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31화 (331/488)
  • 331화

    *

    “저를 찾으셨다고요.”

    “시간을 내 줘서 고맙소.”

    일라이저가 머무는 공간으로 들어선 엔리케는 웃으며 그의 안내를 받아 소파에 앉았다. 엔리케는 일라이저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대충 알 듯했다. 그날 이후로 릴리의 초상화가 걸려 있던 복도의 출입이 금지됐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니까.

    “엔리케 경. 경을 부른 이유는…….”

    그러나 선뜻 말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일라이저는 들고 있던 찻잔을 조금 더 강하게 움켜쥐더니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기를 반복했다. 엔리케는 그가 마음의 준비를 마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한참 만에 일라이저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미안하군. 사람을 불러 두고 말을 하다가 말아서.”

    “아닙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경도 눈치챘겠지만…… 경을 부른 이유는 그날 있었던 초상화 때문이오.”

    “예.”

    “그분이 정말 공작님의 여동생이시오?”

    “맞습니다. 릴리 님은 공작님의 유일한 동생이셨습니다. 다른 분들은 모두 어릴 때 돌아가셨으니까요.”

    그날 르네가 경고했던 대로 초상화가 걸린 복도는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엘을 제외하면 독수리들조차도 그곳을 지나갈 수 없다고 한다. 한 번 더 그녀의 초상화를 가까이서 보고 싶었는데…….

    “경에게 이상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그분께서 내 고모님과 닮으셨소. 나 역시 고모님을 직접 뵌 적은 없으나 내 영지에 그분의 초상화가 있기 때문에 얼굴을 알고 있었소. 그런데 공작님의 여동생이라는 분께서, 고모님과 매우 닮아 보여 놀랐던 것이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걸 경이 어떻게…….”

    “이벨리아 러셀. 러셀 후작 영애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경이 어떻게 내 고모님의 존함을 알고 있는 것이오?”

    “러셀 후작 영애와 저희 공녀님께서 얼굴이 무척 닮았다는 것은 몇몇 사람들에겐 익히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정말로…… 정말로 고모님과 공녀님이 닮았소?”

    “러셀 후작 영애를 직접 뵌 적은 없어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일라이저의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근거 없는 불안함이 자꾸만 제 마음을 괴롭혀 댔다.

    “다만 선대 러셀 후작님이 여동생분과 닮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으시니 어느 정도는 사실인 듯합니다.”

    “선대 후작이라면, 내 선친을 말하는 것이오?”

    “맞습니다.”

    “…….”

    “각하의 선친께서 직접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는 아버지가 공녀, 그러니까 르네의 여동생인 릴리라는 영애를 직접 본 적이 있다는 말이 된다.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일라이저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날. 공녀님의 초상화 앞에서 경이 내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말해 주었으면 좋겠소.”

    엔리케가 무언가 말하려던 차에 지나가던 르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대화를 멈추게 했다. 그래서 일라이저는 르네에게 제 아비에 관해 물어보려 했으나 독수리는 그 어느 때보다 무섭고 잔인할 정도로 완강하게 거절했다.

    마치 루시우스 러셀, 그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 주인이신 르네 님께서 선대 러셀 후작님에 관한 이야기를 꺼려하십니다.”

    “그러니까 공작님이 내 아버지를 꺼려하시는 이유가 궁금한 것이오.”

    “…….”

    “설마 내 아버지가…… 독수리와도 관련이 있으시오?”

    독수리와도. 자기 입으로 그 단어를 내뱉으면서 일라이저는 참담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재규어의 멸족에 앞장섰던 기사단이 하필 루시우스가 이끌던 2기사단이었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재규어를 잡아들였던 사람은 단장인 루시우스였다. 그의 아들로 태어난 일라이저는 여전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건 명백한 사실이다.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는 르네 님을 잘 모르오. 그러나 폐하께서 굳게 신뢰하실 만큼 충심이 깊은 분인 건 알고 있소.”

    “…….”

    “그래서 그분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혐오감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독수리와 내 가문이, 어떤 악연으로 엮였던 건 아니었나 생각했던 것이오.”

    역시 인간은 똑똑하다. 어떤 작은 힌트도 없었을 텐데, 일라이저는 결론에 가까운 추측을 도출해 내는 것에 성공했다. 엔리케는 진심으로 그의 영리함을 칭찬했다.

    그의 아버지인 루시우스 러셀은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자였다. 인간들은 물론, 이종족들조차 그 남자의 우직함과 올곧음을 선망했으니까.

    재규어 토벌이나 2차 전쟁이 없었다면, 아마 루시우스 러셀의 인격이나 성품엔 어떠한 흠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제 가족에겐 얼마나 잘했겠는가. 특히 아들인 일라이저 러셀에게 그의 아비는 역사 속 어떤 영웅보다 단단하고 강직한 사람이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제 아버지가 독수리들과 악연으로 엮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곧장 하다니. 엔리케는 내심 놀랐다.

    “그리고 이것.”

    생각에 잠긴 엔리케의 앞에, 일라이저는 품속에서 꺼낸 무언가를 내밀었다.

