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뱀을 만나 봐야겠군.”
패티스의 말에 앤디와 스완, 피시가 눈을 마주치고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보니 참 찰떡같은 호흡이라고, 패티스는 똑같은 표정을 짓는 세 사람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스완이 했던 말이 떠오른 탓에.
‘지금이 어느 땐데 늑대, 하이에나를 가려? 거기다 동맹 종족인데.’
정말 종족을 뛰어넘는 관계라도 만든 듯한 세 사람의 모습이, 그리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았다는 것에 스스로에게 조금 충격을 받았지만. 패티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아예 시선을 돌려 버렸다.
“좋아! 나도 같이 갈래! 나한테 맡겨 둬!”
아. 이젠 계급도 뛰어넘는 관계가 돼 버렸군, 쯧. 패티스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신난 듯 꼬리를 마구 흔드는 로날드를 보며 혀를 찼다.
그러나 여전히 희한하게도 그 모습들이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
홱―!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에 꽂혔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짧지만 묵직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이엘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르네. 언제 왔어?”
“조금 전에 왔습니다.”
“다 본 거야? 하필 공작에게 들키게 돼서 민망하네.”
“훌륭하셨습니다. 제 소속 대원들이 보면 당장 궁수대의 대장을 바꾸라고 할지도 모르겠군요.”
“여전히 공작의 농담은 적응을 못 하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엘은 르네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 웃음이 전염되듯 르네에게도 번졌다. 그는 보기 드문 웃음을 지으며 등 뒤로 감췄던 손을 이엘의 앞에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건 꽃다발이었다.
“오는 길에 정원에 들러 꽃을 좀 가져왔습니다.”
“향이 좋네.”
이엘은 거절하지 않고 꽃다발을 받았다. 르네의 정원 중앙엔 분수대가 있었고, 그 주변을 감싸듯 이름 모를 야생화가 심어져 있었는데, 그 꽃들로 엮은 꽃다발인 듯했다. 꽃에 얼굴을 파묻듯이 갖다 대고 맘껏 향을 맡았다.
이엘이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동안 르네는 어수선한 주변을 정리했다. 바닥에 떨어진 수많은 화살들을 하나하나 주울 때마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열심히 훈련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활 쏘는 건 형편없다며 고개부터 흔들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녀는 어릴 때부터 제국 제일의 기사단장에게서 검술을 배웠던 터라 확실히 검술엔 재능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총을 다루는 것까지 완벽했다. 하지만 궁술은 유난히 어려워했다.
“다 좋은 스승이 가르쳐 준 덕이 아니겠어?”
이엘이 흔흔히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화살 하나를 주웠다. 그러곤 꽃다발 속 꽃을 하나 빼서 그 화살의 오늬 쪽에 묶었다. 르네는 별 볼 일 없던 화살이 꽃 하나로 특별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니. 꽃이 아니고 그녀의 손이 닿았다는 것만으로 이미 특별해진 상태였지만. 르네는 이엘의 손에 감긴 화살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민망함에 귀가 조금 붉어졌다.
“황녀였던 시절에 공작을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
“그랬다면 검을 사용하는 것처럼 활도 지금보다는 잘 쓰지 않았겠나?”
“지금도 충분하십니다. 애초에 폐하께서 활과 검을 잡으실 일 없게 하는 것이 저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래도 난 내가 내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거든.”
지금도 충분하다는, 조금 전과 똑같은 대답을 하려다가 르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엘이 꽃을 묶은 화살을 제게 내밀었기 때문에. 속 좁게 부러워했던 물체가 그녀의 선물이 되어 제 손에 들렸다.
이렇게 보니 이전에 그녀가 제 영지에 남기고 간 화분과 비슷하다. 남몰래 주고 간 꽃이었는데 질투에 눈이 멀어, 혹은 죄책감에 눈이 어두워져 끝내 피우지 못하고 져 버린 그 꽃과.
“생각해 보니 예전에 공작의 영지에서 매의 습격을 당했을 때. 두려워하던 내게 그대가 가문의 가보를 주었었지.”
“예.”
“그 화살이 얼마나 많이, 나를 지켜 주었는지 몰라.”
“…….”
“비록 활을 쏘지 못하던 때라 화살로서의 기능은 못 했지만.”
워낙 길고 얇았기 때문에 창처럼 던지는 용도로 사용했지만, 그 덕에 많은 위험 속에서 살아남았다. 이젠 추억이 되어 버린 옛 기억을 되짚으며 작게 웃었다.
“음. 그럼 공작에게 새 활과 화살을 선물로 줄까.”
“영광입니다. 가문의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공작이 워낙 욕심이 없으니 내가 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질 않나.”
일라이저와 비슷하게, 르네도 자신이 뭔가 주려고 하면 고개부터 젓고는 했다. 어떻게 보면 이쪽은 영지 사정이 나쁘지 않으니 부족한 게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명색이 개국공신인데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난처한 건 이엘이었다.
