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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13화 (313/488)
  • 313화

    *

    커다란 방 안을 꽉 채우던 맑은 피아노 소리가 마지막 건반을 누르는 것으로 끝이 났다.

    “어때?”

    그녀가 웃으며 감상을 물었지만 르네는 입술을 떼고 뭔가 말하려다 도로 다물었다. 좋다 싫다, 어떤 감상평도 남기지 않는 독수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엘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형편없나?”

    “아닙니다.”

    “근데 어째 공작의 표정이 좋지 않구나. 차라리 아주 엉망이었던 옛날이 더 나을 정도로.”

    “죄송합니다. 그저…… 이제는 제가 폐하께 가르침을 받아야 할 듯하다는 생각을 잠깐 하는 탓에, 폐하의 말씀을 놓쳤습니다.”

    “공작이 짐에게 아부하는 날이 오기도 하는군.”

    “아부가 아닙니다.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다급히 변명하는 르네를 보며 이엘이 또 짧게 웃었다. 그녀는 그를 조금 더 놀려 줄까 하다가 금세 마음을 접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옆으로 이동해 만들어진 빈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곤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스승님께서도 한번 연주해 주겠어요?”

    “폐하.”

    “어서요. 제겐 공작만 한 스승은 없더군요.”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음악에 소질이 있던 여러 종족들과 인간들 중에 그녀의 음악 선생을 자처한 자들은 많았지만 르네만큼 좋은 선생은 없었다.

    “어서. 명령을 해야 쳐 줄 생각인가요?”

    “알겠습니다.”

    결국 르네는 제 고집을 꺾고 이엘의 옆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건반 위에 손을 올렸지만 선뜻 누르지는 못했다. 주먹 쥐듯 손을 몇 번이나 말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손끝이 건반에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듯 손가락이 절로 곱아들었다.

    “공작?”

    “…….”

    이엘은 미간을 살풋 찡그린 채 르네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그 모습이 어딘가 낯익었다. 아주 오래전, 선황과 함께 하는 식사 자리 때마다 머뭇거리고 주저하던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를 한참 지켜보던 이엘은 조용히 손을 뻗어 르네의 손등을 토닥거리며 덮었다.

    “아무래도 공작이 내 연주를 더 듣고 싶은가 보구나.”

    “…….”

    “좋아. 오늘을 위해 준비한 내 실력을 특별히 보여 주지.”

    눈치챘구나. 자신이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된 것을 그녀가 눈치챈 듯했다. 르네는 대답 없이 건반 위에 올려 두었던 양손을 내렸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있던 자리에, 이엘의 손가락이 대신 올라갔다.

    “내 연주는 음악 선생을 제외하고 아무에게도 들려준 적이 없으니 귀 기울여 잘 듣도록 하게.”

    “가문의 영광입니다.”

    “후후. 그래, 가문의 영광일 거야.”

    웃음을 터뜨린 이엘이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악보도 없이 연주하기 시작한 곡은 르네도 잘 아는 곡이었다.

    왈츠……. 이곳에 머물렀던 이엘이 르네와 함께 췄던 그 곡.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건반 하나하나에 정성이 들어간 연주였다. 르네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춤추듯 움직이는 건반을 쳐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피아노가 있는 릴리의 방을 무서워하다 못해 이제는 건반을 누르는 것조차 무서워졌다. 그 건반을 누를 때마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아서. 건반을 누르는 제 손가락 새로, 어린 황녀의 피가 눌어붙을 것만 같아서.

    우스웠다. 이토록 오래 살며 산전수전 다 겪었던 자신이 겨우 이깟 피아노 하나가 무서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꼴이라니.

    “르네.”

    “예.”

    “무슨 일이 있었어?”

    “아니요.”

    “아니긴. 이 방이 예전과 달라졌는데.”

    “…….”

    “원래 이 방은 늘 공작이 손수 정리해 왔던 곳이지 않나? 근데 그때와 가구나 악기들의 배치가 미묘하게 다르구나.”

    이엘은 시선을 건반에 고정시킨 채 연주하면서도 제 옆에 앉은 르네의 상태를 잊지 않고 살폈다.

    “내 추측이 맞다면, 공작도 이 방에 들어온 게 오랜만인 듯한데.”

    “…….”

    “나 때문이야?”

    “아닙니다.”

    “맞구나.”

    즐겁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멎었다. 줄곧 건반만 보던 이엘은 고개를 돌려 르네를 바라보았다.

    “공작이 이 방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가 뭘까. 피아노를 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

    “스완의 능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때 보았던 그때의 나 때문일까?”

    “폐하.”

    “그때의 어린 내 모습이, 또다시 그대를 자극한 거야?”

    “제가 약해 빠진 탓입니다.”

    “약한 건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폐하의 활이 약한 건 죄가 됩니다.”

    바보 같을 정도로 우직해서는. 이엘은 혀를 차곤 르네의 손을 잡아 피아노 위에 올렸다. 그러곤 곧바로 그의 손가락 위에 제 손가락을 얹었다.

    “그럼 나의 활이 다시 강해질 때까지 내가 잘 가지고 다녀야겠구나.”

    “…….”

