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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27화 (327/488)
  • 327화

    그러니 이 상황이 되레 불편해진 건 로빈이다. 피차 속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이니, 첫 만남에서 기를 눌러 줄 생각이었는데. 역시 만만치 않다. 2차 전쟁 직전에 만났던 그 어린 세쌍둥이 왕자의 티를 완전히 벗었군. 로빈은 속으로 혀를 차곤 찌푸리던 인상을 폈다.

    “그새 많이 달라진 듯하오. 예전에 보았던 핏덩이의 태도 다 벗은 듯하고.”

    “지키고 싶은 게 있으면 우논은 성장한다고 하지요.”

    “…….”

    “아시다시피 저흰 폐하께 맹목적인 터라.”

    그러니 이엘을 걸고넘어지는 말장난은 그만두라는 뜻이다. 마냥 어리게만 생각했던 하이에나가 주는 압박에 로빈은 흉흉하게 날을 세웠던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어차피 여기 온 이상, 자신도 이놈들에게 얻어 가야 할 것들이 있었으니까.

    로빈은 자신이 뜬금없이 이 제도로 불려 오게 된 과정을 천천히 되짚었다. 이엘이 제 영지를 떠나 독수리의 영지로 가면서 노아는 올리세스 윌터의 영지로 방향을 바꿨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아가 정말 그곳에서 리노 윌터를 발견한다면, 그 늑대는 분명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그날 밤에 노아에게 했던 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내기 위해. 어떻게든 접선을 해 오겠지. 리노를 만나 대화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 자신의 정보에 매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 되면 리노 윌터가 정말 살아 있다는 뜻이 된다. 로빈이 온갖 금서와 렉토스 리히만으로부터 알아낸 정보들을 총망라하여 추측한 가설들이 사실이 되는 셈이었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노아에게서 무슨 소식이라도 전달되기를.

    ‘각하. 서신이 왔습니다.’

    ‘노아?’

    ‘아닙니다. 하이에나입니다.’

    ‘뭐? 하이에나가 왜…….’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소식은 뜬금없는 제도로부터 도착했다. 하이에나란 이름이 달갑지 않았던 터라 로빈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서신이 담긴 봉투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그 어린 잔챙이들은 2차 전쟁 때나 필요했지, 이제 와선 별 쓸모도 없는 종족인데. 이엘의 옆에 들러붙어 먹을 게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한심한 종족이 하이에나였다. 그렇게 평하며 로빈은 내용물을 보지도 않고 버리려다가, 바랜 종이의 색이 낯익어 쓰레기통 바로 앞에서 멈칫했다.

    ‘설마…….’

    로빈은 접힌 종이를 천천히 펼쳐 읽어 내려갔다. 봉투 안엔 그 빛바랜 종이 한 장뿐이었다. 편지는커녕 상황 설명조차 없는 불친절한 소식지였음에도, 로빈은 소환되듯 이곳 제도로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마치 재단하듯 패티스를 위아래로 훑고는 떨떠름히 물었다.

    “정말…… 백작이 날 부른 것이오?”

    “물론입니다, 각하. 저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그럼 백작의 지금 이 행동. 나를 홀로 제도로 불러들인 이 행동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오?”

    “그 또한 당연한 말씀입니다. 저는 폐하께 거짓을 고한 적이 없답니다. 그런 부분에선 공작님과 다르지요.”

    와, 아까부터 둘 다 장난 아니네……. 뒤에서 패티스와 로빈의 입담을 줄곧 지켜보던 앤디는 경악하듯 입을 쩍 벌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 저렇게 만나냐.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쏙쏙 빨리는 듯한 화법에 진절머리가 났다. 난 절대로 저 두 사람과 말로는 싸우지 말아야지…….

    “…….”

    “…….”

    아주 잠깐의 정적이 오가는 동안에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을 둘러싼 늑대들과 하이에나들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잔뜩 긴장한 채였다.

    로빈이 혈혈단신으로 제도에 온 것처럼 보여도 뱀은 은신이 가능하니 저 어딘가에 숨어 있는 놈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전쟁을 할 거라면 수적으로 우세한 지금이 제일 적합할 텐데…….