“가끔은 원하는 것을 말해 보게. 별 쓸데없는 귀족들도 내게서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어 가려고 아우성인데. 그대는 욕심이 너무 없어.”
“폐하께선 모르시겠지만 저는 욕심이 많습니다.”
“공작이? 정말 욕심 많은 자를 보지 못했나 보군.”
이엘이 실소하듯 웃으며 품에 그러안은 꽃다발에 시선을 집중했다. 얼기설기 아무렇게나 엮어 온 것처럼 보였지만 꽃의 색과 향이 은은하게 어우러져 있다. 어설픈 정원의 상태만 봤을 땐 이런 쪽으로는 소질이 없어 보였는데. 그 생각을 하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폐하.”
“응?”
“만일 폐하와 제가 먼저 만났더라면.”
“…….”
“폐하의 어린 시절에 제가 당신의 스승이 되었더라면.”
“…….”
“우리의 관계는 달라졌을까요.”
나지막한 르네의 말에 이엘은 꽃에 두었던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붉은색 눈동자가 그녀가 알아챌 만큼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 무뚝뚝하고 차가운 남자는 늘 자신의 일에만 적극적이고 뜨거워져서……. 이엘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겠지.”
“…….”
“아마 나는 훌륭한 스승을 한 명 더 둔 행복한 황녀가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어쩌면 내가 당신의 스승이 되었더라면, 전쟁이 터졌을 때 나는 당신을 데리고 도망쳤을지도 모릅니다. 내게 주어진 종족의 사명 따위, 이종족의 명예 따위 다 잊어버리고. 오직 당신의 안전만을 생각하며 달렸을 겁니다.
그러다 쏟아지는 이종족들의 공격을 받고 죽었겠지. 지금의 자신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큼, 그녀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으니까.
그녀를 죽이는 입장이 아닌, 그녀를 지키는 입장이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르네는 갑자기 제 가슴을 저미는 감정에 잠깐 숨을 멈췄다.
“르네.”
“…….”
“르네?”
이엘은 앞서 걷다가 르네가 제 부름에 대답하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 그는 뭔가에 빠진 듯한 표정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마 자신의 대답 때문이겠지.
“하지만 난 지금이 더 좋아.”
“…….”
“공작이 나의 음악 스승이 되어 주고, 궁술 스승이 되어 준 지금이 훨씬 좋다고.”
“죄송합니다, 폐하. 다른 생각을 한 건 아닙니다.”
“응, 알아. 그리고 설령 과거를 생각하고 후회한다고 해도, 괜찮아.”
“…….”
“말했잖아. 이제 공작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폐하, 저는…….”
“과거를 잊어도 좋고, 잊지 않아도 좋아.”
“…….”
“사람마다 아픔을 이기는 방식은 다 다르니까.”
누구나 과거의 자신을 후회하기 마련이다. 이엘 역시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돌려서 바꾸고 싶은 과거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공작을 좀먹게 만들도록 두지 마.”
“…….”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나와 공작이 이제라도 만나서 좋은 이유를 대 보면 어떨까. 공작은 어떻게 생각해?”
저를 위해 애써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이엘의 마음이, 오늘도 르네를 기쁘게 만들고 슬프게 만들었다.
릴리가 있을 땐 미래만 그렸던 자신인데. 그 아이가 죽고는 미래를 버릴 생각만 하다가, 겨우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그녀를 만났지만 자신은 그녀의 곁에서 함께 꿈꿀 수 없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내가 노아였다면……. 당신의 선택을 받았다면……. 그런 가정을 덧대고 덧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제가 감히 폐하께 피아노를 가르쳐 드릴 수 있다는 점.”
“공작은 정말.”
르네의 말에 이엘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웃음이 좋았다. 저 웃음 하나 지켜 주고 싶어 신념도 꺾고, 고집도 꺾고, 미련도 버렸다.
그래, 맞아. 더 욕심낼 필요 없다. 저 웃음이면 나는 족하니까.
“그래도 예전보다 실력이 늘지 않았나? 전에는 정말 엉망이었는데.”
“예, 이제는 가르쳐 드릴 게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배워야 할 정도입니다.”
“또 그런 농담.”
“사실입니다. 지금의 저는 한 곡을 연주하는 것도 어려워, 버벅거리고 있으니까요.”
이엘이 이곳에 오면서, 자신과 함께 릴리의 방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예전만 못하다. 어린 황녀를 죽인 뒤로 날카로운 검에 이따금 움찔하는 것처럼, 어쩌면 앞으로 쭉 피아노를 두려워하게 될지도 모르지.
“예전에 노아가 내게 그런 말을 했어.”
이엘에게서 갑자기 튀어나온 노아의 이름에 르네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러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우습고 하찮아진 제 자신이 부끄러워져 속으로 한숨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