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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29화 (329/488)

329화

그녀의 주변에서 뛰놀던 어린 독수리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하지만 독수리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레온은 이엘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었다가는 조금 전에 다짐했던 것들이 소용없어질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한 탓이었다.

“나와는 말도 섞기 싫은 거야?”

저런 말은 반칙이었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널 싫어해. 너와 말 한 마디 더 섞고 싶어 괜히 주변만 어슬렁거리고, 관심받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네 시선이 있는 곳을 따라다니는데. 내가 어떻게 널 싫어해.

넌 모른다. 하다못해 어린 테르라도 되면 네게 편히 다가갈 수 있을까, 그딴 하찮은 고민이나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너는 몰라.

“예정보다 빨리 돌아가기로 했다면서? 르네에게 들었어.”

“예. 오후쯤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 얘긴 끝까지 내 얼굴은 안 보고 떠날 생각이었단 거네.”

“…….”

“알겠어. 조심히 돌아가도록 해. 곧 후작의 영지에서 다시 보지.”

결국 이엘도 더는 대화를 잇지 못하고 돌아섰다. 어떤 식의 말도 서로에게 남아 있는 입장 차이를 좁혀 주지는 못할 테니까. 이엘은 레온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고, 레온은 그녀를 향한 마음을 접을 수 없다.

하지만 돌아서 걷던 이엘이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레온을 향해 뒤돌았다.

“그래도 포필렌은 안 돼. 더는 복용하지 마.”

“…….”

“레니. 내가 네 영지에 가면 침실에서 네가 잠들 때까지 머무를게. 그렇게 해서 네가 편히 잘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럴 의향이 있어.”

“폐하.”

“너와 동일한 마음으로 네 곁에 머무를 순 없지만……. 그래도 내겐 네가 소중해.”

“…….”

“감정의 종류가 달라도, 그 크기는 똑같아. 내가 널 생각하는 마음은 너와 다르지 않다고.”

울고 있지 않은데도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는 눈물에 잔뜩 젖은 것처럼 들렸다. 결국 레온은 긴 한숨을 쉬며 엷게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어, 나타니엘.”

“…….”

“네 마음이 얼마나 따뜻하고 다정한지. 나도 안다고.”

“레니.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응, 괜찮아.”

“…….”

“괜찮아, 정말. 무조건 괜찮아. 당연히 괜찮아. 어떤 식으로든…… 너는 다 괜찮아, 나타니엘.”

내가 고집을 부렸어. 내가 이기적이라서 고집을 부렸어, 엘……. 그렇게 말을 끝낸 레온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건 친구로서 안는 거야.”

“……응.”

“네가 내게 갖고 있는 감정과 비슷한 종류의 감정으로. 그냥 울고 있는 널 위로할 방법이 이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어서.”

“……안 울어.”

“응, 알아. 그래도.”

“…….”

“그래도 그냥 널 위로해 주고 싶어서.”

멍청하다. 위로는 내가 받아야지. 마음을 거절당한 건 자신인데, 레온은 도리어 그녀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그런 스스로가 멍청하고 바보 같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거짓 감정을 앞세워서라도 이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수만 있다면, 레온은 앞으로도 쭉 거짓 감정으로 위장하며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폐하. 이제 더는 제게 마음 쓰지 마세요.”

“레니.”

“해야 할 일이 많잖아요. 그곳에 집중하세요.”

레온은 여전히 다정했다. 다정과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여전히 이엘에게만은 다정했다. 이엘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레온의 품에서 떨어졌다.

“알겠어. 조심히 돌아가. 레니.”

“예. 폐하께서도 몸조심하세요.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 저를 부르시고요.”

“응.”

“러셀 후작에게 들었어요. 뱀이 독과 해독제를 폐하께 드렸다고.”

일라이저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레온의 마음은 아쉬움과 서운함으로 뒤덮였다.

“제가 드릴 수 있어요. 로빈의 해독제보다 더 효능이 좋고, 효율이 좋은 치료제를.”

“레니. 안 돼.”

“제 갈기를……,”

“안 된다고.”

