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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16화 (316/488)
  • 316화

    “자세한 건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근데 백작은 영지에 없나 보오? 그와 상의하고 싶어 찾아왔는데.”

    “아버지께선 영지 일로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며칠 걸리실 듯한데, 괜찮으시다면 찾아오신 용무를 제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버지께서 가문의 일을 제게 일임하고 떠나셨기에.”

    노아는 우아하기 그지없는 올리세스 놈의 말투에 하마터면 인상을 와락 찌푸릴 뻔했다. 그에게서 로빈의 모습이 겹쳐 보인 탓이다. 속이 음험한 놈들은 하나같이 저 모양인가. 제 앞에서 저자세로 나오며 빙긋 웃는 낯짝이 더 역겨웠다.

    “그럼 저택 안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집사, 각하께 드릴 차를 내오게.”

    “예, 작은 주인님.”

    노아는 올리세스를 따라가면서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구석구석을 살폈다.

    우선은 가문의 분위기를 먼저 살폈다. 윌터 백작가가 명망 높은 가문인 것은 예전에도 느꼈으나, 전쟁으로 인해 한차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모습을 빠르게 회복한 게 의외였던 것이다.

    원래 윌터 가문의 가신이었던 자들은 새로운 제국이 세워졌음에도 제도 내에서의 새 출발이 아닌, 다시 윌터 가문의 가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고 들었다. 보통의 인간들과 다른 결속력이다. 가문 하나가 마치 종족 하나라도 된 것처럼.

    “오면서 봤는데, 백작령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번화한 듯하오.”

    “워낙 위치가 좋았으니까요. 이전의 제국에서부터 윌터 백작령은 땅 자체가 비옥하고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남작의 사업 수완이 좋다고 폐하께서 칭찬하셨다고 들었는데. 영지를 직접 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오.”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그저 타이밍이 좋았을 뿐인걸요.”

    연신 웃는 얼굴이었는데도 묘하게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이 정말 로빈을 닮았다.

    “여기 앉으십시오.”

    응접실에 도착해 안내받은 곳에 앉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저택은 전쟁에 휘말려 한 번 무너진 뒤에 재건된 곳일 텐데도, 마치 아주 오랜 시간 이곳에 멀쩡히 존재했던 것처럼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게다가 복도 곳곳에 걸린 고가의 미술품들. 아마도 일라이저의 영지에 세작으로 보낸 ‘루벤 단’이라는 궁정화가의 솜씨겠지. 그는 복원 실력도 어마어마해서 화마에 그을렸던 미술품도 옛 모습으로 손쉽게 복원시켰다고 했으니까. 그런 식으로 복원한 미술품들을 귀족들에게 팔아 돈을 불려 나가고 있는 듯했다.

    “각하께서는 혹 그림에 관심이 있으신지요?”

    마치 제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올리세스가 먼저 그림에 관해 물어 왔다. 이쪽은 루벤과 그의 조카를 역으로 이용할 생각이기에 미리 꺼내지 않았던 건데. 먼저 물어봐 주니 고마울 따름이군. 그러나 노아는 짐짓 모른 체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쪽으로는 문외한이라 잘 모르오.”

    “각하께 드리고 싶은 그림이 한 점 있는데, 괜찮다면 한번 봐 주시겠습니까?”

    “어차피 봐도 내겐 감흥이 없을 텐데.”

    “제 마음의 선물입니다. 1제국 때 그려진 그림으로 제법 값어치가 되니,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파셔도 괜찮습니다.”

    노아가 딱히 싫어하지는 않는 듯하자, 올리세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서둘러 집사장을 시켜 그림을 하나 가져오게 했다.

    “붉은 장미입니다. 각하의 가문 문양이 붉은 장미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여 이 그림을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붉은 장미.

    예전엔 올리세스의 말처럼 제 가문의 상징물에 불과했는데, 지금의 노아에겐 이엘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 버렸다. 지금도 장미를 보자마자 곧장 그녀를 떠올리는 걸 보면, 마치 학습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래, 정말 보고 싶군. 고작 일주일 정도 지났을 뿐인데 그녀의 곁이 몹시도 그리웠다. 아무 생각 없이 이엘을 품에 끌어안고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러다 정말 응석받이가 될 것 같아 헛웃음이 나왔다.

    노아는 그리움에 잠겨 한참 그림을 감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올리세스를 쳐다봤다.

    “얼마요?”

    “각하께 드리는 제 선물입니다.”

    “아니. 값을 지불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받을 수는 없소.”

    “친교 목적으로는 어려우실지요? 이전부터 각하의 가문과 가깝게 지내고 싶었습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값어치가 상당한 것을 그냥 받을 수는 없소. 조금 전 남작이 직접 말하지 않았소? 값어치가 나간다고.”

    쓸데없이 올곧기는. 그냥 모른 척하고 받으면 좀 좋아. 올리세스는 슬슬 차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애써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저희 상단이 달에 한 번, 각하의 영지로 입성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상단? 어떤 상단을 말하는 것이오? 남작이 소유한 상단의 수와 종류가 상당한 걸로 알고 있는데.”

    사실상 웬만한 것들은 독점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올리세스는 셈이 밝은 자다. 제국이 막 건국되었을 때, 모두가 처음이라 혼란한 틈을 노려 빠른 속도로 세력을 불려 나갔다.

    상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2차 전쟁 때 가지고 도망쳤던 보석 몇 개로 지금의 거대한 상단주가 되기까지, 계산도 빠르고 큰 이익을 위해 작은 손해쯤은 가볍게 떠안고 갈 만한 대범함도 있다. 제 이익을 위해서라면 귀족의 품위 따윈 쉽게 버릴 만큼.

