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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26화 (326/488)

326화

*

“폐하. 신경 쓰이십니까?”

“응, 조금.”

하트의 물음에 이엘은 들고 있던 병 두 개를 짐 안에 넣어 두었다. 그러곤 의자에 앉아 하트를 향해 살짝 고갯짓을 했다.

“하트. 와서 머리 좀 말려 줘.”

“예.”

타월을 들고 다가간 하트는 능숙하게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렸다. 이엘은 그의 손길을 받으며 작게 웃었다. 하트는 생긴 것과는 달리 의외로 섬세한 구석이 있어, 그의 시중을 받는 게 싫지 않았다. 이엘은 두 다리를 의자에 올려 쭈그려 앉은 모양새로 키들거렸다.

사실 하트도 티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웃고 있었다. 처음엔 서로가 서로에게 사무적인 관계였을 뿐인데, 어느샌가 정말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이에겐 보여 주지 않는 모습을 공유하게 됐다.

“하트. 집에 가고 싶진 않아?”

졸린 듯 웅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타월을 움직이던 하트의 손이 멈췄다. 그러다가 다시 느릿하게 머리카락을 두드리며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제 집은 폐하의 곁입니다.”

“그 말이 묘하게 좋네.”

“거짓이 아닙니다.”

“응, 알아.”

“…….”

“내겐 오빠가 한 명 있었거든. 쌍둥이 오빠.”

“예. 알고 있습니다.”

“경을 보면 이상하게 내 쌍둥이 오빠가 떠올라.”

“…….”

“전혀 닮지 않았는데.”

이엘이 웃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졸음에 먹힐 듯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하트에겐 더할 나위 없이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그는 이엘이 속 시원히 이야기할 수 있도록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뗐다. 그러곤 화로에 장작을 더 넣어 침실을 따뜻하게 데웠다.

“정말로 그대와 있으면, 그때가 떠올라. 오빠가 이곳 땅 위에 있을 때 느꼈던 안락함 말이야.”

“…….”

“물론 경은 인간 남자를 싫어하니 내 말이 불편할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하트는 이엘의 목 뒤와 무릎 뒤에 팔을 넣어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러곤 푹신한 침대 위에 눕혀 준 뒤 이불을 목까지 덮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엘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다. 아까부터 기분이 좋은 듯싶더라니, 술기운이었나 보군. 조금 전 저녁 식사 때 마셨던 와인의 취기가 이제야 도는 듯했다.

이엘이 저렇게 취할 정도로 독한 와인을 마신 건 처음 봤다. 원래도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고, 마신다고 해도 갈증을 해소할 정도만 취급했으니까. 술에 취하면 헛소리를 할지 모른다며, 이엘은 늘 적당한 선에서 가볍게 즐기기만 했다.

또 모르지. 늑대 공작의 앞에선 자주 드셨을지도. 그러나 적어도 자신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나를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여겨도 되는 걸까. 하트는 답지 않게 많은 생각들을 하며 그녀의 침실 정리를 마쳤다.

“미안해, 경. 영지 시찰을 시작한 이후로 한숨도 자지 못했지? 곧 하이에나의 영지에 가게 될 테니까, 경은 그곳에서 좀 쉬다가 나중에 제도에서 보자. 그때 꼭 휴가를 줄게.”

“지금도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 않아서 그래. 경도 나를 따라 3년이나 제도에서 살았잖아. 고향으로 돌아가서 좀 쉬고 와. 패티스 백이 제도에 있어서 영지가 어수선할 테니까.”

“…….”

“하이에나의 영지로 가기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 생각해 봐.”

그 말을 하며 이엘이 눈을 감았다.

집…….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하트에게 집은 제도가 되어 버렸다. 하이에나의 영지를 떠난 지 3년이 넘었지만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을 만큼, 하트는 제도에서의 생활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이엘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늘 나쁜 꿈만 꾸는 탓에 잠들기 전엔 인상을 찌푸리곤 했는데……. 오늘은 술기운 탓인지 평소보다 좋아 보였다. 아니. 웃기까지 하는 모습에, 하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경을 보면 이상하게 내 쌍둥이 오빠가 떠올라.’