    “우연히 르네 님의 집무실에서 찾았소.”

    “이걸 허락도 없이 가져오셨습니까?”

    “이건 내 것이오.”

    “…….”

    “내가 언젠가 잃어버렸던, 내 가문의 브로치니까.”

    일라이저의 손에 들려 있는 건 다름 아닌 브로치였다. 푸른색 사파이어가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주변을 고풍스러운 장식이 둘러싸고 있는 브로치.

    아주 예전에 일라이저가 독수리의 영지를 통과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을 때, 바닥에 떨어뜨리고 갔던 것을 엔리케가 주워 르네에게 건넸던 것이다. 루시우스의 자식이 살아 있다는 말과 함께.

    “경의 반응을 보니, 이 브로치가 르네 님께 있었다는 걸 경도 알고 있었나 보군.”

    “예. 제가 주워서 르네 님께 드렸으니까요.”

    “……역시 여기서 떨어뜨렸었나.”

    일라이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에 들린 브로치를 쳐다봤다.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브로치이지만, 푸른색 사파이어 안쪽에 러셀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러셀 가문의 브로치였던 것이다.

    “가문의 수장인 나에게나 의미가 있는 물건이지, 르네 님이 굳이 이걸 갖고 계실 이유가 없을 텐데 이게 왜 공작님의 집무실에서 나왔는지 궁금했소.”

    “맞습니다. 러셀 가문의 것이라 제가 공작님께 드렸고, 러셀 가문의 것이라 공작님께선 보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

    “악연이라고 하셨죠. 그것만큼 맞는 단어도 없겠군요.”

    “…….”

    “릴리 님을 죽인 사람이 바로 선대 러셀 후작. 그러니까 후작님의 선친이십니다.”

    ……역시 그랬던 건가. 이카르에 이어 르네까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인간과 이종족이 반목하며 살았던 시대다. 1차, 2차 전쟁을 모두 겪은 제 아버지가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을 리가. 그것도 제국의 제일 검으로 불리는 기사단장이었던 사람인데.

    “동생을 향한 르네 님의 사랑은 각별했습니다. 어릴 때 줄줄이 동생들을 잃고 겨우 살아남은 동기가 릴리 님 한 분뿐이셨으니까요.”

    “…….”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던 동생의 말로가,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서 죽는 모습이라니.”

    “잠깐. 지금 뭐라고…….”

    “그것까진 모르셨나 보군요.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릴리 님께선 선대 러셀 후작을 사랑하셨습니다.”

    어째서…… 어떻게…… 왜…….

    왜?

    “그 이상은 저도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후작님.”

    “…….”

    “나중에 르네 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기다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 뒤로 엔리케가 뭐라고 더 말하고 인사까지 하고 나갔으나, 일라이저는 반쯤 넋이 나간 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머릿속이 혼잡하고 괴로웠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파헤쳐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더 파헤쳐도 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쉬고 싶다.”

    그는 소파에 파묻히듯 몸을 잔뜩 기대며 눈을 감고 손으로 눈가를 덮어 가렸다. 지쳤다. 아닌 척해 왔지만, 일라이저는 이엘을 호위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심지어 제 영지에 그녀가 머물 때조차 경계를 늦추지 못했다.

    일라이저는 피로에 절은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소파에 조금 더 깊게 몸을 맡겼다. 이대로 며칠만 좀 쉴까. 마음이 복잡하니까…… 생각도 정리할 겸, 영지에 돌아가 며칠만 쉬다가 올까. 그곳에도 처리하지 못한 일이 가득 있었다.

    “그래도…… 어디든 여기보다는 낫겠지.”

    이번 건 정말 충격이네. 재규어 토벌은 황명이었다는 핑계라도 있었지. 이번 건 그런 핑계로 무마하지도 못한다. 고모님의 얼굴을 똑 닮은 영애를, 그것도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던 그 여자를…… 어떻게 죽이셨어요, 아버지…….

    이것도 황명 때문이었습니까? 황실에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게 우리 가문의 신념이니까? 그런데 그 신념엔 아버지의 신념은 없었던 겁니까? 아버지의 신념으로…… 황명을 거절하지는 못했던 거예요? 가문의 명예가, 위엄이 그렇게 중요한 거였나요.

    ‘내 아들.’

    그 순간 제 귀에 들린 아버지의 음성에 일라이저는 씁쓸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결국 아버지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하신 것이다. 그 가문엔, 어린 시절의 자신도 포함된다.

    아버지의 신념은 나였어. 나와 누님들, 그리고 어머니였어.

    지금의 일라이저에겐 아이가 없지만, 언젠가 이엘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들의 대부가 되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런 날이 오면 일라이저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들을 지키고 보호할 것이다.

    “그게 신념이 되는 거겠지…….”

    피식 웃음을 터뜨린 일라이저는 지끈지끈 아파 오는 머리를 지압하듯 꾹꾹 누르며 억지로 피로를 풀었다. 아버지를 비난할 자격이, 자신에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