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그리고 고마워.”
“폐하.”
“이 말을 늘 하고 싶었어, 르네.”
“…….”
“난 아직도 생각해. 내가 만일 그때 그대의 영지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공작과 우호적인 관계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황위에 오르는 게 쉽지 않았겠지.”
“아니오.”
단호한 르네의 대답에 이엘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그를 쳐다봤다.
“그랬다면 지금 이 자리엔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저흰 그때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려고 했으니까요.”
“…….”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는 건 변함 없으셨을 겁니다. 폐하의 앞길을 방해할 독수리는 없었을 테니.”
“하지만 내게 지혜를 줄, 꾀 많은 독수리도 없었겠지.”
“…….”
“후후.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공작은 내 마음을 정말 잘 헤아리는 듯해.”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 웃음에 초조했던 르네의 마음도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이엘은 뒷짐을 지고 복도를 지나쳐 중정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폐하.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뒤따라도 되겠습니까?”
“응, 물론이야. 근데 거긴 공작이 싫어하는 이가 있을 텐데.”
“……뱀과 만나기로 하셨군요.”
“응. 맞아. 포레스트가 불러 주는 노래를 들으면 두통이 좀 낫거든.”
“두통이 있으셨습니까? 의원을 부르심이 어떨지…….”
“놔둬. 심히 아팠더라면 오드에게 부탁했을 테니.”
하지만 르네는 여전히 걱정이었다. 이엘은 ‘심히 아프다’고 해도 기절하는 게 아닌 이상 오드의 성력을 받지 않으려고 하니까. 아무래도 이따 오드를 만나 언질을 해 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꿈을 꿔서 그래.”
“꿈이라면…….”
“그때 말했던 그 여자들 말이야.”
“확실히 보신 겁니까?”
“응. 둘의 얼굴이 미묘하게 달랐어.”
“얼굴을 떠올리실 수 있으십니까?”
“꿈에서 깨고 나면 잊힐까, 늘 협탁에 종이를 두고 기록을 해 두는 습관이 생겼거든. 그래서 깨자마자 기억나는 대로 특징을 적어 뒀는데 미묘하게 다르더라고. 비슷한 생김새였지만 한 명은 입술 옆에 점이 있었어.”
“그럼…….”
“응. 아무래도 스완이 말했던, 용의 능력에 갇힌 인간들이 맞는 듯해.”
아직 스완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용이 먼저 스완을 만나게 된다면 그녀가 말했던 ‘꿈에 갇힌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낼 수 있을 텐데. 아직까진 용과 만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러던 차에 이엘은 오랜만에 꿈에서 그 소녀들을 발견했다.
“내가 공작처럼 예술에 소질이 있으면 좋을 텐데.”
“예?”
“꿈에서 본 소녀들. 그 사람들을 그림으로나마 그려 두면 좋을 것 같아서. 나만 볼 수 있으니 그대들은 그 사람들을 알 수가 없잖아. 혹시 아는 사이일 수도 있는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엘은 음악도, 미술도 큰 소질이 없었다. 그녀는 형편없는 제 실력을 떠올리며 혀를 차더니, 이내 생각을 접고 구름다리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실내에선 몰랐는데 오늘따라 안개가 자욱하다. 날씨도 썩 좋지 않은 터라 기온이 평소보다 뚝 떨어진 상태였다. 르네는 재빨리 제 망토를 벗어 이엘의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고마워. 웃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구름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독수리의 영지는 다른 곳보다 고도가 높은 편이었는데 이 구름다리가 있는 곳은 층이 높다 보니 정말 구름이 깔린 듯 묘한 절경이 만들어졌다.
“근데 이 구름다리는 새로 지은 건가? 전에 왔을 땐 없었던 것 같은데.”
“예. 중정을 만들면서 구름다리도 함께 만들었습니다.”
“그랬군. 확실히 공작성이 더 생기 있어 보여.”
과거 황실과 가장 흡사한 성이었지만 한때는 어둠의 그림자로 잠식되었던 곳이었는데. 그런 시절이 있었냐는 듯, 르네의 성은 그 어느 곳보다 활기차게 느껴졌다.
“폐하. 넘어지십니다. 천천히 내려가십시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빨리 내려가는 것도 아닌데 르네는 뭐가 그렇게 걱정인 건지 간격까지 좁혀 와, 제 뒤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이엘이 에스코트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손대진 못했지만, 언제라도 그녀가 넘어지면 받칠 수 있게 팔을 내민 상태였다. 그런 르네의 과한 걱정에 결국 이엘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공작은 걱정이 많다니까.”
“안개 때문에 미끄러지실 수 있습니다. 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왜 메이슨과 같은 어린 독수리들이 공작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
“…….”
“그대는 정말 좋은 영주야. 좋은 군주였고, 또 좋은 아비가 될 수 있었을 거야.”
좋은 아비…….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르네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녀와 함께할 미래를 그리며 언젠가 태어날지도 모를 제 아이를 기대했겠지만, 르네는 아니었다. 설령 이엘의 시선이, 그녀의 선택이 저를 향하더라도 르네는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폐하께선.”
“응?”
“폐하께선 아이를 가지실 겁니까?”
“왜? 내가 아이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해?”
“아이를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
“회복이 불능한 땅에 과연 자식을 낳는 것이 옳은지에 관해…… 생각해 봤습니다.”