그 말에 하트의 마음이 복잡다단해졌다. 자신도 그녀를 향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탓에.

누이동생. 그녀를 제 누이로 온전히 받아들인 까닭에, 지금 그의 눈엔 이엘이 한없이 아깝고 아까웠다. 늑대 따위에게 그녀를 주는 것이 못마땅하다. 분명 이런 마음을 갖기 전엔 노아만큼 강하고 단단한 사내는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은데.

하트는 램프의 불을 끄고 경비를 서기 위해 벽에 붙어 검을 쥐었다. 그러나 자신의 자세가 자꾸만 묘하게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검을 쥔 손도 진동하듯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다.

“……한심하군.”

순간적으로 감정에 동요가 생기니 이런 허점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확실히…… 쉬긴 쉬어야 할 때가 됐군. 몸은 멀쩡해도 이렇게 정신이 흔들려서야 어떻게 근위대장의 역할을 수행하겠는가. 그는 이엘의 제안이 명령으로 바뀌기 전에, 저가 알아서 쉬고 와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트는 마지막으로 잠든 이엘을 한 번 쳐다봤다가 침실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나 문고리를 잡고 돌리기 직전,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멈칫하며 다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이곳 땅 위에 있을 때……?”

정말로 그대와 있으면, 그때가 떠올라. 오빠가 이곳 땅 위에 있을 때 느꼈던 안락함 말이야.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쌍둥이가 ‘이곳 땅 위’에 있을 때라고……. 보통 살아 있을 때를 ‘이곳 땅 위에 있을 때’라고 표현하지는 않을 텐데. 하트 역시 조이나의 생전을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이곳도, 땅 위도. 죽은 자가 살아 있을 때를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다.

설마…… 그 쌍둥이 황자가 어딘가에 있다는 뜻은 아니겠지.

아니. 만에 하나라는 가정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냥 가정을 해 보자. 만일 그 황자가 어딘가에 있다면. 이곳이 아닌 어딘가에 있다면…….

거긴 어디지? 땅 위가 아닌 다른 곳이 대체 어디지. 그런 곳이 존재……한다. 그래, 존재하긴 해.

이미 용이 모습을 드러냈고, 심지어 ‘목소리’라는 자가 미지의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까지 알게 됐다.

즉,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 땅 말고도 공간은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곳 땅 위가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

……설마 죽지 않은 건 아니겠지? 아예 전제 조건을 뒤집어서, 그 황자가 살아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게 가능한가?

하지만 폐하께서도 2차 전쟁 때 독수리의 손에 분명히 죽었다고 했었지만 지금 멀쩡히 살아 계신다. 그럼 폐하의 쌍둥이가 살아 있다는 가정이 아주 헛소리는 아닐 터였다.

그러나 하트는 편안한 얼굴로 곤히 잠든 이엘의 얼굴에, 조금 전까지 떠올렸던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냥 표현이…….”

……그런 거였겠지. 하트는 뒷말을 삼키고 침대로부터 두어 발짝 정도 떨어졌다. 어쨌든 죽은 자의 몸이든 영혼이든 이곳 땅에 없는 건 맞는 말이니까. 땅 아래 묻혔다는 뜻일 수도 있고. 흙으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였을 수도 있다.

그래, 그게 맞다. 그녀의 쌍둥이가 살아 있다면 상황은 너무 복잡하고 골치 아파져. 무엇보다…….

“폐하의 황위가 위험하다.”

멍청한 인간들은 귀족이든 황족이든, 심지어 평민마저도 장자에 목을 맸다. 첫째. 사내. 이 두 가지라면 눈이 돌아갔다. 자신들이 암컷에 맹목적인 것과 또 다른 차원의 집착이었다.

