말 중에, 네 능력에 갇힌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잖아.”
“기억력이 좋네?”
“그 사람들. 혹시 폐하의 꿈에 종종 보이는 여자들이야?”
“…….”
“그 여자들. 네가 일부러 폐하께 보여 주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