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두 사람은 일부러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곳으로 향했다. 가면서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 듯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사실 이곳에 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밀린 업무가 많아 레온과 여유롭게 대면하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레온은 보채지 않고 여태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제가 폐하의 귀한 시간을 뺏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바쁜 일은 다 끝났어. 그리고 예전엔 내가 후작의 귀한 시간을 뺏지 않았나? 그때의 나와 비교하면 후작은 시간을 뺏는 것도 아닌걸.”
그녀가 레온의 영지에 머무르면서 그와 함께 새끼 타이곤 나드를 산책시켰던 일을 언급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건 이엘의 오해다. 그 시간은 그녀가 뺏은 게 아니라, 도리어 레온이 그녀의 시간에 끼어든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레니. 아까 중앙 분수대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는 이름 모를 꽃들을 보았나?”
“예, 보았습니다. 야생화인 듯하더군요.”
“응, 맞아. 예전에 내가 르네 공에게 주었던 꽃과 같은 종류라고 하더군.”
그녀의 말에 레온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그 딱딱한 독수리가 생긴 거랑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제법 많이 하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후작의 영지도 후원이 무척 예뻤던 걸로 기억하는데.”
“올해는 더 많은 꽃을 심었고, 잘 자라고 있습니다. 보시면 폐하께서도 흡족하실 거예요.”
“꽃을 피우는 게 어렵다며 짐더러 꽃을 피우고 떠나라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
“농담이야.”
저가 생각해도 그때의 자신이 민망하고 부끄러웠던 건지, 레온의 귀 끝이 조금 붉어졌다. 이엘은 그의 반응을 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리곤 다시 레온을 끌어 한적한 곳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그때 포필렌을 발견해서 그대의 숙면에 도움이 됐으니 다행이지 않나?”
“폐하께선 저의 은인이십니다.”
“후작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
“그 꽃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숙면도가 달라지니까요.”
역시 아직도 복용 중인 모양이었다. 포필렌이 이종족에게도 중독성과 환각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레온의 상태를 확인해야만 했다. 그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사용해 오고 있었으니까. 이엘은 웃던 얼굴을 지우고 조금은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에 있었던 스라소니의 일을 기억해? 모리아 땅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려서 귀족들을 불러 회의를 했던 그 일 말이야.”
“예, 물론이에요. 그날 저도 참석했으니까요.”
“그 습격의 원인이 된 게 포필렌이었어.”
포필렌이 왜? 레온은 의문을 담은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봤다. 이엘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를 데리고 더 으슥한 곳으로 향하며 속삭였다.
“윌터 백작에겐 올리세스 윌터라는 아들이 있어.”
“알고 있습니다. 남작 위를 받았던 자가 아닙니까?”
“맞아. 놈이 모리아에 포필렌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어.”
“포필렌을요? 어째서…….”
“전에 내가 정신을 잃은 그대에게 포필렌을 주기 위해 그 꽃을 아주 잠깐 입에 머금었던 것을 기억하나?”
“네, 기억합니다.”
그걸 어떻게 잊을까. 레온은 그날 제 마음을 이엘에게 모두 줘 버렸다. 높게 쌓았던 장벽이 와르르 무너졌던 게 그날 밤이었다. 고통으로 잠을 못 이루고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던 자신을 위해 꽃밭을 뛰어다니느라 저 작은 발에 생채기가 무수히 났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잊어.
“그때 내가 꽃을 입에 머금었던 건 아주 잠깐이었어. 그런데도 약효가 강하게 작용했고, 결국 나는 후작의 침대에 쓰러져 버렸지.”
“설마 그럴 목적으로 포필렌을 재배하고 있는 겁니까?”
“응, 맞아.”
끔찍한 놈들. 레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어쨌든 인간들 사이에서 저 꽃이 유통되기 시작한다면 그땐 심각한 피해가 제도를 덮칠 것이다. 단순한 중독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포필렌의 효능을 악용하여 나쁜 곳에 쓸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들에겐 포필렌이 위험하다고 했으니 유통되기 전에 처리하는 게 좋겠군요.”
“인간들에게만이 아니야.”
“예?”
“이종족에게도 마찬가지야. 포필렌은 인간과 이종족 모두에게 위험해.”
“…….”
“왜 스라소니들이 모리아를 쳤겠어. 올리세스가 재배한 포필렌을 소라소니의 몇몇 테르들이 복용하게 됐고 그로 인해 환각 증세가 있었던 듯해.”
레온은 이엘의 말을 잠자코 듣다가 짧게 한숨을 쉬곤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우논에게도 약효가 생기는지 확인하고 싶으신 거죠? 저는 4년이 조금 넘게 약을 복용해 왔으니 저의 중독 정도를 조사하면 될 거예요.”
“……뭐?”
“혹시 제가 아직 중독되지 않았다면 폐하와 오드 님의 감시하에 연구에 피험자로 참여하겠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엘이 경악에 휩싸인 채 레온의 팔을 거세게 붙잡아 세웠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내질렀다가 허탈함에 뒤로 주춤하며 힘없이 말을 이었다.
“레니. 대체 무슨 말이야? 내가 널…… 실험용으로 쓰겠다고 이런 말을 꺼낸 것 같아?”
“그게 아니라 제가 폐하께 도움이 되어 드리겠다는……,”
“그만해!”
“…….”
“난 그냥 네가 포필렌을 그만 복용하길 원해서 그랬어.”
울음에 먹힐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에 레온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이엘이 자신에게 실험의 대상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게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저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자신이 자처했을 뿐이다.
