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사실 확신을 갖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이엘이 뱀의 영지에서 탈출하며 퍼뜨렸던 화마는 로빈이 갖고 있던 자료실과 연구실을 목표로 번져 갔으니까. 아마 그녀의 목표는 1제국의 연구 자료를 없애 버리는 것이었을 테지.
그래서 도박을 걸었다. 일부러 뱀을 시켜 종이들을 눈에 띄게끔 내보냈던 것이다. 그녀의 동맹들 중 누군가가 그 내용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이엘에게 갖다주길 바라면서. 그 금서는 제 가설에 힘을 실어 줄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었으니까.
종이를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로빈이 끊어졌던 설명을 다시 이어 갔다.
“폐하께선 똑똑하시니 그 종이에 맞는 금서를 찾기 위해 도서관에 가실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 종이에 적혀 있는 내용들은 제법 중요한 것들이었으니까. 혹은 나자르인 오드 님이 날 찾아오든가.”
“하지만 두 분 다 당신을 찾아가지 않았고요.”
“맞아. 내가 그 책을 기증하고 시간이 꽤 흐른 지금까지도, 두 분은 그 책에 관해 내게 언급하신 적이 없소.”
“…….”
“그건 곧 두 분이 이 종이의 존재를 아예 몰랐거나, 혹은 알고 있어도 이 종이의 내용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네.”
“폐하께서 알고 계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드 님은 이 종이를 알고 계십니다. 여태 보관하고 계시던 분도 오드 님이니까요.”
“…….”
패티스의 대답에 로빈이 짧게 침묵했다. 나자르는 알고 있었다고? 오드가 알고 있는데 이엘이 모를 리 없다. 그 생각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럼…… 쓸모없는 내용일 수도 있겠군.”
“이 종이엔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까?”
“백작은 어디까지 추론했소?”
“겨우 이 한 문단도 채 되지 않는 문장으로는 추측할 수 있는 내용이 적습니다. 그저 여기 빈 부분을 ‘독수리’의 눈알 정도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래, 맞아. 그 부분은 독수리가 맞지.”
“…….”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외의 부분은 나도 알지 못하오.”
“예?!”
패티스가 소리를 지르듯이 외치고는 허탈한 표정으로 로빈을 쳐다봤다.
“나도 그걸 확인하고자 이 종이가 원래 붙어 있었던 금서를 황궁에 기증했던 거였소. 폐하와 나자르께 묻기 위해.”
“참…… 허탈하기 짝이 없는 결과네요.”
“이 종이는 처음부터 훼손되어 있었소.”
“…….”
“누군가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훼손시킨 것처럼.”
로빈이 처음 그 책을 발견했을 때부터 특정 페이지 몇 개가 찢겨져 있거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페이지에 더 집중하고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누군가의 손을 탔다는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불에 탄 종이의 원본은, 적어도 이것보다는 더 많이 적혀 있었지.”
그 말과 함께 로빈은 옷 속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허무함에 잠깐 넋이 나갔던 패티스도 뱀이 적는 종이에 다시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글자 적기를 다 마친 로빈은 불에 그을린 종이와 조금 전에 자신이 쓴 종이를 동시에 패티스에게 내밀었다.
“제물로 쓰일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 줄부터 다르다. 원래 종이엔 ‘세 가지가 필요하다.’만 적혀 있었는데, 그 앞에 내용이 더 있었구나. 패티스는 빠르게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다시 글씨를 읽었다.
“생명을 살리는 일. 혹은 그 생명을 유지하는 일. 모든 것에는 마땅한 희생이 필요하며, 생명은 생명으로 치환되는 것 외에는 어떤 해답도 찾을 수 없다…….”
“그것도 완벽한 문장과 문단은 아니오. 찢어지고 지워진 흔적이 있어서 추측하여 채워 놓은 거니까.”
생명을 살리는 일. 생명을 유지하는 일.
이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다. 고유한 신의 영역…….
“……역시 이건 나자르인의 책이군요.”
“나자르의 것만이 아니오. 동시에 다른 존재가 주체가 되기도 하지.”
“다른 존재라면…….”
“폐하께서 만나신 ‘그’.”
“…….”
“‘그’는 신의 대척점에 서 있는 가장 악하지만, 또 가장 강한 자요. 내가 기증한 그 책은 나자르와 ‘그’의 관한 내용을 다룬 책이었소.”
중간중간 소실되고 훼손된 부분들은 전부 ‘그’에 관한 내용이었다. 신성제국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가장 악하고 해로운 존재. 아마 누군가 ‘그’에 관한 내용만 전부 지워 버렸던 거겠지. 원본의 내용이 얼마나 심도 있게 다루고 있었는지까지는 로빈도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그 세 가지는 제물을 뜻하오.”
“…….”
“신께 바치든, ‘그’에게 바치든.”
“…….”
“존재할 수 없는 자들을 불러들이는 도구로 쓰이는 제물.”
패티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들고 있는 종이에 시선을 박았다. 제물……. 제물이라니. 렉토스가 말한 실험 재료라는 단어보다 더 무서운 단어였다. 그렇게 한참 종이만 들여다보던 패티스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내려놓고는 로빈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설마 이게…… 선황이 악마를 숭배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일단 내 추측은 그렇소.”
“…….”
“내가 일부러 렉토스를 그대들에게 풀어 주었다는 건 눈치챘겠지. 나도 렉토스가 말한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오. 내가 협력해 달라고 말해 봤자, 그대들이 내 말을 들어줄 리 없으니. 우린 동맹관계가 아니잖아.”
“…….”
