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18화 (318/488)

318화

“죄, 죄, 죄송…… 죄송합니다, 폐하!”

쯧. 이엘이 짧게 혀를 차곤 단검을 거두자, 그녀를 따라 하트도 겨누었던 검을 다시 검집 안으로 집어넣었다.

“포레스트. 전에도 말하지 않았니.”

“…….”

“짐을 지겹게 하지 말라고.”

“죄, 죄송합니다…….”

“이렇게 네가 네 위치를 모르고 무례히 굴면 다시 네 종족에게 돌려보낼 거야.”

“죄송합니다, 폐하! 다시는 이런 일 없게 주의하겠습니다.”

“그만 네 숙소로 돌아가 쉬렴. 나중에 다시 부르마.”

“예, 폐하.”

고분고분해진 포레스트는 눈도 감히 뜨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빠르게 제 숙소로 돌아갔다. 이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단검을 옆에 내려놓았다.

“폐하. 혹시 뱀의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저 뱀을 가까이하시는 거라면, 차라리 제가 조금 더 신경 쓰겠습니다. 폐하께서 굳이 저런 뱀과 함께하지 않으셔도 로빈을 견제하실 수 있도록.”

여태 조용히 지내던 하트가 참지 못했던 건지, 그답지 않게 먼저 이엘에게 충언을 올렸다. 웬만하면 제 선택에 반대하지 않는 그가 나설 정도면 다른 자들은 포레스트에 관해 진작부터 못마땅했을 것이다.

물론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뱀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르네와 같은 아군의 영지에선 편하게 지낼 수 있음에도, 포레스트 때문에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뱀은 상당히 교활하고 이기적이야. 경의 종족이나 늑대들처럼 종족 간 결집력이 썩 좋은 편도 아니지. 어쨌든 로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으니 그쪽에 눈 하나는 심어 두어야 했어. 아마 로빈도 마찬가지로 우리 쪽에 세작을 보내려 했을 테고.”

“그럴 바엔 차라리 철없지만 약삭빠른 뱀을 데리고 계신 편이 낫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아. 경도 봐서 알겠지만 포레스트는 제 주인인 로빈에 대한 충성도가 상당히 낮거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종족에 특별한 소속감도 없어 보였어.”

“뱀의 영지에서도 종종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았습니다.”

“응, 잘 섞이지 못하던 모양이야. 미끼로 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지. 게다가 저 아인 로빈보다 내게 더 관심이 많을 나이니까.”

그 말을 하며 이엘이 웃었다. 자신을 더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놈들보다는 차라리 대놓고 관심을 받길 원하는 어린 우논이 훨씬 낫다. 어쩔 수 없이 뱀을 가까이해야만 한다면 그나마 포레스트가 제일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경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뒤에서 다른 근위대나 기사단원들이 한두 마디 한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그들과는 관계없이, 뱀을 견디지 못한 제 인내심의 부족함 탓 때문에 여쭈었습니다.”

“후후. 조금만 기다려 봐. 언젠가 쓸 일이 있을 테니까.”

“예, 폐하.”

이엘이 그러길 원한다면, 하트는 뱀의 역겨운 모습 따위 충분히 견딜 준비가 되어 있었다.

*

“고모님이 왜 여기에…….”

일라이저의 걸음이 커다란 초상화 앞에서 멈춰 섰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뒷말을 잇지 못하고 충격에 눈만 여러 번 깜빡거렸다.

산책을 마친 이엘이 침실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일라이저의 호위는 끝이 났다. 부단장과 교대 후 오랜만에 숙소로 돌아가 눈이라도 붙일 생각이었는데……. 오늘따라 기분이 이상했다. 원래 가던 방향이 아닌 다른 쪽 방향으로 뜬금없이 발길이 향한 것이다.

르네의 공작성은 크고 아름다웠으나 일라이저는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 흐른 지금까지도 성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유달리 자신을 경계하는 독수리들 때문에 본래 다니던 길을 제외하면 다른 곳은 지나갈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다. 그랬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생소한 복도로 발길이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도 안 되는 그림을 발견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그의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지만 일라이저는 초상화에 넋을 놓느라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그 누군가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후작께선 당신의 고모님을 알고 계신 듯하군요. 그분과 매우 닮은 릴리 님의 초상화 앞에 멈춰 선 걸 보니.”

엔리케가 뚜벅뚜벅 다가와 일라이저의 옆에 섰지만, 그때까지도 일라이저는 엔리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눈엔 오로지 릴리의 초상화뿐이었다.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습니다.”

“…….”

“각하의 부친이 그러하겠지요.”

그제야 일라이저의 고개가 엔리케를 향해 돌아갔다. 엔리케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앞에 걸린 커다란 초상화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일라이저와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마치 꼭 내 말을 알아들으라는 듯, 정확한 발음으로 천천히.

“이분은 공작님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시자,”

“…….”

“1차 전쟁에 희생당하신 제 종족의 유일한 공녀님이십니다.”

르네의 여동생이라고……? 이 초상화를 처음 봤을 때보다 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분명 자신의 영지에 있는 고모님의 초상화와 똑같이 생긴 그림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일라이저에게 엔리케는 태연히 웃으며 말을 건넸다.

