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아닙니다.”
고개를 돌려 묻는 이엘에게 잠깐 미소 지어 주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조심히 따라오라는 말을 남기며 다시 공작성을 향해 걸어갔다.
반면 레온은 걸음을 멈추고 점점 멀어져 가는 이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찜찜하다. 자신이 밀로를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아주 짧은 시간 대면한 것만으로도 놈의 천성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밀로는 전형적인 ‘용’이다. 저밖에 모르고, 집착이 심하고, 순수하지만 그 순수함에 잔혹함도 섞여 있는.
제 신분이 용이라는 걸 숨겨야 하던 때에도 눈을 부라리며 쳐다봤다. 감히 종족의 왕인 나를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 오히려 뻔뻔하게 갈기를 요구했다. 용은 그런 종족이었다. 그렇게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종족.
그 용이 타이곤의 갈기 하나 뽑지 못해, 이엘을 이곳에 두고 돌아갔다? 아닐 것이다. 갈기는 겉으로 보이는 수단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그녀의 존재 자체를 노렸던 것일지도 몰라.
‘참 이상해. 이종족은 지키고 싶은 게 생기면 자신을 성장시키지만, 인간은 지키고 싶은 게 있으면 타인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게.’
불현듯 조금 전 이엘이 했던 의미심장한 말이 떠올랐다. 인간은 지키고 싶은 게 있으면 타인의 희생을 요구한다……. 여기서 타인은 밀로일 테고, 인간은 그녀 자신을 뜻하겠지. 그 얘기는.
“폐하가 지켜야 하는 뭔가가 있는 건가.”
그래서 말씀하실 수 없다는 거고?
그게…… 뭘까. 폐하께선 대체 뭘 지키시려는 걸까. 그리고 그건 얼마나 중요한 것이기에, 폐하께서 필사적으로 지키시려는 걸까.
레온은 풀리지 않는 문제를 곱씹으며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꽤 먼 곳에서 왔나 보오?”
“아…… 예. 머물 곳이 없어 떠돌고 있습니다.”
“몸도 튼실한데, 아까운 인재로구만.”
노아는 노인의 말에 반응해 주는 척,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윌터 백작 소유의 영지들을 찾아 나선 지도 벌써 며칠이 흘렀다. 영지를 찾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으나 그곳에 머물고 있다던 리노 윌터를 찾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허탕을 친 터라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노아는 이번 마을도 헛수고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떠날 채비를 마쳤다.
“그러지 말고 용병에 지원해 보는 건 어떤가.”
그가 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노인이 노아를 향해 슬쩍 제안해 왔다. 그러나 노아는 더 이상 허튼 곳에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신분을 속이고 인간인 척, 노인을 향해 공손히 인사한 후 말없이 떠나려 했다.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보게, 젊은이! 그렇게 떠돌아다니다가 언제 정착할 텐가?”
“정착할 생각 없으니 괜찮습니다.”
“돈이 필요하지 않나? 마침 영주님이 사병을 모집하고 계시니 거기 한번 지원해 보는 건 어떤가.”
“영주님이라면…… 윌터 백작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지.”
“…….”
“여기 실질적인 영주는 그분의 아드님이잖아.”
설마 올리세스 윌터? 이쪽은 올리세스의 관할이었나? 놈이 승계 수업을 받고 있으니 그럴 가능성이 높다.
“윌터 남작님이 이곳에 자주 오셨습니까?”
“옳지. 남작님을 알고 있구만. 하긴 그래. 우리 영주님 소문이 제국 내에 퍼졌다고 그랬지.”
“…….”
“최근에 건실한 젊은이들을 꽤 양성하고 계시는 모양이야. 알다시피 우리 영주님이 사업에 수완이 좋으시거든.”
노인은 올리세스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영지민이 영주를 신뢰하는 건 영지 차원에선 좋은 일이었으나 제국의 입장에선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다. 영지가 독립적일수록 황실은 관리가 어려워질 테니. 특히 지금처럼 기틀이 완벽하지 않은 경우엔 더더욱.
“솔직히 폐하께선 우리 같은 자들에겐 관심이 없으시질 않나. 버려진 우리를 거둬 주신 건 윌터 남작님일세.”
“폐하께서 버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제도 내의 성전 출입도 금지당했네. 제국이 세워질 때 제도로 이주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고 있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노예제가 사라진 현재, 모든 영지민은 누구라도 자유롭게 제도로 드나들 수 있게 됐다. 특히 성전 출입을 금지당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곳이 성전인데.
“어르신.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건 아닙니까?”
“아닐세. 나도 몇 번 제도에 가려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네. 출입허가증이 없으면 제도에 들어올 수 없다더구만.”
“출입허가증이요?”
노아는 황당한 단어의 등장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출입허가증 같은 게 있을 리가. 각 영지마다, 그리고 제도 경계에 검문소와 비슷한 곳은 존재한다.