“네가 어린 시절을 얼마나 아프게…… 얼마나 힘들게 보냈는지 알고 있는데. 내가 너에게 그런 말을 할 것 같아?”
“죄송합니다, 폐하. 폐하를 그런 식으로 몰아가려고 한 말이 아니었어요. 그냥 제가 자원해서……,”
“어떻게 자원한다는 말을 해!”
“…….”
“왜 네 자신을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어? 그 시절이 괴로웠다고, 힘들었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어떻게 실험이란 단어를 입에 올릴 수가 있어?”
황위에 오른 뒤로는 눈물은커녕 약한 소리 한번 내뱉지 않던 이엘이, 바보처럼 제 앞에서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리고 있었다. 레온은 제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폐하…….”
“물론 네가 그때를 잊었을 리 없다고는 생각했어.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피험자가 되겠다는 말을 해……. 왜 넌 아직도 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야, 왜.”
“나타니엘.”
“넌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응?”
레온이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으며 다정하게 달랬다. 그의 금회안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 말을 듣는 이엘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자신의 불행함으로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해 놓고…….
“미안해. 나타니엘. 네가 마음 아파할 거라고 생각을 못 했어. 내가 잘못했어, 엘. 미안해.”
“…….”
“미안해. 응?”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은 그녀의 울음에 약해서. 레온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손등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주는 게 고작이었다.
“내가 나빴어. 그런 말 하지 않을게, 다시는.”
“약속해, 레니.”
“응. 약속할게.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포필렌은……,”
“끊을게. 괜찮아, 그 정도는. 그 꽃 없이 살아온 시간이 수십 년이야. 괜찮아.”
“끊으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야. 네가 걱정돼서 그래. 네가 그 꽃에 중독이라도 됐을까 봐.”
“난 괜찮아. 지금도 멀쩡하고. 그렇잖아도 내가 너무 약물에 의존하는 건 아닌가 싶었어. 끊을 때가 된 것 같아. 그러니까 끊을게.”
이엘은 자신을 달래기 위해 빠르게 말을 쏟아 내는 레온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곤 코를 훌쩍거리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니. 억지로 끊지는 마. 차근차근 양을 줄여 나가자.”
“응.”
“난 네가 고통 때문에 밤을 지새우는 것도 싫고, 그 꽃에 중독돼서 환각을 보는 것도 싫어.”
“알아.”
“예전에 나랑 노아가 네가 잠들 때까지 네 곁을 지켰던 것. 기억나?”
“응.”
그날이 떠오른 건지 레온이 피싯 엷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엘이 제 영지에 머물렀다가 떠나던 마지막 날 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평소처럼 고통을 억누르며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끅끅거리던 자신을 찾아온 그녀가 밤새 제 곁을 지켰다.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제 친구 역시.
물론 레온은 노아가 들어오는 건 보지 못했다. 고통이 사라지고 정신이 돌아왔을 땐, 축축해질 정도로 제 손을 붙잡고 있던 이엘의 작은 손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그러고 나서야 그녀를 감싸듯 체온을 데워 주고 있던 커다란 늑대가 눈에 들어왔다.
“레니.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네 곁에 누군가 있으면 고통은 덜해질 거야.”
“알아. 네가 내 침실에 있을 때 고통이 사라졌던 것처럼.”
“그래. 그러니까 혼자 자지 말고 누구라도 좋으니까 함께 자도록 해.”
“그럼 내 영지에 네가 와 주면.”
레온이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그땐 네가 나와 함께 있어 줄 거야?”
“그건…….”
“농담이야.”
이내 잡았던 손을 놓았다. 레온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작게 웃고는 이엘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내가 너를 아직도 사랑하니까.”
“레니…….”
“내 사소한 말과 행동이 네게 부담을 안겨 줄 수 있다는 걸 아니까.”
“…….”
“욕심내지 않을게. 나타니엘.”
그러고는 가슴에 팔을 올리고 우아한 귀족식 인사를 올렸다.
“그럼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폐하.”
“…….”
“즐거운 산책 되시기를.”
그러나 그렇게 레온이 떠나고 나니 산책이 더는 즐겁지 않게 됐다.
*
“지금 뭐라고 했나?”
“말씀 그대로요. 용의 암컷과 만났어요.”
“너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알고 하는 소리야?”
“알아요. 폐하께도 말씀드렸고요.”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스완과는 달리, 패티스는 혼란과 당혹으로 잠식된 낯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종족의 암컷이라니……. 그의 입장에선 상상만 하던 상황이었으므로 이렇게 갑자기 마주하게 된 것이 당황스러울 만했다.
한편 스완은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하며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며칠 전 꿈에서 그 여자를 만난 뒤로 잠을 통 자지 못했다. 혹시나 또 만날까 봐.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가도, 다신 만나고 싶지 않기도 했던 탓이다. 내뱉는 말들마다 어찌나 매섭고 날카롭던지.
그래서 며칠 고민했다. 자신이 만난 그 여자의 존재를 패티스를 비롯한 아군에게 알려도 되는 건지. 여자와 이종족의 암컷이 모조리 사라진 지금, 용의 암컷들이 존재한다는 걸 밝히는 게 어떤 이득과 손해를 가져올지 계산해야 했으니까.
결국 스완은 고민 끝에 이엘에게 연락했다. 자신이 꿈에서 그 여자를 만났고,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몰라 패티스와 의견을 나누고 싶다며. 마침 이엘도 르네를 비롯한 동맹군에게 그 여자의 존재를 알리려던 차였다고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별로 안 놀라시네요. 전 사실 패티스 님이 제일 크게 놀라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예상했어.”
“예상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