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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19화 (319/488)
  • 319화

    일라이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르네는 손으로 그의 멱살을 잡아 눌렀다. 벽에 쾅 소리를 내며 박힌 일라이저가 짧은 신음 소리를 뱉으며 미간을 찌푸리는 탓에 잠깐 르네의 입 모양을 놓쳤다.

    “다시는 내 앞에서 루시우스 러셀을 꺼내지 마라.”

    일라이저의 목을 틀어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 놈의 아들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속에서부터 끓어올랐다. 놈과 관련된 자들은 전부 다 죽였는데, 정작 아들은 살아 있는 현실이라니…….

    하지만 금세 손에 힘이 풀렸다. 잡고 있던 일라이저의 멱살을 놓아 주고 괜히 제 손을 주먹 쥐듯 접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놈의 아들이기에 일라이저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렇게 따지면 폐하는……. 르네는 입을 꾹 다물며 돌아섰다.

    “네 아비는 내 동생을 죽였고, 나는 네 아비를 죽였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넌……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그 말만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지만, 르네가 일라이저에게서 돌아선 상태였으므로 당연히 일라이저는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캑캑거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일라이저는 조금 전까지 거세게 붙잡혔던 제 목을 만지작거렸다. 평소였다면 공격이 들어오기도 전에 피했을 텐데, 순간적인 감정에 눈이 어두워 방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제 어리석은 판단에 한숨이 나오고 부끄러워졌다.

    벽을 짚고 일어선 그는 환하게 웃고 있는 릴리의 초상화를 한참 바라봤다.

    “르네. 공녀. 고모님. 그리고 아버지. 분명 뭔가 있다.”

    엔리케가 쓸데없이 자신을 자극했을 리 없다. 분명 이 초상화 속 여인과 제 가문이 뭔가 엮여 있는 게 분명해.

    그리고 그 눈빛. 자신을 정말 죽이기 위해 노려보던 르네의 그 눈빛. 그 안에 담긴 상실로 인한 슬픔……. 낯설지 않았다. 익숙했다. 왜냐하면 그 눈빛은…….

    “……나를 닮았어.”

    어머니와 누님들을 제 눈앞에서 죽여 버렸던 재규어, 이카르를 바라보던 몇 년 전의 자신을 닮아 있었다.

    *

    앤디는 모두가 잠든 이슥한 밤을 타, 몰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마침 오늘 지하 입구를 지킬 차례가 1기사단, 늑대들이었으므로 앤디는 어렵지 않게 지하로 내려갈 수 있었다.

    “야.”

    “…….”

    “렉토스.”

    피떡이 됐구만……. 바닥에 고꾸라진 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건지, 피골이 상접한 렉토스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앤디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엘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놈에게 손을 대지 못했던 자신들과는 달리, 패티스는 저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거침이 없었다. 물 한 모금도 주지 말라고 할 때부터 알아보기는 했다마는…….

    “야. 정신 좀 차려 봐!”

    “으윽…….”

    “일어날 수 있겠냐?”

    “크흑……!”

    시름시름 앓는 렉토스를 흔들어 깨우자, 놈이 퉁퉁 부은 눈을 겨우 뜨며 신음 소리를 냈다. 앤디는 일단 렉토스를 부축해 바닥에 앉히곤 가지고 온 물을 그에게 건넸다.

    “일단 마셔. 너 여태 아무것도 못 먹었냐?”

    “주, 죽, 죽을 것 같습니다…….”

    “쯧. 그러니까 백작님한테 왜 덤벼, 덤비길. 대체 뭔 헛소리를 했기에 패티스 님이 이렇게 직접 처리했냐?”

    패티스는 병적으로 인간을 싫어한다. 혐오 그 이상의 감정으로 싫어하기 때문에 직접 나서서 손대는 것조차 기피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순간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능력을 사용했다는 건, 저놈이 패티스가 싫어하는 태도로 그를 자극했다는 뜻이겠지.

