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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17화 (317/488)
  • 317화

    *

    “대체 저건 뭡니까?”

    “뱀입니다.”

    “……누가 그런 걸 물어봤습니까?”

    “폐하께서 로빈 공작의 영지에서 데리고 오신 뱀입니다.”

    벽에 기대선 채 팔짱을 낀 레온은 너무나도 사무적으로 대답하는 일라이저를 노려봤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지, 그게 아니면 자신과는 말을 섞기 싫다는 건지. 저게 뱀인 걸 누가 모르냐고.

    그러나 말 섞기 싫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라. 레온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제 시야에 곧장 들어온 역겨운 뱀의 아양에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폐하께서 저딴 걸 데려오신 이유가 있으시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후작은 아는 게 있긴 합니까?”

    “폐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저도 모릅니다.”

    대놓고 빈정거리는 제 말에도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딱딱한 대답이 돌아왔다. 말을 말아야지…….

    어쨌든 지금 레온은 따분하기 짝이 없는 일라이저와 함께 이엘의 산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을 휴양지처럼 여기길 원한다던 르네의 바람처럼, 이엘은 식사도 잘 챙기고 산책도 매 시간 잊지 않았다. 그 덕에 호위를 맡은 자신들도 할 일이 줄어 편하긴 한데…….

    문제는 눈에 거슬리는 놈 하나가 들러붙었다는 것이다.

    “폐하. 이것 보세요. 어때요?”

    “그러다 넘어지겠구나, 포레스트.”

    “하지만 여긴 볕이 좋아서 따뜻한걸요. 너무 좋아요!”

    천적인 독수리의 영지를 좋아하는 뱀이라니……. 이 자리에 르네가 있었다면 무슨 표정을 지었을지 새삼 궁금해졌다.

    그녀가 로빈의 영지에서 데리고 왔다던 뱀은 저렇게나 철이 없었다. 마치 금방 알에서 깨어난 새끼 뱀처럼.

    잠시라도 이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고, 그녀의 시선이 다른 남자에게로 향하는 걸 견디지 못했다. 어떻게든 그녀의 눈을 잡아 두려 부단히 노력하는 꼴이 레온을 비롯한 모두에게 못마땅했지만, 별수 있나. 이엘이 놈을 좋아하는 듯한데.

    “포레스트. 오랜만에 네 노래가 듣고 싶구나.”

    “알겠습니다!”

    게다가 놈은 약삭빠르기까지 했다. 제게 조금이라도 기회가 오려 하면, 놓치지 않고 재빨리 낚아채 갔다. 그게 그녀의 마음에 들었던 걸까? 하긴. 주변에 있는 놈들이라곤 하나같이 이렇게 딱딱한 놈들뿐이니, 뭐……. 레온은 적극적이지 못한 제 답답한 성격을 탓하며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럼 내 영지에 네가 와 주면. 그땐 네가 나와 함께 있어 줄 거야?’

    순간적인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에게 그렇게 물었을 때. 이엘은 어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주저하며 말을 아꼈을 따름이다.

    분명 가까워졌는데. 그녀가 정체를 숨기고 제 영지에 왔던 몇 년 전과 비교하면, 분명 물리적으로 더 가까워졌는데. 왜 나는 지금이 더 멀어진 것 같지? 왜, 거리가 더 벌어진 것 같지?

    아니. 확실히 멀어졌다. 저 뱀과 자신을 비교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답이다. 이건 답답한 제 성격 탓만이 아니었다.

    “……거절당하는 게 무서운 거겠지.”

    그녀와의 관계에서 잃을 게 없는 저 뱀과는 달리, 자신은 그간 이엘과 함께 쌓아 온 추억마저 빼앗길까, 그게 두려운 탓이겠지.

    누군가에겐 별것 아닌 추억이겠지만 레온에겐 그녀와의 추억이 생의 전부라서. 그것마저 빼앗기면 살아갈 희망이 없어지니, 한 발짝 내딛는 것도 두려운 것이다.

