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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20화 (320/488)

320화

괴로움에 몸서리를 치는 렉토스를 그대로 두고 앤디는 자물쇠로 철창을 잠근 뒤, 성큼성큼 걸어가 지하 감옥을 빠져나왔다.

어디 밤새 고통스러워해 봐라. 저번에 폐하를 함부로 입에 올린 죗값은 받아야지. 아직도 뒤에서 고함을 지르는 렉토스를 비웃으며 밖을 향해 걸었다.

사실 렉토스에게 한 말은 반은 맞고, 반은 거짓이다. 이엘이 그의 처분을 패티스에게 맡긴 것은 맞지만, 패티스가 저놈의 혀를 자를지 어떨지는 아직 정해진 게 없었다.

다만 앤디가 그간 지켜봐 온 패티스의 성격상, 당장 내일이라도 지하로 쳐들어가 놈의 혀를 잘라 버릴 듯해서.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하라는 의도로 언질을 준 것뿐이다.

“그리고 정말 혀가 잘리면 정보를 알아내기 힘들 테니, 오늘 꼭 저놈에게서 이야기를 들어야 했고.”

그렇게 중얼거리던 앤디는 지하 입구를 통과해 제 침실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마주친 누군가 때문이었다.

“앤디 경. 경은 정말 저 인간에게 관심이 많나 보군.”

제길. 진짜 일 중독자인가? 이 시간까지 잠도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앤디는 황당한 눈으로 마주 선 패티스를 쳐다봤다.

“저 인간이 경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지?”

“아무 얘기도 안 했습니다.”

“앤디 경.”

“…….”

“난 우리가 같은 배를 탔다고 생각했는데, 경은 아니었나 봐.”

하여간 눈치도 더럽게 빨라요. 앤디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제 뒷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러곤 조금은 불퉁한 태도로 불만을 표했다.

“그러는 백작님도 제게 말씀하지 않으신 게 있잖습니까.”

“내가 뭘?”

“스완이 고니의 호수에서 알아 온 정보요.”

“…….”

“그게 백작님이 전에 찾고 계신다고 하셨던 신탁의 내용 아닙니까?”

앤디의 말에 패티스가 침묵했다. 그 태도에 또 화가 난 앤디가 그와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인사도 없이 그대로 지나치려 할 때였다.

“내일 내 집무실로 와.”

“예?”

“올 때 경이 그때 갖고 갔던 책과, 책상 위에 있던 종이. 그리고 오늘 저놈에게서 알아낸 정보 모두. 내게 말해 줘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나 역시 경에게 신탁의 내용을 말하지 않을 거야. 참고로 이 일에 관해 백조는 나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아무리 협박해도 경은 놈에게서 알아낼 수 없을 거란 소리야.”

고새 하이에나의 편에 붙었냐? 앤디는 어디에 있는지 모를 스완을 향해 무언의 원성을 보내다가, 이내 단념하듯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백작님.”

“좋은 밤 보내게.”

퍽이나 좋은 밤을 보내겠네요. 속으로 실컷 이죽거리던 앤디는, 패티스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

패티스의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건지 헉헉거리며 들어선 앤디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쓰러지듯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내일 오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아침이 되자마자 올 줄은 몰랐는데.”

패티스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더니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피로를 풀었다. 하여간 성질머리하고는, 쯧. 그의 핀잔을 한 귀로 흘려들은 앤디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벅찼던 숨을 길게 내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백작님!”

“기다려, 좀. 지금이 몇 신 줄은 알고 있나?”

“한숨도 못 자서 모르겠는데요.”

“…….”

“어차피 백작님은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시잖습니까. 그거 다 알고 온 건데, 제가 실례를 한 겁니까?”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패티스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앤디는 개의치 않았다. 그 대신 가지고 온 책을 테이블 위에 쾅 소리 나게 떨어뜨리며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을 뿐.

“백작님께서 궁금해하시던 책입니다. 이제 말씀해 주세요.”

“기다려. 아직 스완이 일어나지 않았어.”

“네? 걔 여태 자고 있어요? 가서 깨울게요.”

“놔둬. 어제 늦게까지 뭣 좀 하느라 피곤한 것 같으니까. 어차피 경은 오늘 할 일도 없잖아?”

호오……. 앤디가 눈을 가늘게 뜨며 패티스를 쳐다보고 음흉하게 웃었다. 폐하 외엔 그 누구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던 저 하이에나가 지금 백조의 편의를 봐주고 있다고? 이것 참 신기한 광경이네.

“뭔 허튼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기분 나쁘니까 그딴 표정으로 쳐다보지 마.”

“예, 알겠습니다.”

“…….”

“알겠다니까요?”

패티스는 일순 저 늑대 놈의 얄궂은 면상을 한 대 후려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상종을 하질 말아야지. 그는 안경을 다시 쓰곤 멈췄던 업무를 처리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백작님.”

“고니가 오기 전까진 말 안 한다고 했어.”

“그게 아니라요. 궁금한 게 있어서요. 개인적인 일입니다.”

“뭔데.”

“뭔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는데, 그걸 포기하게 됐다면. 그 이유가 뭘까요?”