    “저, 저는 아무 말도…… 그, 그렇게 심한 말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쿨럭!”

    습하고 차가운 바닥에 오랜 시간 쓰러져 있던 탓인지, 렉토스는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마른기침을 연거푸 하던 놈은 바들바들 떨며 제 무릎을 끌어 모아 팔로 감싸 안았다. 몸을 안으로 잔뜩 말아 어깨를 옹송그린 모습이 불쌍하게 느껴졌으나 딱히 동정심이 들진 않았다. 저가 뿌린 대로 거둔 거지, 뭐.

    “내일 백작님께 말씀드려서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게 해 줄게.”

    “가, 감사합……,”

    “물론 조건이 있다.”

    “어떤…….”

    렉토스는 조건이란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정말 있는 걸 죄다 말한 탓에 이젠 더 말할 게 남지 않은 탓이었다. 털어놓다 못해 리노 윌터의 스승이 ‘포르’였다는 쓸데없는 정보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정말 아는 게 바닥났다. 거짓말이라도 해서 목숨을 연명하는 게 좋을까, 머리를 굴리던 차였다.

    “폐하께서 암시장에 가신 이유를 알고 있냐?”

    “그 꼬마…… 아, 아니지. 그분께서 암시장에 오셨던 이유 말씀이십니까?”

    전에 이엘을 함부로 말했다가 앤디에게 호되게 혼이 났던 게 기억이 난 건지, 렉토스는 재빨리 단어를 수정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게…….”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다 말해.”

    다급해 보이는 앤디의 반응에 렉토스는 아주 잠깐 고민에 빠졌다. 꽤 중요한 정보 같은데 이걸 쥐고 받아먹을 수 있는 건 다 받아먹어 볼까? 하는 생각으로.

    그러나 금세 마음을 바꿨다. 패티스의 앞에서 그렇게 행동하다가 정말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이젠 제 목숨을 담보로 무모한 짓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결국 렉토스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늑대의 기름을 구하러 오셨었습니다.”

    “……뭐?”

    “늑대의 기름이요.”

    그때부터 이미……. 앤디는 마른침을 삼키며 렉토스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만 그때 저희가 있던 곳은 늑대들의 영토 끝에 걸쳐 있던 곳이라 늑대의 것은 취급하지 못했지만요.”

    “…….”

    “노, 노여워하지 마세요……. 다 지난 일이지 않습니까……?”

    “그럼 너 역시 지금 손발이 잘려 나가도 괜찮겠네.”

    “…….”

    “내일의 너는 오늘의 나를 과거로 생각할 테니. 다 지난 일이 되는 거잖아.”

    앤디의 살벌한 말에 렉토스가 입을 꾹 다물며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온전히 살아 나가려면 이 늑대 놈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 말고는 없을 듯하다.

    “……어쨌든 폐하께선 늑대의 기름을 요구하셨지만, 당시 암시장의 주인이었던 보르도는 기름 대신 새끼 우논 늑대를 폐하께 보여 줬다고 했습니다.”

    “보르도라면, 세잔티노 습격 때 도망쳤다가 하이에나들에게 붙잡혀 죽었던 그 턱수염의 이름인가?”

    “예, 맞을 겁니다. 덩치가 크고 턱수염이 났던 놈 맞습니다.”

    렉토스는 이미 죽어 버린 턱수염의 언급에 길길이 날뛰며 경멸하다가, 다시 앤디의 눈치를 보며 주춤거리듯 옆으로 떨어졌다. 아까 전부터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금방이라도 자신을 죽일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새끼 늑대라면…….”

    “예에. 전해 듣기로는 폐하께서 황녀의 반지를 보르도에게 지불하고 그 새끼 늑대를 사 가셨다고 했습니다.”

    주드. 내 사랑하는 동생……. 앤디는 잠깐 주먹을 쥐었다가 펴곤 생각을 정리했다.