    “별건 아닙니다. 저희 영지에서만 자라는 특수한 작물이 있어, 그것을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작물? 내가 늑대라는 건 알고 하는 소리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다만 우논은 매 끼니마다 육식을 하는 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

    “축복의 나무에서 나오는 열매도 드시지 않습니까?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축복의 나무에서 자라는 열매에 비견할 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오?”

    “설마요. 그런 불경한 말씀은 거둬 주십시오. 축복의 나무는 신께서 직접 만드시고 저희에게 선물로 주신 가장 완벽한 나무 아닙니까? 어찌 그와 같은 것에 비하겠습니까.”

    질겁하듯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흔들어 댄다. 자신을 그런 불신자로 매도하지 말아 달라는 듯, 올리세스는 화들짝 놀란 척 한사코 부정했다. 노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올리세스의 말을 곱씹어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왜?”

    “그저 화친의 표시 정도면 됩니다. 저는 각하께 그 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상단이 각하의 영지에서 큰 반응이 없어도 좋습니다.”

    “남작의 말처럼 내 종족은 그런 품목엔 관심이 없을 거요.”

    “괜찮습니다.”

    꽤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오자 올리세스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노아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최근 무기류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왜 그게 아니고 작물을…….

    노아가 이끄는 황실 제 1기사단은 단원의 전원이 늑대로만 이루어졌다. 때문에 올리세스가 제게 영지 입성을 요구했을 때, 노아는 그가 무기류를 거래 품에 넣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근데 뜬금없이 작물이라니?

    “차가 비었군요. 집사, 다른 차를 내오게.”

    “예, 작은 주인님.”

    이엘과 헤어졌던 뱀의 영지에서 윌터 백작령으로 오려면 노아는 다시 제 영지를 지나쳐 반대 방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던 터라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그래서 목이 탔던 건지 노아는 제 앞에 놓였던 차를 벌써 두 잔이나 비운 뒤였다.

    그걸 올리세스는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그는 노아가 불편하지 않게 세심하게 살피려 노력했고, 빈 찻잔을 채우는 것 또한 그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전의 것과는 다른 차입니다.”

    “…….”

    “향이 더 깊고 진하니, 한번 맡아 보시고 드시지요.”

    올리세스는 집사에게서 티포트를 받아 손수 노아의 잔에 차를 따라 주고는 웃으며 권했다. 그의 말처럼 조금 전의 평범한 차와는 다른 차 향이 코를 찔렀다. 노아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저도 모르게 향을 맡았다.

    “어떠십니까? 아마 각하께서도 좋아하실 듯합니다.”

    이건……. 노아는 순간적으로 제 코 안으로 들이치는 자극적인 향에 취할 뻔했다. 후각이 특히 예민한 제게, 감히 향을 먼저 맡아 보라고 권해?

    “각하?”

    “향이…… 난생처음 맡아 보는 독특한 향인 듯하오.”

    “예, 맞습니다. 향보다 맛이 더 좋습니다. 한번 드셔 보십시오.”

    올리세스의 설명을 흘려듣던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마시는 척 가볍게 한 모금만 입에 담았다. 레온과 비교하면 고작 이 정도 양을 먹었다고 중독되거나 환각 증세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노아는 떠나기 전 이엘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최대한 적은 양을 삼켰다.

    ‘노아. 이 향과 이 꽃. 그대도 기억하고 있는 게 좋아.’

    ‘이게 무엇입니까, 폐하?’

    ‘포필렌.’

    ‘…….’

    ‘이 포필렌을 대량으로 재배하던 모리아 땅이 스라소니로 인해 모조리 불타 버렸어. 하지만 놈이 포기할 리 없지.’

    ‘설마 윌터 백작령에도 재배를 하고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윌터 백작은 저택이 있는 백작령 외에도 외따로 떨어진 영지 몇을 갖고 있으니까. 게다가 그런 식이면 주인 없는 땅이 상당하거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는 땅이.’

    원칙적으로 주인이 없는 땅은 모두 황가의 소유였지만, 유일하게 누구의 소유에도 들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바다와 맞닿은 땅들. 그곳은 전부 버려져 있는 상태였다.

    이 커다란 대륙은 하이에나들의 영지를 제외하면, 바다와 맞닿은 땅의 끝이 전부 버려져 있다. 위험한 바다와 인접해 있고, 워낙 오랜 시간 비워져 있었기에 그곳을 개간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모두의 관심을 벗어난 그곳에 본격적으로 재배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물론 쉽지 않겠지. 특히 위협적인 바다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게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사병과 돈이 필요했을 테고.

    그러나 바다가 자주 들이치며 누구에게서도 피해를 입지 않은 땅.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 자연 그대로 머물러 있는 땅. 따라서 그 어떤 지역보다도 땅이 비옥할 것이다. 마치 하이에나의 영지가 그러하듯. 욕심이 많은 올리세스가 그런 곳을 그냥 놔두었을 리 없지.

    ‘어쨌든 포필렌 꽃의 모양과 향 정도는 그대도 알아 두는 게 좋아. 놈이 공작에게 뭔 짓을 할지 모르니.’

    우논인 자신에게 그깟 포필렌 꽃으로 무슨 위협을 주겠냐마는, 결과적으로 보면 이엘의 충고가 들어맞았다.

    “차의 맛이…… 깊소.”

    “그렇지요, 각하? 그게 바로 윌터가의 자랑이며, 각하의 영지에 입성하게 될 품목이랍니다.”

    미친 새끼가 따로 없군. 이젠 아예 대놓고 포필렌을 유통시키겠다?

    “아마 각하의 가신들도 좋아할 겁니다.”

    “…….”

    “각하께서도 더 좋아하시게 될 거고요.”

    노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찻잔을 입에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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