그러나 이엘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 냉담한 거절이 레온은 고마운 한편, 서운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갈기가 네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데, 그걸 나한테 준다고? 싫어. 안 돼. 필요 없어.”

“폐하.”

“다치지 않을게. 약속해, 위험한 일 하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네 갈기를 주겠다는 말은 하지 마.”

네 갈기를 지키겠다고 나는 내 스스로를 사지에 몰아넣었어. 네게서 갈기를 가져갈 수 없어서 나는 나를 포기했었단 말이야. 이엘은 절대로 말할 수 없는 그 말을 꾹 눌러 삼켰다. 동시에 참담한 생각이 들어 잠깐 고개를 숙여 감정을 추슬렀다.

하지만 제 머리 위로 쏟아지듯 털어놓는 레온의 고백에, 그녀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폐하. 제 갈기 가져가셔도 돼요. 전 어차피 영존하지 못해요.”

“레니.”

“이미…… 어렸을 때 많이 뽑혔거든요. 그래서 다른 우논들처럼 영원히 사는 건 불가능해요.”

“…….”

“그러니까 고작 조금 남은 이깟 갈기. 몇 안 되는 갈기는 폐하께 드릴 수 있어요.”

타이곤의 갈기는 아주 특수해서, 뽑히는 순간부터 우논의 생명을 갉아먹는다. 갈기가 있는 개체는 없는 개체보다 강하지만, 그 갈기는 일정 부분 뽑히면 되레 개체를 약하게 만드는 양날의 검이었다. 생명의 빛을 잃게 되는 타이곤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다가 끝내 죽고 만다.

레온은 연구소에서 태어났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탈출하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갈기를 뽑혀 왔다. 성체가 된 뒤로 본체화를 해 본 적이 없어, 제 갈기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가늠할 순 없지만 적어도 반 이상은 없을 것이다.

“제가 뱀보다도 못한 건 싫어요.”

“갈기가 없어도 넌 내게 로빈보다 중요하고 소중해.”

“알아요. 그건 당연한 얘기고요.”

그의 농담에 이엘이 오랜만에 웃었다. 그러나 표정이 곧 어두워졌다. 레온은 그게 싫어서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잡고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

“지금 말고. 나중에 폐하께서 필요하면요.”

“…….”

“언제든 제게 말해 주세요. 네?”

“레온.”

“필요할 상황이 오지 않으면 정말 좋겠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그녀의 곁엔 나자르가 늘 머물고 있고, 그의 성력은 자신의 갈기 따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 하지만 성력이 먹히지 않거나 이엘의 곁에 오드가 없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레온은 그렇게 해서라도 제 쓸모를 보여 주고 싶었다.

“약속해 주세요, 폐하.”

“…….”

“꼭, 제가 필요해지면 말해 주세요, 전 폐하께 제 목숨도 드릴 수 있으니까요. 이런 말 하면 폐하는 싫어하겠지만.”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갈기를 지켜 줄 거라고 다짐하는 이엘과, 제 갈기를 희생해서라도 그녀를 지켜 낼 거라고 다짐하는 레온 사이에, 여전히 간격이 존재했다. 그 입장 차이는 영원히 좁혀지지 않겠지.

“그런 상황이 오지 않게…… 내가 최선을 다할게. 레온, 난 늘 안전한 곳에 있을 거야. 네가 걱정하지 않게.”

“그럼 더 감사하고요.”

내 갈기……. 남들은 그렇게 갖고 싶어 안달이 나는데, 정작 내가 주고 싶은 너는 받기를 거절하네. 겨우 내 쓸모를 찾았나 했더니……. 레온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누군가로 인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 용이 왜 갈기를 가지러 내 영지에 왔던 거지? 밀로라고 했던가? 감히 내 영지에 들어와 로의 갈기를 가져가려 했던 놈의 이름이.

“폐하.”

“응?”

“밀로라고 했던 그 용 말인데요.”

“미르? 미르가 왜?”

“그놈은 왜 갈기가 필요했던 겁니까?”

“…….”