    “걱정 말게.”

    그러나 먼저 분위기를 환기시킨 건 로빈이었다. 그는 피곤한 듯 제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패티스를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혼자 왔으니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다고.”

    “정말이십니까?”

    “하이에나가 미쳤다고 폐하의 허락도 없이 나를 죽이겠는가?”

    “…….”

    “보낸 서신의 의미를 아주 잘 이해했으니 혼자 온 것이오. 백작이나 나나 피차 서로에게 물어볼 게 많은 듯하니까.”

    로빈의 말처럼 이쪽은 이엘의 허락이 없이는 뱀을 죽이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절대적으로 로빈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자신을 보호할 뱀을 우르르 데려왔어도 패티스는 그들을 제도로 맞아야만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면.

    “괜한 신경전은 원치 않소. 이곳에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할 만큼 여유롭지도 않고.”

    “그럼 인사는 이쯤 하고 들어가셔서 말씀 나누실까요?”

    “그렇게 하지.”

    로빈은 여유로운 성격이 아니었다. 언제 노아가 자신의 영지에 찾아올지 모르는 판국에 제도에서 긴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로빈에겐 이 금서만큼이나 리노 윌터의 생사 여부도 중요했으니까.

    로빈이 먼저 신경전을 접으니 패티스도 주변에 있던 하이에나들과 늑대들을 뒤로 물렸다. 그러곤 순순히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순식간에 첨예하게 대립하던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지켜보던 앤디만 머쓱해졌다. 진작 저렇게들 나오시지, 하여간 성질머리들하고는. 쯧.

    “앤디 경.”

    “예?! 끅!”

    별안간 패티스에게 제 이름이 불리자, 속으로 두 사람을 비난하던 앤디는 깜짝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괜찮은 건가?”

    “예, 괜찮, 끅! 습니다. 끅!”

    “…….”

    “저, 정말 괜찮습, 끅! 괜찮습니다!”

    패티스는 한쪽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혀를 찼다. 저래서 무슨 기사단의 부단장을 한다고…….

    늑대들은 하이에나가 근위대를 맡는 것에 큰 불만을 표했었다. 이엘의 곁을 지키는 종족은 응당 자신들이 되어야 한다며. 하이에나들은 전체적으로 연령대가 어린 우논들이 많았기 때문에 전쟁 경험이 적었다. 게다가 강했던 건 암컷인데, 남은 수컷들은 전력이 되기 어렵지 않냐며.

    하지만 패티스의 눈엔 그쪽이나 이쪽이나 매한가지다. 그 눈빛을 읽은 건지 앤디가 조금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얼른 화제를 바꿔 버렸다.

    “뭐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후원엔 아무도 출입하지 말라고 명해 두게.”

    “후원이요? 갑자기 후원은 왜…… 아. 알겠습니다.”

    그래도 눈치는 빠른 모양이군. 앤디는 자신이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그는 로빈을 향해 가볍게 묵례하곤 빠르게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최근 들어 후원엔 피시와 로날드, 그리고 스완이 자주 드나들었다. 피시와 로날드는 그렇다 쳐도 백조의 존재는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 특히 이엘과 계약으로 목숨이 이어져 있다는 건 절대로. 그러니 스완에게 침실 밖으로는 절대 나오지 말라는 말을 전하라는 뜻이었다.

    “폐하의 후원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곳이 아니었던가?”

    우아하게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로빈이 넌지시 물었다.

    “오랜만에 제도에 온 김에 들러 보고 싶었는데.”

    “며칠 전에 후원에서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곧 보수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라 미리 막아 둔 것이니, 공작님께선 영지로 돌아가시기 전에 들르셔도 됩니다.”

    “…….”

    “말씀하신 대로 폐하께선 후원의 출입을 모두에게 허락하셨으니까요.”

    빈자리에 앉은 패티스가 차를 마시며 부드럽게 대답해 주었다. 다행히 로빈은 흥미가 떨어진 건지, 더는 후원을 언급하지 않았다.