“렉토스란 자는 리노 윌터에게서 여러 정보를 들었다고 했지만, 사실 리노 윌터는 수년 전에 이미 죽었거든. 근데 렉토스는 리노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단 말이지. 그러면서 풀어놓은 정보들이 전부 허무맹랑한 것들뿐이라, 내가 어찌 믿을 수 있었겠소. 나로서도 확증이 필요했을 따름이오.”
하지만 올리세스의 영지에 리노가 정말로 살아 있다면……. 렉토스의 말처럼 선황과 ‘그’, 그리고 제물. 그 외 여러 가지 가설들에 신빙성이 더해질 것이다. 그제야 패티스도 맥락을 이해했다.
“그럼 이 책은 폐하의 아버지였던 선황이 ‘그’를 소환하는 데에 사용하려고 했단 말씀이군요.”
“그렇지.”
“……생명을 살리는 일, 생명을 유지하는 일. 모든 것에는 마땅한 희생이…….”
로빈의 글씨를 조용히 되뇌던 패티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곤 저가 생각해도 기가 차다는 듯 고개까지 설레설레 저으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생명을 유지하는 일.”
“…….”
“……설마 불사를 노렸다는 겁니까?”
“아마도.”
“죽지 않기를 바랐다고요……?”
미쳤군. 제대로 미쳤어……. 생명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연히 죽어야 하는 목숨까지도 제 마음대로 하려 했다는 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원을 신께서 들어주실 리 없으니, 선황의 소원이 향한 곳은 ‘그’였겠군요.”
“…….”
“……그리고 그 제물은 폐하.”
나타니엘. 그 어린 황녀가 제물이었군. 맙소사……. 패티스는 무너지듯 소파에 털썩 앉고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곤 혼잣말을 하듯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그’를 만난 게…… 우연은 아니었던 거군요.”
“맞아. 선황이 ‘그’를 만났기 때문에 폐하께서도 만나신 거요.”
선황의 죄가 대물림되듯 이엘에게도 떠넘겨진 것이다.
“낙담하진 마시오.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니까.”
“…….”
“렉토스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잖소? 그럼 우리의 이 쓸데없는 추론은 다 거짓으로 돌아가는 거요.”
“…….”
“가령 리노 윌터가 살아 있지 않다면. 예전에 죽은 게 확실하다면, 오늘 이야기는 백작도 나도 그냥 없던 일로 넘겨도 될 거요.”
그러니 노아에게서 어떤 소식이든 전해지기를, 로빈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독수리의 영지는 자신의 영지와 달랐다.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해도, 제 종족인 호랑이와 사자는 여전히 게으르고 굼떴다.
그에 비하면 독수리들은 어느 곳을 가도 활기찼고 웃음이 넘쳤다. 그야말로 살아 숨 쉰다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그런 종족과 영지라고 레온은 생각했다.
영지 안에 있는 성전도 마찬가지였다. 뭐든 큼지막하기로 유명한 곳이 제 영지였는데, 성전의 크기만큼은 독수리의 것을 이기지 못할 듯싶다. 저 정도면 작은 테르는 날아다닐 수도 있겠는데……. 뱀의 습격 이후 새로 지었다더니, 공작성보다 더 화려하고 크게 지었나 보네.
레온은 눈앞에 우뚝 선 성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근처에서 들리는 익숙한 웃음소리에 고개를 그쪽으로 빠르게 돌렸다. 저 풀숲 너머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제 귀를 계속해서 간지럽혔다.
“잠깐만 보고 갈까.”
원래는 이엘이 르네의 영지를 떠날 때 레온도 제 영지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날 있었던 그녀와의 작은 마찰 이후로 레온은 이엘을 제대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고, 결국 예정보다 이르게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풀숲을 헤치고 들어가면 아주 오랜만에 이엘을 보게 되는 셈이다.
“보지 않고 떠나는 게, 미련을 버리는 빠른 길일 텐데…….”
안다. 아는데도…….
보고 싶어서. 네가 있는 곳에 나도 있고 싶어서. 네가 웃는 모습을 보고, 나도 함께 행복해지고 싶어서……. 그렇게 생각을 덧대던 레온은 자신이 아주 큰 욕심을 부렸던 것임을 인정했다.
그래, 맞지. 이게 내 위치에 맞아. 그냥 지금처럼 이엘의 뒤에 서서 그녀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나와 어울려. 그러니까 더는 욕심내지 말자. 내 마음을 표현하지도 말자. 그녀에게…… 이엘에게 부담을 주지 말자……. 갈등하던 제 마음을 씁쓸하게 정리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멀리서 보고 먼저 영지로 돌아가자…….”
레온은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그리며, 주저하던 발을 떼고 웃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명중이에요, 폐하!”
“와! 과녁에 정확히 꽂혔어요!”
“최고예요, 폐하!!”
“그렇게 추켜세워 주지 마. 민망해.”
어린 독수리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아……. 그때와 비슷하구나. 내 영지에서 어린 테르들과 함께 글자 공부를 하던 그때의 오헬과.
그날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습기 짝이 없는 짓을 벌였다. 정체를 감추려고 답답함을 무릅쓰고 검은 가면을 내내 쓰고 있었는데, 그 노력이 무색하게 바닥을 뒹굴면서 가면을 떨어뜨려 어이없게 정체를 들키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때가 레온에겐 너무 소중했다. 제 영지에 그녀가 머물렀고, 이엘과의 거리가 한없이 가까웠던 그때가…… 제겐 너무 소중했다. 지금의 자신은 꿈도 꾸지 못할 거리라서.
“레니?”
듣기만 해도 가슴을 뛰게 하는 목소리에 레온은 정신을 번뜩 차렸다.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고개를 힘겹게 들어 올렸을 땐, 이엘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다정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레니.”
“…….”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