    레온은 씁쓸함을 감추고 조용히 뒤돌아서며 먼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저의 공연에 와 주신 폐하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 역할극에 심취한 포레스트가 제 옷의 양끝을 움켜쥐고 우아하게 인사하자 이엘이 까르르 웃었다. 그녀는 포레스트의 아양이 퍽 마음에 든 듯했다. 뱀은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목을 가다듬으며 노래 부를 준비를 마쳤다.

    한편 이엘은 제 가까이에서 호위하던 근위대에게 뒤로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이엘이 폭이 넓은 의자 위에 몸을 반쯤 기대는 것을 확인하곤, 그녀의 머리 위에 빠르게 그늘막을 설치한 뒤에 일라이저가 있는 곳으로 물러났다.

    “어떤 곡을 들려 드릴까요, 폐하?”

    “음…… 전에 네가 처음 내게 불러 줬던 노래 기억하니? 이렇게 시작하는 음이었던 것 같은데.”

    이엘이 허밍으로 어설프게 시작 음 몇 개를 찍자, 눈치 빠른 포레스트가 자연스럽게 그 음을 이어받았다. 곧이어 목이 완전히 풀린 뱀이 가사를 넣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이 어색하고 기묘했다. 여자의 주변엔 인간을 싫어하던 하이에나가 근위대장이 되어 서 있었고, 그녀만을 위해 천적인 독수리의 영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뱀이라니. 그리고 없느니만 못하던 삶을 살았던 황녀가 황제가 된 세계라니.

    노래가 점점 클라이맥스로 향하자 포레스트는 심취한 듯 눈까지 감고 온 힘을 다했다. 이엘은 어떻게든 제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뱀이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고 가엽기도 했다.

    로빈이 저 어린 뱀을 통해 제게서 뭘 뜯어 가려는 건지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그녀는 언제까지나 포레스트를 뱀으로만 바라볼 테니.

    이엘은 뱀의 노래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폭탄 같은 말을 던졌던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용의 암컷이…… 존재하는 생물체였습니까?’

    스완이 패티스에게 용의 암컷을 만났다며 털어놨던 그날, 이엘도 르네를 비롯하여 믿을 만한 우논 몇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몇 달 전 그녀가 스완의 능력에서 깨어나지 못했던 게 ‘그녀’ 때문이었다고.

    그 충격적인 발언에 반응은 제각기 달랐지만 대체로 비슷한 뜻이었다. 용의 암컷이 정말 살아 있는 존재였냐며.

    ‘그 여자가 폐하께 바라는 건 무엇이었습니까?’

    ‘별다른 건 없었다. 그대들에게 말했듯, 백조와 관련한 힌트만 줬을 뿐.’

    빠르게 이성을 찾은 르네가 침착하게 물었지만 이엘은 전부를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과 ‘목소리’의 계약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말할 수 없었으니까. 대신 스완이 만난 ‘그녀’에 관해 전해 주었다.

    ‘그럼 그 여자의 꿈에 갇혀 있다는 사람들이 누군지를 먼저 알아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맞아. 내가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스완의 능력을 빌리지 않으면 현재로서는 어려울 거야.’

    레타에서 용을 만났을 때, 그녀는 이엘에게 그렇게 말했다. 너의 주변에 있는 독기 때문에 접촉이 쉽지 않았다고. 이엘을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는 ‘목소리’의 흔적이 용의 접근을 방해하고 있다고. 그때 용은 스완의 능력에 스며들 수 있었기에 이엘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내 짐작인데, 그녀는 이전부터 내게 꿈으로 끈질기게 신호를 보내왔던 것 같아. 다만 무슨 이유 때문에 만날 수 없었던 모양이고.’