    아마 주드는 그때 그녀가 늑대의 기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 기름의 용도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암시장에서 들어서 알고 있었겠지. 그러니 자신이 죽을 때 기름을 의도적으로 많이 흘려보냈던 것이다.

    “그게 다야?”

    “예, 예?!”

    “폐하와 암시장에 관해 알고 있는 게 그게 전부냐고.”

    “아…… 그, 그게요. 그게 전부……가 아니라! 기, 기억이 났습니다! 기억났어요!”

    “뭔데.”

    “폐하께선 무슨 실험을 하신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실험이라니?”

    “제게 황자의 반지를 주는 대가로, 독수리의 눈알을 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세잔티노 사건 직전에 말입니다.”

    젠장. 제발 아니길 바랐는데. 독수리의 눈알이라니……. 앤디는 밀려오는 현기증을 느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더 말하라는 듯 렉토스를 향해 손짓했다.

    “여러 가지 실험을 위해 재료들을 구하고 계시다며, 구체적으로 어떤 독수리의 눈알을 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예. 아직 나이가 어린 새끼 우논의 독수리였는데, 마치 직접 보신 것처럼 상당히 구체적이었습니다.”

    “그걸 구별할 수가 있나?”

    “독수리들은 품종……이 아니라, 큼큼. 그러니까 혈통마다 시력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적출해서 보관할 때 꽤 상세하게 기록해 둡니다. 그래서 찾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금서로부터 찢어졌던 페이지. 거기에 적혀 있던 세 가지. 늑대의 기름과 타이곤의 갈기, 그리고 ‘무언가’의 눈알. 불에 그을려 알아볼 수 없었던 ‘무언가’는 앤디의 추측대로 독수리가 맞는 듯했다.

    하지만 주드의 기름과는 달리, 그녀는 렉토스에게 찾아 달라고 요구했던 독수리의 눈알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렉토스가 묘사한 새끼 우논 독수리가, 어쩐지 르네의 영지에서 그녀가 애틋하게 아꼈다던 메이슨의 것인 듯하니.

    아마 이엘은 렉토스에게서 눈알을 받아 그 아이에게 곧장 돌려준 듯했다. 예전에 메이슨의 할아버지인 엔리케와 대화할 때 그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보면……. 그녀가 제 손주의 눈을 되찾아 줬다는 말을 했었던 것 같다.

    “아는 건 그게 끝이냐?”

    “예. 정말, 정말 그게 전부입니다. 제발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이젠 정말 절박에 가까운 매달림이었다. 렉토스는 이게 저가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손발을 싹싹 빌기 시작했다.

    “차, 착하게 살겠습니다! 제발 저 좀 여기서 나가게 해 주세요!”

    “넌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비밀 지키겠습니다! 함부로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맹세합니다!”

    “네가 여길 나가는 방법은 혀가 잘리는 것 말고는 없어.”

    소름 끼치는 말에 렉토스가 그 자리에 얼어붙듯 빳빳하게 굳었다. 혀, 혀라니……. 손바닥으로 제 입을 틀어막은 그는 재빨리 앤디의 바짓단에 매달리며 눈물을 쏟아 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요, 살려 주십시오!”

    “안타깝게도 어제 명령이 내려왔거든.”

    “네?”

    “너의 목숨은 어제부로 패티스 님께 넘어갔다.”

    “그, 그게 무슨……!”

    “폐하께서 너의 처분을 패티스 님께 넘기셨단 소리야.”

    제 바지를 붙잡고 벌벌 떨던 렉토스는 큰 충격을 받은 건지 뒤로 나동그라졌다. 쯧. 앤디는 혀를 한 번 차고는 갖고 왔던 음식을 그의 앞에 내려놓으며 마지막 자비를 베풀었다.

    “마지막 만찬이라고 생각하고 맛있게 먹어라.”

    “야,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저를 풀어 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내가 언제 풀어 준다고 했어? 치료해 준다고 했지.”

    “으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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