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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21화 (321/488)
  • 321화

    “그대로 말했다가는 배 속에 있는 두 생명이 위태로웠을 테니까.”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며? 성력은 함부로, 마음대로 사용하면 안 된다며?”

    “맞아. 내 추측인데, 아마 그즈음 해서 몇 안 되던 나자르들은 삶을 포기했던 것 같아.”

    “…….”

    “이미 오래전부터 보호석 같은 것들을 만들어 성력을 허튼 곳에 사용했어. 그걸로도 충분히 성력과 수명이 줄어들었을 테고. 집중적인 나자르 대학살로 종족 자체도 많이 준 상태였으니 자신들의 말로를 예감했던 것 같아.”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신탁을 황제에게 거짓으로 고한 것이다. 어차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예감했기에.

    “다음에 태어날 아이가 황제를 도와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며, 두 아이는 함께 생존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전했대.”

    “두 아이가 함께?”

    “혹시나 생길지 모를 위험으로부터 둘 다 지키기 위해서겠지. 나자르들도 신탁의 아이가 황자인지 황녀인지까지는 몰랐을 테니까.”

    “그럼 신탁의 아이는 폐하야?”

    “그렇지 않을까? 한쪽은 죽었다며.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을 보면, 누가 봐도 폐하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정말 신탁이 이렇게 가벼운 의미였을까? 아니. 사실 이것도 마냥 가벼운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앤디는 미간을 좁힌 채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피시가 조용히 손을 들고 패티스와 앤디를 향해 말했다.

    “실은 나도 알아낸 게 있어.”

    “뭘?”

    “내가 폐하의 애첩인 줄 알고 접근해 왔던 귀족들에게서 제 1르뷔 제국에 관해 많이 물어봤는데, 폐하와 죽은 황자가 태어났을 당시 귀족들 사이에 분열이 있었던 모양이야.”

    “분열?”

    “응. 차기 황제가 누구냐는.”

    “그건 당연히 죽은 황자 아니었어?”

    패티스의 물음에 피시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르뷔 제국은 첫째가 승계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게 여자든, 남자든. 어차피 제국은 아이를 하나만 낳아야 했기 때문에 처음 태어난 아이에게 모든 걸 물려주었던 것이다.

    그건 황실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난 첫째가 황위를 이어받아야 했다. 그게 황녀든, 황자든 관계없이.

    그러나 차별이 심했던 그 나라는 어느 순간부터 황자만을 낳기 위해 노력했고, 설사 첫째 황녀가 존재하더라도 일찌감치 다른 귀족에게 입양을 보내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그런 식의 비윤리적으로 대를 이어 갔기 때문에 황실은 손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쌍둥이기는 해도 황자가 폐하보다 먼저 태어났어. 그러니 차기 황제는 당연히 황자 아니야? 일찌감치 황태자로 자리매김했던 것 같은데.”

    “그러게. 나도 그게 조금 이상해서 그땐 그냥 흘려들었어. 쓸데없는 귀족들의 알력 다툼이었겠거니 하면서.”

    귀족들은 자연히 황자에게 줄을 댔을 텐데. 어째서 둘째였던 황녀도 그 범위에 넣었던 걸까. 패티스는 제 턱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니면 헛소문 같은 게 돌았던 게 아닐까요?”

    고민하던 앤디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 인간들은 그런 거 있잖아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이용해 먹는 거.”

    “……사실은 황녀가 첫째가 아니었냐는 헛소문이 돌았다는 의미야?”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근거가 있든 없든, 일단 말이 나오면 의심이 생기기 마련이죠. 그걸로 은은한 분열이 생겼을 수 있고요.”

    “…….”

    “원칙대로라면 무조건 첫째인 황손이 황위를 이어받는 거잖아요. 그게 황녀여도 말이죠.”

    보통 쌍둥이가 태어난다면 가문의 승계권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지만, 실제로는 관습대로 첫째가 작위를 세습한다.

    그러나 여자아이가 첫째로 태어나고 남자아이가 둘째로 태어날 경우. 자신들이 만든 장자 세습의 원칙이 깨지기 때문에, 대부분 첫째를 일찌감치 다른 가문과 약혼을 시켜 출가를 보내거나 입양을 보내 버렸다.