“혹시 그놈이 자기 종족에게로 돌아간 이유에, 그것도 관련이 있습니까?”

용은 단 한 마리의 존재로도 엄청난 아군이 될 것이다. 그런 용이 중요한 시기를 앞두고 제 종족에게로 돌아가 버렸다. 암컷들과 달리 그쪽 수컷들은 종족 내에 문제 같은 건 전혀 없었을 텐데. 그토록 아끼던 이엘을 위험한 땅에 두고 떠나 버렸다? 뭔가 이상했다.

“그때 제 영지에 몰래 침입해서 로의 갈기를 가져가려 했던 이유. 폐하께서는 알고 계세요?”

그 용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은 이엘뿐이었다. 그러나 이엘은 용과 나누었던 이야기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폐하.”

“짐과 그대는 신뢰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딱딱한 말투로 돌아간 그녀가 여태 드러냈던 감정을 죽이고 무감한 듯한 낯으로 이어 말했다.

“거짓말은 하기 싫으니, 다 말하지는 않을 거야.”

“…….”

“맞아. 미르가 종족에게로 돌아간 것에 타이곤의 갈기도 엮여 있어.”

밀로의 종족이 이온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심지어 그 이온을 깨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늑대의 기름, 타이곤의 갈기, 독수리의 눈알이라는 것까지 알게 됐다. 필사적으로 쌍둥이 오빠를 지키려는 그녀의 모습을 눈치챈 밀로는, 제 종족이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막겠다며 동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버렸다.

“미르는 아마 돌아오지 않을 거야.”

“…….”

“돌아온다고 해도 꽤 시간이 걸릴 테고.”

내가 죽은 뒤에 올지도 모른다는 헛소리까지 하고 갔으니까. 이엘은 수다쟁이 용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제가 그 용에게 갈기를 줬더라면, 그가 떠나지 않았을까요?”

레온의 말에 이엘은 작게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갈기 때문만이 아냐. 큰 이유는 나 때문이야. 나를 지키려고 떠났어, 미르는.”

“…….”

“그냥 내 옆에만 있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

“언제나 내 편이 되어 달라고, 언제까지나 내 옆에 있어 달라고 했는데. 그 애는 날 지키겠다며 떠나 버렸어.”

잡을 수 있었다. 가지 않아도 되니까 내 옆에 있어 달라고, 밀로의 손을 잡고 매달릴 수 있었다. 매달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참 이상해. 이종족은 지키고 싶은 게 생기면 자신을 성장시키지만, 인간은 지키고 싶은 게 있으면 타인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게.”

이온의 존재를 숨겨야 해. 용들이 그의 존재를 알아서는 안 돼.

그 두려움이 밀로를 붙잡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 푸른 용은 그녀가 저를 잡아 주기만을 기다렸는지도 모르는데……. 이엘은 밀로의 희생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등 떠민 셈이었다.

“그러니 나는 밀로를 찾을 자격도 없는 거야.”

“…….”

“그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할까? 그만 돌아가자, 레니.”

“예, 알겠습니다.”

레온은 앞서 걷는 이엘의 뒤를 따르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갈기가 엮여 있고, 그녀의 안전이 엮여 있어 동족에게로 돌아갔다고……. 그건 무슨 의미일까. 용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나? 그들이 있는 곳에선 치료제를 구할 수 없어, 타이곤의 갈기가 필요했던 건가? 그때도 그렇게 말했었지. 고향에 아픈 친구가 있어서 필요하다고.

그러면 이엘의 안전은? 그게 왜 그녀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 되는 거지? 혹시 놈들이 밀로에게 이엘의 목숨을 빌미로 갈기를 요구했던 건가?

그거라면 이해가 간다. 용은 자신들이 살던 곳을 벗어나면 서로 힘과 능력이 비슷해진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서식지에서는 힘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겠지. 노아에게 듣기로 밀로라는 놈은 용의 우두머리쯤 된다고 했으니, 이곳에서 동족을 상대하는 것보단 돌아가서 그들을 막는 게 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좀 찜찜해.”

“응?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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