    패티스는 들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고는 품에서 낱장의 종이를 꺼내 로빈의 앞으로 내밀었다. 앤디가 오드의 방에서 훔쳐 온 문제의 그 종이였다.

    “이게 무슨 종이인지 알아보시겠지요.”

    “글쎄.”

    “제가 공작님께 보냈던 그 종이와 같은 책에 있던 내용입니다.”

    “…….”

    “시간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차피 공작님이나 저나, 다 내용을 알고 있는 듯한데요. 공작님도 금서를 알고 계시니 이곳에 온 것 아닙니까?”

    패티스는 시간을 들먹이며 로빈의 대답을 종용했다. 로빈은 제 앞에 내밀어진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모르겠는가. 패티스가 제게 보낸 종이와 저 불에 그을린 종이가 있던 금서를 몇 번씩 읽었던 게 자신인데.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 알려 주십시오.”

    “그걸 내가 알려 줘야 하는 이유는?”

    로빈은 몸을 살짝 옆으로 기댄 채 흥미롭다는 듯, 패티스를 바라보며 웃었다.

    “공작님도 이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셨던 것 아닙니까?”

    “…….”

    “일부러 황궁 도서관에 금서를 갖다 놓은 것. 그것도 다 공작님께서 하신 일이잖습니까. 누군가 이렇게 알고 접근해 오길 바라면서요.”

    “하지만 그건 백작이나 늑대 같은 자들이 아니었소.”

    “…….”

    “폐하나 나자르가 알아차려 주길 기다렸지.”

    몇 년 전, 이엘이 뱀의 영지를 탈출하면서 그녀의 동맹군이 습격했을 때. 로빈의 지시를 받은 뱀 몇 마리가 중요한 서류를 들고 대피했다. 하지만 개중 대부분이 죽었고 로빈의 손으로 온전히 돌아온 자료는 몇 없었다.

    그리고 그 종이도 그때 사라진 것이다. 세 가지 제물이 적혀 있는 종이.

    “시작하기에 앞서, 백작은 내게 거짓을 고했을 텐데. 폐하께선 내가 제도에 온 줄 모르시지 않나?”

    로빈의 날카로운 지적에 패티스가 엷게 웃었다. 처음부터 속이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금세 들통날 줄이야.

    “맞습니다. 섣불리 다 말할 수 없어 거짓을 고한 점, 용서해 주시지요. 공작님의 말씀처럼 폐하께선 지금 이 상황을 알지 못하십니다.”

    “현재 우리 뱀은 폐하의 가장 큰 적수 중 하나이지 않나? 근데 백작이 이렇게 마음대로 나를 제도 내에 들였다는 걸 폐하께서 아시면 가만히 계시지 않을 텐데.”

    “폐하께선 제도 내의 모든 권한을 제게 주고 떠나셨습니다.”

    “…….”

    “그건 곧, 저의 판단과 선택을 믿는다는 말씀이시지요.”

    동시에 면책권을 준 것과도 같다. 패티스를 믿기 때문에 그녀가 없는 동안 그가 무슨 일을 벌이더라도, 이엘은 패티스를 책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언의 약속인 셈이었다.

    “그럼 오늘 여기서 나눈 대화를 폐하께도 전할 생각이오?”

    “물론입니다. 저를 신뢰하는 폐하께 거짓을 품을 생각은 없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금은 말하지 못했지만. 이엘이 돌아오는 날,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녀에게 다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어린 하이에나의 눈동자에서 그런 총명함을 엿본 로빈은 비뚜름하게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며 말꼬를 텄다.

    “좋소. 백작이 말했던 대로 나는 일부러 그 책을 황궁 도서관에 기증했소.”

    “…….”

    “이 종이를 가지고 간 게 폐하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로빈은 조금 전에 패티스가 내밀었던 종이를 집어 들고 팔락거렸다. 늑대의 기름, 타이곤의 갈기, 누군가의 눈알로 시작하여 내용의 대부분이 불에 그을린 그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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