확실히 이런 것에선 인간과 다르다. 현재에 급급한 인간들과 달리, 어느샌가 이종족은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미래의 일을, 그녀를 만나고 기대하게 되었다. 어쩌면 영존하는 우논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응.”
“…….”
“나는 갖고 싶어. 내 아이. 내 자식.”
그녀의 대답에 되레 놀란 건 르네였다. 단호하게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공의 말이 옳아. 지금 이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가 과연 행복할까.”
“…….”
“부모는 낳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 아이를 어떻게 키우느냐도 부모의 책임이지.”
아이가 자라는 환경은, 어떻게 키우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적어도 지금 이 상황에선 절대 안 돼.”
“예.”
“하지만 나는 믿어. 우리는 곧 좋아질 거야. 이곳은 곧, 좋아질 거야. 나는 믿어.”
“…….”
“신께선 이 땅을 버리신 게 아니거든. 그랬다면 지난 두 차례의 전쟁에서 아예 우리의 씨를 말려 버리셨겠지. 하지만 아니야. 우린 이렇게 살아 있고, 또 살아가고 있어.”
“예, 폐하.”
“그러니 희망이 있어. 조금 더 나은 미래를 그릴 수 있어.”
그때가 되면 너희를 만날 거야. 테오. 트리시. 너희를 꼭 만날 거야, 난.
왜 태어나지도 않은, 태어나도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아이가 자꾸 제 꿈에 나오는지 생각해 봤다. 그리고 해답을 알아냈다.
나는 나자르가 아니야. 그러니 내 꿈은 예지몽이 아니고. 이 꿈은 용이 내게 보여 주는 단편적인 꿈일 뿐이다. 그녀가 본 미래일지 아니면 미래가 되길 소망하는 상황일지 그건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확신할 수 있는 건 내 꿈에 나온 아이가 바로 내 아이라는 것.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난.”
이름을 지어 준 순간부터, 그 천사들은 이미 내 아이가 되었어. 그러니 포기할 수 없어. ‘그’에게 넘길 수 없어.
반드시 지킬 것이다.
“희망이 있는 미래가 될 수 있도록. 저 역시 폐하를 돕겠습니다.”
“고마워, 공작. 그 말이 정말로 큰 위로와 힘이 돼.”
“폐하. 아까 말씀하신 그림. 영지 내에 그림을 꽤 그리는 아이들을 데려올까요? 폐하께서 말씀하시면 그림을 대신 그려 주는 건 어떠십니까?”
갑작스런 르네의 제안에 계단을 내려가던 이엘이 걸음을 멈춰 섰다. 그러곤 박수를 치며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럼 준비할까요?”
“아냐. 더 좋은 자가 있어. 이 일에 아주 적합한 자가 있다.”
“예?”
“그는 천재로 불렸던 자거든. 아마 내가 대충 설명해도 알아듣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야.”
일라이저의 영지에 있는 루벤 단. 올리세스가 세작으로 일라이저의 영지로 보낸 그 노련한 화공이 있었다.
“그래. 그가 그림을 그리면 되겠네.”
“적합한 이를 찾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응. 그림이 완성되면 그 소녀들을 아는 이들을 찾으면 될 것 같아. 물론 그들을 아는 사람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아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예, 폐하. 맞는 말씀이십니다.”
“고마워, 르네. 공작은 정말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구나.”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해맑게 웃으며 좋아하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으니, 르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불충한 생각인 걸 알면서도, 저 웃음이 무척 귀엽고 사랑스럽단 생각을 잠깐 했던 것 같다.
“폐하!”
그때 저 멀리 중정을 뛰어다니던 포레스트가 그녀를 알아보곤 큰 소리를 치며 손을 흔들었다. 그 무례한 행동에 르네는 미간을 좁혔고 한 소리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으나 그대로 실천하지는 못했다.
그녀의 차가운 손이 제 뺨에 닿았기 때문에.
“역시 내 독수리. 그대는 정말 내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야.”
“…….”
“고마워, 공. 이따 만찬실에서 보자.”
그 말을 끝으로 예쁜 눈웃음을 짓고는 이엘은 계단을 내려가 포레스트가 있는 중정으로 향했다.
“아…….”
무너지듯 다리의 난간을 붙잡은 르네가 짧은 탄식과 함께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얼굴이 새빨갛게 타올랐다. 화끈거리는 정도를 넘어서, 이대로 그냥 불에 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처 다 가려지지 못한 그의 귓불이 그 어느 때보다 붉어져 있었다.
평소와 달리 허물없이 자신을 대했다. 아마 조금 전에 그녀에게 인사한 포레스트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그 뱀을 아무렇지 않게 대했으니, 포레스트의 목소리를 듣고 뱀을 대했던 습관 그대로 제 뺨을 만졌겠지.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리에서 오류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작은 오류에 제 심장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녀의 소유가 되었다는 그 사실에 미치도록 행복해졌다.
‘내 독수리.’
이유가 뭐가 됐든. 다시는 제게 찾아오지 않을 순간일 테니, 르네는 잠깐만이라도 이 행복을 느끼고 싶었다. 딱히 금욕적으로 살아온 것도 아닌데 온갖 이성이 날아가 버릴 것처럼. 독수리는 그녀의 작은 오류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