    황위도 마찬가지다. 만약 정말 이엘이 첫째였고 이온이 둘째였다면, 황위 계승으로 인한 권력 다툼이 생길 만했다.

    “근데 제가 생각해도 억측 같네요. 귀족 간 대립의 이유는 그것 말고도 많으니까요. 그냥 혹시나 해서 드린 말씀이니 깊게 생각하진 마세요.”

    앤디는 자신의 근거 없는 말로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진 않았다. 그의 말에 패티스도 동의한 건지 고개를 끄덕이며 혼란스러워진 대화를 끝냈다.

    “그럼 앤디 경. 경이 어제 렉토스에게서 알아낸 내용과 그 책에 대해 말해 보게.”

    “이것도 마찬가지로 확실한 근거가 없는 제 추측에 불과해요. 그래도 들으실 겁니까?”

    “말해.”

    “몇 년 전에, 저희가 연합해서 뱀의 영지를 박살 냈던 것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 있어.”

    “그때 도망치던 뱀에게서 종이 뭉텅이를 빼앗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폐하께선 연구소를 비롯해 온갖 자료들을 전부 불태워 버리라는 말씀을 하셨던 터라, 다른 것들처럼 보지도 않고 불태우려 했습니다.”

    “그런데 불태우지 않았나 보군?”

    “예. 직접 보십시오.”

    앤디는 불에 그을린 낱장을 패티스의 앞으로 내밀었다. 패티스는 형태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그 종이를 들어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늑대의 기름, 타이곤의 갈기, ……의 눈알은 죽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그에 따른 마땅한…… 위험한…… 이기에 이는 극소수의…….」

    “이게…… 대체 뭐지?”

    “저도 뭘 뜻하는지 몰라서 그냥 불태우려고 했는데…….”

    “기름.”

    “예, 맞습니다. 기름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와서 버리지 못하고 갖고 와 버렸어요.”

    자신이었어도 이 종이에 하이에나와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었다면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패티스는 꼼꼼하게 글을 읽고는 종이를 내려놨다.

    “여기 그을린 부분은 독수리?”

    “헉. 그걸 바로 아셨습니까?!”

    “우리 패티는 똑똑하니까.”

    “쓸데없는 말 하지 마, 피시.”

    패티스의 나무람에도 피시는 마치 저가 칭찬을 받은 것처럼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한편 앤디는 입을 쩍 벌리고 패티스와 종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와, 난 저게 독수리라는 걸 최근에 알았는데…….

    “그래서? 이 종이가 왜.”

    “궁금함을 못 참고 오드 님께 물어봤죠.”

    “…….”

    “하지만 별것 아니라며 종이를 가져가셨어요. 1제국 때 있던 연구 자료 같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 종이도 불태우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니었군. 오드 님의 침실에서 발견했나?”

    “예.”

    앤디는 금서의 어느 한 부분을 펼쳐 그곳에 문제의 그 종이를 갖다 댔다.

    “딱 맞아요. 쪽수가.”

    “하지만 오드 님의 말씀처럼 별 볼 일 없는 내용일 수 있어. 특히 늑대의 기름, 타이곤의 갈기, 독수리의 눈알은 꼭 연구가 아니었어도 인간들 사이에서 높은 값에 매매가 되던 것들이 아닌가.”

    늑대의 기름은 장례용으로. 타이곤의 갈기는 치료용으로. 그리고 독수리의 눈알은 한때 보석보다도 값이 더 나가는 사치용으로.

    “하지만 폐하께서 이것들을 구하고 계셨어요.”

    “……뭐?”

    “이건 제 동생의 기름입니다.”

    앤디가 품에서 기름이 담긴 병을 꺼내 제 쪽으로 밀었다. 패티스는 제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의 양이면 온 힘을 다해 빼냈거나 죽어 가는 개체를 쥐어짜 냈거나 둘 중 하나였다.

    “폐하께서 쥐어짜신 건 아니니 놀라지 마시고요.”

    “…….”