다만 그건 인간을 막기 위해서 세워진 게 아니라, 오히려 제도 내에 거주하는 인간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종족을 확인하는 용도로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검문 대상이 되는 이종족조차 출입허가증 같은 건 필요치 않다. 검문소는 신분과 방문 목적만 대면 통과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검문소는 누군가를 막기 위해 세워진 게 아니니까. 그 체계는 제도와 자신의 영지를 숱하게 오간 노아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 글쎄 출입허가증은 돈을 내고 살 수 있다지 뭔가. 우리 같은 돈 없는 사람들은 제도에 들어가는 건 꿈도 못 꾸는 셈이지.”
“그걸 제도 경계에 있는 검문소에서 확인합니까?”
“검문소? 아니, 아니. 거기까지 가 보지도 못했네.”
“그럼 어디서…….”
“우리 영지를 조금 벗어나면 곧장 마주하는 위병 말이네. 영지 경비를 서고 있는 그자들이 출입허가증을 요구하지 뭔가. 그들은 황실에서 파견된 황실 사람들이야. 나라의 녹을 먹고 일하는 자들이지.”
노아가 이 영지로 들어올 때만 해도 위병 같은 건 만나지 못했다. 그 얘기는 들어오는 사람은 잡지 않고, 나가는 사람만 잡고 있다는 소리란 건데……. 당연히 황실에서도 각 영지로 위병을 보낸 적이 없다.
용병과 사병을 모으고 있다더니 이런 약은 술수를 쓰고 있었군. 올리세스의 교활한 계략에 욕이 절로 나왔다. 이엘의 말처럼 서서히 인간들과 그녀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성전의 출입을 막아, 인간들이 신에게 의지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이 영지엔 성전이 따로 없습니까?”
“물론 있지. 우리가 영주님께 하소연을 했더니, 영주님이 힘을 써 주셨지 뭔가.”
“성전을 새로 지었나요?”
“그것뿐만 아니라 제도 내에서 사제님을 모셔 왔다네.”
“……사제님이요?”
“그래. 유일한 나자르 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수제자라고 하더군.”
이젠 가짜 사제까지 만들었나.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노아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고 말았다. 원초적인 본능을 건드렸군.
두려움과 공포뿐 아니라 현재의 팍팍한 삶을 견디지 못할수록 떠났던 신을 찾게 된다. 거기다 고립까지 시켰다면 두말할 것도 없지. 올리세스는 인간들의 미약한 심성을 악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르신. 그 성전이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저기 언덕을 넘어서면 곧장 보일 게야. 아주 커다란 건물이거든.”
생각보다 아주 작은 곳에서부터 야금야금 균열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기마다 각 영지로 세금 조사를 나갔던 관리들이 몇 있었지만, 이렇게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면 알아채기 어려웠으리라.
노아는 노인을 향해 정중히 인사하곤 그가 알려 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건지 멈칫하곤 뒤로 돌았다.
“어르신. 혹시 최근에 윌터 백작님이 이곳에 오신 적은 없으십니까?”
“아아, 백작님 말인가? 그렇잖아도 며칠 전에 오셨다가 어제 떠나셨다네.”
“어제요?”
“여기에 백작님의 별장이 있거든. 몇 달 전부터 그곳에 손님이 머물고 있어서 그 손님을 만나러 오셨던 모양이야.”
“…….”
“근데 그건 왜 묻나? 백작님이 오셨던 건 또 어떻게 기가 막히게 알았고?”
“아닙니다. 마을 정돈이 잘 되어 있어서 귀하신 분들이 오셨던 건지 궁금해서 여쭈었습니다.”
“뭐…… 귀하신 분들이라……. 그렇지, 귀하신 분들이긴 하지.”
노아의 말에 노인이 조금은 씁쓸한 듯한 미소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는 우리 모두 귀한 신분이었는데 말이야.”
“…….”
“자네는 나이가 어려 전쟁 이전을 잘 모르겠구먼. 전쟁이 터지기 전엔 인간이 이종족들보다 더 잘 살았다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제국이 재건된다기에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나 싶었더니……. 웬 형편없는 여자가 황제가 되는 바람에 더 살기 어려워졌어.”
“…….”
“하루가 멀다 하고 침실엔 남자만 들인다더니, 아주 무능하고 멍청한 여자야.”
노아는 솟구치는 화를 겨우 억누르며 가벼운 묵례 후 그 자리를 떠났다.
무능하고 멍청하다고? 그 어떤 수식어도 저것들만큼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도 없을 것이다. 노아는 성큼성큼 걷던 걸음을 멈추고 깊은 한숨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봤다. 진실을 확인하는 것 따윈 집어치우고, 그냥 백작 소유의 영지를 전부 불태워 버리면 안 되나……. 그런 생각을 짧게 했다가 고개를 흔들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일단은 리노 윌터의 존재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