아르세니온. 그는 이엘의 쌍둥이 오빠다. 인간들이 사족을 못 쓰는 첫째이자 황위계승권을 갖고 있던 남자. 그러니까 이엘과 아르세니온을 나란히 세워 두면 모두의 시선이 그 황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물론 겉으론 표 내지 못하겠지. 이엘의 뒤에 동맹족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볼 텐데, 감히. 하지만 아르세니온이 살아 있다면, 죽었다고 알려진 지금보다 신경 쓸 게 많아지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이엘이 황위에 오르기 직전에 그녀가 황자인 줄 알고 환대했던 인간들이, 그녀가 여자였음을 알고 단번에 고개를 흔들었던 것처럼.

그건 안 되지. 폐하의 자리를 위협하는 게 조금이라도 있어선 안 된다. 하이에나 세 쌍둥이와 그의 종족 전부는, 이엘의 황위를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그녀를 지킬 것이다.

설령 그 대상이 그녀의 하나뿐인 피붙이라고 해도.

그러니 이건 그냥 내 헛생각인 것으로. 피곤한 탓에 쓸데없는 생각이 도진 것으로 치부하는 게 낫다. 하트는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하곤 괜히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빠르게 그녀의 침실을 나왔다.

“잠시 눈을 붙이고 올 테니 경비에 소홀하지 말도록.”

“예, 하트 님.”

문 앞을 철통처럼 지키고 있던 근위대들에게 한 번 더 경고하며 복도를 걸었다. 이따위 쓸모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정도라면 휴식이 정말 필요한 모양이었다.

*

꼭 이렇게 나와서 마중까지 해야 하는 건가. 굳이 따지면 저쪽은 동맹이 아니라 적군에 더 가까운데……. 앤디는 툴툴거리며 제복을 정리하곤 저 멀리서 다가오는 뱀을 노려보았다.

솔직히 지금이라면 뱀의 수장 하나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을 텐데. 로빈이 저렇게 호위도 없이 홀로 있는 경우는 드무니까.

그러나 입맛을 다시는 그를 알아챈 패티스가 손을 뻗어 앤디의 앞을 가로막았다.

“설마 지금 경이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고 사사로운 복수 따위를 하려 들진 않겠지.”

“저, 저를 어떻게 보시는 겁니까?!”

“도둑이 제 발 저렸군.”

“…….”

“안타깝지만 경의 복수는 나중으로 미뤄 두길 바라.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알고 있습니다.”

앤디는 어깨까지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양 대꾸했다. 패티스는 그 반응이 썩 마음에 들었던 건지 피식 웃곤 점차 가까워지는 로빈의 형체를 응시했다. 작위라는 게 있으니 저 뱀이 가까워지면 마땅히 허리를 굽혀야겠지만, 솔직히 마뜩잖은 건 패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정말 빠르게도 왔네요. 연락을 보내자마자 이렇게 곧장 올 줄이야. 게다가 정말 혼자 온 듯한데요.”

약간의 빈정거림을 담은 앤디의 말에 패티스가 동의하듯 정면을 바라보며 가볍게 비웃었다. 그저 금서의 아무 페이지나 한 장 뜯어서 보냈을 뿐인데 이렇게 빨리 회신이 올 거라곤 패티스도 생각지 못했다. 이쪽만큼 저쪽에서도 애가 탔던 모양이지.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이렇게 사적으로 만나 뵙는 건 처음인 듯합니다.”

패티스는 로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재빨리 달려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꽤 먼 길이었을 텐데도 지친 기색 하나 없는 로빈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패티스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폐하께서 계시지 않은 제도에 이렇게 은밀하게 초대해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

하지만 내뱉은 말엔 독기가 가득 묻어 있었다. 누가 뱀 아니랄까 봐……. 앤디는 저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위로 틀어 올리며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마치 제가 폐하를 배신하는 듯한 분위기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받아치는 하이에나도 만만치 않았다. 패티스는 마치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듯, 웃는 낯을 고수하며 로빈을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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