패티스는 뭐 그딴 질문을 하냐는 표정으로 앤디를 쳐다봤다. 그러나 늑대는 진지했다. 조금 전처럼 헤실헤실 웃는 낯이 아닌, 마치 제게 조언이라도 구하려는 표정이었다.

“둘 중 하나겠지.”

“…….”

“말 그대로 그걸 포기했거나. 아니면 필요 없어졌거나.”

“……그렇겠죠? 제가 너무 당연한 질문을 했네요.”

“그 책과 관련된 질문인가?”

“아니요. 그냥 개인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앤디는 어색하게 웃으며 스완이 올 때까지 잠시 눈을 붙이겠다는 말을 하더니 소파에 드러누웠다. 눈치 빠른 패티스는 더 캐묻지 않고 하던 일에 집중하며 앤디가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앤디는 눈을 감은 채 남몰래 한숨을 집어 삼켰다. 조금 전 그 말은 이엘을 떠올리고 내뱉은 말이었다.

주드의 기름…….

포기하신 걸까, 아니면 필요 없어지신 걸까. 죽어 가던 주드가 의도적으로 제 몸에서 그만한 양의 기름을 배출하려면 상당한 고통을 동반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얻어 낼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면, 왜 이제 와선 쓰지도 않고 제게 돌려주셨단 말인가.

애초에 그 세 가지를 가지고 뭘 하려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필 가장 중요한 부분들은 불에 그을려 내용을 알아볼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으니……. 앤디는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내용들에 머리가 아파, 소파에 누운 채 한참을 뒤척거렸다.

그리고 꽤 긴 시간이 흘렀을 때.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은 패티스가 먼저 정적을 깼다.

“심경에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잖아.”

“네?”

“절실하게 필요했던 그걸 얻기까지,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

“그래서 포기했거나 다른 방법을 찾았겠지.”

아……. 앤디는 짧게 침음했다. 주드의 죽음이, 어린 독수리들이 눈알을 적출당한 그 현장이, 그리고 그녀의 친구가 된 레온이 타이곤이었다는 사실에……. 이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낀 것이다.

“뭐가 됐든 전에 하려던 선택보다 더 나은 방향을 택했길 바랄 수밖에.”

“그렇군요.”

“그 이야기. 폐하……,”

“저 찾았다고요?!”

문이 벌컥 열리며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스완이 들어왔다. 그의 뒤로 졸졸 따라 들어온 피시와 로날드의 모습에 앤디가 황당하단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날드. 넌 언젠가부터 우리 1기사단보다 저 백조랑 남작님이랑 더 자주 붙어 있는 것 같다?”

“동맹족끼리 내 편, 네 편이 어디 있어요.”

“…….”

“가만 보면 앤디 님도 참 편협해요.”

와, 저놈 저거 말버릇 봐. 스완한테 말대꾸하는 법을 배운 게 틀림없다. 물들었네, 물들었어……. 앤디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테르 놈의 현란한 말솜씨에 할 말을 잃고 혀를 찼다.

“우리 애가 맞는 말 했네.”

“뭐? 우리 애……?”

“그래. 앤디 님. 앤디 님은 좀 세상을 넓게 볼 필요가 있어.”

“…….”

“지금이 어느 땐데 늑대, 하이에나를 가려? 거기다 동맹 종족인데.”

스완의 말에 앤디는 정말로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말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서.

“조용히 하고 다들 자리에 앉아. 중요한 얘기 할 거니까.”

이러다간 오늘이 가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저 유치한 말싸움에, 패티스가 먼저 대화를 끊어 버렸다. 구시렁거리던 스완이 앤디의 맞은편에 앉고, 그 옆엔 피시가 앉았다. 그리고 로날드는 눈치를 보다가 앤디가 앉은 소파 옆에 앞발을 포개고 주저앉았다.

“좋아. 앤디 경. 경이 먼저 얘기할 건가? 아니면 내가 먼저?”

“백작님께서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니까요.”

“알겠어. 어제 경이 말한 대로, 며칠 전에 피시와 스완이 고니의 호수에 다녀온 이유는 우리가 찾던 신탁의 내용 때문이었어.”

패티스는 앤디에게 그간의 경과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날 금서구역에서 앤디가 책을 갖고 나간 이후에 패티스와 스완은 신탁이 적힌 책을 찾았지만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고.

신탁은 신이 나자르를 통해 인간과 이종족에게 전해 주는 것이었으므로, 그 책에 적힌 것들은 전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신탁들뿐이었다.

“그런 와중 제일 마지막 신탁은 날짜만 적혀 있었고 내용은 비어 있었다.”

“날짜요?”

“그래. 제국력 1031년.”

“…….”

“폐하께서 태어나시기 다섯 달 전이었어.”

그 얘기는…….

“마지막 신탁은 폐하와 관련된 신탁이었다.”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스완의 아버지가 알고 있었어요?”

“다음에 태어날 아이가 이곳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

패티스를 대신해 스완이 답했다. 그 말에 앤디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곧 반역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니까. 당시의 선황, 그러니까 이엘의 아비가 그 신탁을 들었다면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였을 것이다. 폭군이었던 그가 황자와 황녀를 살려 둘 리 없다.

그리고 그런 앤디의 반응을 예상한 듯, 스완이 뒷말을 붙였다.

“하지만 나자르가 거짓 신탁을 말했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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