“각하께서도 공녀님을 알고 계십니까?”

“아니오……. 그저 어디서 많이 본 듯하여.”

“착각이실 겁니다. 공녀님은 각하께서 태어나시기도 전에 돌아가셨으니.”

“…….”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폐하께서도 이곳을 다녀가셨는데, 그때 각하께선 폐하와 함께 계시지 않으셨던 모양이군요.”

엔리케의 입에서 나온 이엘의 존재에 일라이저의 미간이 좁아지더니 손끝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여길 다녀가셨소?”

“예. 이곳을 찾아 공녀님의 초상화를 꽤 오랜 시간 지켜보셨다고 하던데요.”

일라이저는 문득 이엘이 자신의 영지에 도착하던 날, 입구에 걸려 있던 제 부모님과 고모님의 초상화를 한참 바라보던 모습을 떠올렸다. 설마 폐하께선 알고 계셨던 건가. 내 고모님의 초상화와 공작의 여동생이라는 이 초상화가 서로 닮았다는 걸.

“폐하께선 공녀를 알고 계셨소?”

“물론입니다.”

“…….”

“즉위하시기 전, 저희 영지에 머무르실 때부터 릴리 님을 알고 계셨을 겁니다. 르네 님께서 말씀하셨을 테니.”

“…….”

“폐하께서 이곳 공작성에서 즐겨 찾으시는 방 또한 릴리 님의 침실이니까요.”

맥이 탁 풀린 일라이저는 흔들리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길게 숨을 뱉었다.

이상했다. 독수리들이 유독 자신을 경계하고 혐오하는 것처럼 쳐다보는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원래 인간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종족이니, 그들의 영지에 자신이 들어온 게 불만일 수 있다 여기며 가볍게 넘겼다. 크게 문제 삼을 만한 일이 아니기도 했고.

그런데 릴리라는 이 여자의 초상화를 마주한 순간. 그게 가벼운 이유 때문만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꺼림칙한 진실이 숨겨져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경에게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소?”

“말씀하십시오.”

“혹시 내 선친을 알고 있소?”

“루시우스 러셀 후작을 모르는 독수리가 있을까요.”

“…….”

“후작님의 부친께선 1제국 때부터 훌륭한 기사단장이셨으니까요. 위태롭던 가문을 일으키셨던 분이 아니십니까. 그 제국을 살았던 자들 중 그분을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르겠군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다. 분명 루시우스 러셀 후작을 모르는 ‘독수리들’이 있을까요, 라고 말했다. 독수리들이라고, 주어를 명확히 했어. 일라이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억세게 쥐며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지를 물은 것이오.”

“…….”

“경. 아니, 경의 이름과 소속부터 말해 주시오.”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엔리케라고 하며, 궁수대의 부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일라이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엔리케의 이름은 몰랐지만, 일라이저는 그와 예전에 마주한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뱀에게 납치당한 이엘을 구하기 위해 앤디와 함께 독수리의 영지를 통과하고자 이곳에 왔었다. 그때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자가 바로 엔리케였던 것이다.

“엔리케 경.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경은 내 선친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였소?”

“저는 아닙니다.”

“경이 아니라면, 이곳에 내 선친과 개인적으로 아는 이가 있었다는 뜻이 되겠군.”

그러나 엔리케는 일라이저의 마지막 말에 어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엔리케 경.”

“엔리케.”

일라이저가 그를 다시 불렀을 때, 복도 끝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가 똑같이 엔리케를 불렀다.

“예, 각하. 찾으셨습니까.”

엔리케는 일라이저에게 가벼운 인사를 하곤, 자신을 부른 르네에게 가 버렸다.

“폐하께서 오늘은 만찬실에서 정찬을 하시겠다고 하니, 미리 일러두어 준비하도록 해라.”

“예, 각하. 부족함이 없게 준비하겠습니다.”

일라이저는 입을 꾹 다문 채 먼저 엔리케를 돌려보낸 르네를 노려보듯 쳐다봤다. 그러나 르네는 고요하게 그의 시선을 받아 내기만 했다.

“공작님. 잠깐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결국 먼저 정적을 깬 건 일라이저였다. 르네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그대로 복도를 지나쳐 떠나려 했기 때문에 그 전에 붙잡아 세운 것이다.

“잠깐이면 됩니다. 공작님께 직접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는 후작과 할 말이 없소.”

“제 선친을……,”

“그만.”

“…….”

“피차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될 텐데 굳이 끄집어낼 필요가 있을까?”

독수리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일라이저는 이런 비슷한 감정을 어디선가 느낀 적이 있다.

“그럼 이 초상화.”

“…….”

“제발 이것만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초상화. 그 단어에 경멸이 넘치던 르네의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붙잡는 일라이저를 떨쳐 내고 금방이라도 그 자리를 떠나 버릴 것 같던 르네가, 거짓말처럼 성큼성큼 일라이저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일라이저가 가리킨 초상화 앞으로.

“이 복도는 아무에게나 허락된 곳이 아니오. 곧 출입을 금할 테니 후작도 이만 돌아가도록.”

“공작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제 고모님의 존재.”

“…….”

“아니면 제 선친…… 큭!”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