    ‘그럼 그때 레타에서 폐하께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스완의 성력 때문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맞아. 그러니까 정리하면, 현재 스완은 제도에서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 아일 이곳으로 데려오는 것은 힘들어. 시간도 없을뿐더러, 오드의 성력을 사용하기엔…… 오드가 너무 지친 상태야. 그간 성력을 너무 많이 썼으니까 그에게도 휴식을 줘야 해. 또 스완은 다른 종족에겐 들키면 안 되니 한곳에 머무르는 편이 나아.’

    ‘그렇군요.’

    ‘어쨌든 나는 그녀를 직접적으로 만나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게 지금 당장 시급한 일이 아니기도 하고.’

    ‘그럼 그 일은 스완이 해결해야 하겠네요.’

    ‘응. 그래서 스완에겐 미리 말해 뒀어. 용이 그 아일 이따금 찾아간다고 했으니, 그녀를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야.’

    아직은 특별한 단서가 되지 못하는 존재들 때문에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지금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때를 기다려 기회를 잡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여긴 스완에게 맡기는 게 낫다.

    ‘하지만 폐하. 용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동화에나 나올 법한 종족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 용이 정말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니까. 나 역시 그랬고.’

    ‘그럼 그 여자의 꿈속에 갇혔다던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이종족일까요?’

    단서를 조금이라도 좁히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일라이저의 추측에 이엘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종족 사이에서도 용의 암컷은 알려진 게 없다고 하지 않았나? 결국 조건은 이종족이나 인간이나 똑같아. 그 암컷 용이 스완이나 나에게 나타난 것처럼, 꿈으로 특정 인간에게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거니까.’

    ‘그렇군요. 생각보다 범위를 좁히는 게 어렵겠네요.’

    ‘하지만 내 생각엔…….’

    이엘은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어떤 물증도 없는 상태라 함부로 말하긴 어려웠지만, 스완이 했던 말이 자꾸 떠오른 탓이었다.

    ― 폐하. 커다란 퍼즐판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폐하께서 알고 계신 것 중에 버릴 건 하나도 없어요. 조금이라도 알고 계신 게 있으시다면, 폐하의 감을 믿고 그것을 맞춰 주세요.

    ‘두 여자…….’

    ‘네?’

    ‘……성년이 안 된 듯한 사람을 꿈에서 본 적이 있어.’

    황위에 오른 뒤로 주기적으로 꾸는 꿈이 몇 있었다. 그중 하나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자는 사람이 주기적으로 나타났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한 명이 아니었던 듯하다. 눈을 감은 모습이 비슷해서 한 사람으로 착각했던 것 같았다.

    ‘꿈에서 보셨습니까?’

    ‘내 예상이 맞다면. 그게, 정말 퍼즐판이 맞다면 말이야.’

    누굴까, 그 소녀들은? 성년의 언저리에 있는 듯했는데. 그 아이들은 왜 내 꿈에서 눈을 감고 자고 있었을까. 마치 죽은 것처럼 누워 미동도 하지 않고. 대체 내게 원하는 게 뭘까.

    그리고 그 꿈을 용이 보여 준 게 맞다면…… 그녀의 능력 속에 갇혔다던 사람들이, 혹시 그 아이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폐하.”

    “…….”

    “폐하?”

    노래를 마친 포레스트가 이엘을 불렀지만, 그녀는 자신이 아닌 자신의 너머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여태 제 노래를 듣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뱀은, 이엘이 제겐 관심이 없었다는 걸 알아채자 입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폐하!”

    포레스트가 미간까지 좁히며 그녀의 앞으로 불쑥 몸을 들이밀었을 때였다.

    “헉……!”

    “누가 그렇게 무례히 굴라고 했지?”

    이엘이 바로 옆에 있던 단검을 들어 포레스트의 목을 향해 겨누었다. 그러나 그녀보다 더 빨리 움직인 하트는 이미 검으로 뱀의 얼굴에 겨눈 상태였다.

    날카로운 날붙이들이 제 눈앞에 바짝 다가와 있는 것에 기겁한 포레스트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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