    “주드가 직접 폐하께 주고 간 유품이에요.”

    앤디의 동생이라던 주드의 죽음으로 이엘이 한동안 괴로워했었다는 걸 패티스도 전해 들어 알고 있다. 그 죽음에 저런 비화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가뜩이나 애틋했던 사이였는데 그 죽음의 끝마저 저런 형태였다면 그녀가 고통으로 허덕였던 것도 이해가 간다.

    “제 동생과 폐하가 처음 만난 곳은 암시장에서였습니다. 당시 능력의 발현이 더뎌 제어를 못 하던 주드는 인간들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그런 주드를 구해 준 사람이 폐하셨어요.”

    “…….”

    “그리고 지하에 있는 렉토스와 이전에 세잔티노에서 살았던 놈들은 그때 주드와 이종족들을 밀매하던 놈들이었고요.”

    “그래서 렉토스에게 물어봤던 건가? 폐하께서 왜 암시장에 들어가셨던 건지?”

    “맞아요. 그리고 알게 됐죠.”

    “……기름이었군.”

    “네.”

    앤디의 대답을 끝으로 집무실엔 적막이 찾아왔다. 그들은 모두 테이블 위에 놓인 금서와 낱장의 종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줄곧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스완이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확실해?! 폐하께서 이것들을 구하고 계신 게 확실하냐고!”

    “아니. 내 추측인데.”

    “뭐?”

    “그러니까 말했잖아, 처음부터. 그냥 내 추측이라고.”

    환장하겠네. 확실하지도 않은 내용을 내가 왜 듣고 있어야 돼? 이미 스완은 불신이 가득한 눈빛으로 앤디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패티스는 스완을 제지한 채 앤디를 향해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렉토스 놈이 저희 영지에서 도망쳐 제 무리가 있는 곳으로 갈 때. 폐하와 거래를 했었습니다.”

    “거래?”

    “폐하께서 갖고 계셨던 황자의 반지요.”

    “…….”

    “그걸 주는 대가로 어린 독수리의 눈알을 찾아 달라고 하셨답니다.”

    “…….”

    “아마도 폐하께서 직전에 머무르셨던 독수리의 영지에서 가깝게 지내던 아이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린 늑대의 죽음. 그 직후에 독수리의 영지에서 만나게 된 눈알을 빼앗긴 어린 독수리.

    “아까 패티스 님이 말씀하셨잖습니까. 뭔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을 포기하게 된 이유.”

    “…….”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게 아니냐고요.”

    어린 늑대의 죽음이, 독수리들의 처참한 모습이…… 폐하의 심경에 변화를 미친 걸까? 스완과 달리 패티스는 앤디의 말이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폐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다.

    제 턱을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던 패티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앤디 경. 경은 폐하께 이것들에 관해 여쭤보면, 그분이 사실대로 대답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나?”

    “……아니요. 솔직히 그럴 것 같진 않네요.”

    그녀가 말해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면, 자신에게 주드의 기름이 담긴 병을 건넸을 때 털어놨을 것이다. 하지만 주드의 죽음 직후, 처음 이엘에게 주드의 기름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녀의 눈동자엔 두려움과 후회로 뒤범벅된 감정이 서려 있었다.

    당시 이엘은 주드의 기름을 언급하는 것에 굉장한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랬는데도 한동안 그 기름을 갖고 있었던 걸 보면, 그게 그녀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기름은 온전한 상태로 앤디에게 돌아왔다.

    패티스의 말이 맞다. 이엘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폐하께서 제게 이 기름병을 돌려주셨을 때 어디에 사용하셨는지 여쭤봤지만 그때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씀만 하셨을 뿐, 용도에 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좋아. 이 부분은 후에 오드 님을 만나서 여쭤보도록 하지. 말씀해 주실지 모르겠지만.”

    “패티스 님.”

    “왜.”

    “이 종이요, 로빈도 알고 있지 않을까요?”

    앤디가 종이를 펄럭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 종이. 도망치던 뱀에게서 빼앗았다고 했지. 그렇다면 로빈은 이미 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들처럼 일부가 아닌, 온전했던 내용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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