    “나는 내 활쯤은 거뜬히 지킬 정도로, 강하거든.”

    그 말을 끝으로 이엘은 르네의 손가락을 덮고 있던 제 손에 힘을 줘 그와 함께 건반을 눌렀다. 마치 예전에 르네가 제게 했던 것처럼. 피아노를 치지 못하는 그녀의 손가락 위를, 르네가 부드럽게 감싸고 함께 눌렀던 그때처럼.

    “천천히 돌아와도 돼.”

    “…….”

    “무엇 때문에 피아노를 두려워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곳에 있어.”

    “……예.”

    “그러니 천천히 돌아와. 그동안 나는 내 실력을 더 갈고닦을 테니.”

    그녀의 따뜻한 웃음소리에 르네는 위안받았다. 제 손등을 덮고 어설프게 연주를 하던 이엘의 작은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곧 시선을 돌려 그녀의 작은 정수리를 내려 보았다. 속눈썹이 보이고, 그 아래로 오뚝 솟은 콧대도 보인다.

    그 순간 르네는 자신이 피아노를 치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를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

    “역시 내 영지에는 비할 수가 없네.”

    드디어 개방된 르네의 정원은 생각했던 대로 평범했다. 그때 정원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건 역시 심미안이 뛰어난 제게 보여 주기 부끄러워서였던 게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레온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천천히 정원의 입구에 들어섰다.

    정원 안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동안 르네 외에는 누구의 출입도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기에 독수리들조차 이곳의 방문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쪽 종족은 어린 개체들이 제법 많아서 정원 곳곳에 나들이 나온 새끼들이 많았다.

    솔직한 평을 내리자면, 공작이 직접 나서 꾸몄다던 정원은 그리 아름답진 않았지만 엉성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온갖 정성을 쏟아부은 탓인지 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오시고 나서 갑자기 개방됐지. 그럼 설마…… 이 정원을 폐하께 먼저 보여 드리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레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지독할 정도로 꼿꼿한 남자가 이렇게 로맨틱하다고? 아니.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독수리는 이런 감성과는 거리가 멀어. 레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말이 안 되지. 차라리 노아라면 몰라도.

    ‘난 내 두 눈을 달라고 하여도 기꺼이 드릴 것이오.’

    그러다가 며칠 전에 르네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미간을 찌푸렸다. ……말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닌가. 하긴. 그렇게 따지면 노아도 충격적인 건 마찬가지다. 지금의 노아의 모습을 돌아가신 루나 님이 보신다면 깜짝 놀라며 웃으실지도 모르겠네. 노아나 르네나 로맨틱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머니까.

    아니. 나 역시 남 말 할 처지는 아닌가. 실소하며 걸음을 부지런히 옮겼다.

    그렇게 목적 없이 걷던 그의 걸음이 정원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분수대 앞에서 멈췄다. 어쩐지 안쪽으로 갈수록 인파가 몰린다 싶더라니……. 레온은 팔짱을 낀 채 그곳에 서서 웃고 있는 새끼 독수리들과 이엘을 빤히 쳐다봤다.

    “폐하. 이게 제 책이에요.”

    “세상에. 정말 네가 쓴 거니, 메이슨?”

    “네. 점자로 쓴 책이에요.”

    “기특하네.”

    이엘의 칭찬에 메이슨의 얼굴이 붉어졌다. 몇 년 전엔 그녀의 허리에도 채 오지 않던 작은 아이가 어느새 제 턱까지 훌쩍 자랐다. 여전히 두 눈은 볼 수 없지만 메이슨은 종족의 그 누구보다 멋있는 성장을 하는 중이었다.

    “폐하. 저도 점자를 사용할 줄 알아요!”

    “저도예요, 폐하!”

    “폐하! 나중에 저희 집에도 찾아와 주시면 안 돼요?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맛있는 식사를 준비할게요!”

    “저희 둥지에도 와 주세요!”

    너 나 할 것 없이 저와 놀아 달라 매달리는 모습이 레온에겐 어딘지 익숙했다. 제 영지에도 저런 테르들이 몇 있었던 게 떠오른 것이다. 어딜 가도 새끼들은 못 말리겠군.

    게다가 가운데 있는 저 어린 우논……. 왠지 낯이 익다 했더니, 이전에 제 심복 로와 함께 인간 마을에 잠입했던 그 앞 못 보는 새끼 우논이었다.

    그때는 로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둘이 나란히 세워 두면 로보다 한참 더 크겠네. 로는 여전히 성장이 더디니까. 그 생각을 하며 모처럼의 평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돌아서려 했다.

    “후작?”

    그녀가 맑은 목소리로 저를 부르지만 않았어도.

    “……폐하를 뵙습니다.”

    정원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제게 쏠렸다. 동맹이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동맹은 아니다. 처음부터 가까웠던 늑대들과는 달리, 여긴 중간에 이엘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가능했던 동맹이다. 한 마디로 서로가 서로에게 마뜩잖은 관계.

    그러나 레온은 제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는 독수리들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곤 이엘에게 다가갔다.

    “폐하. 괜찮으시다면 함께 산책을 하고 싶습니다.”

    레온의 청에 독수리들이 하나같이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표했다. 특히 어린 개체들은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을 향한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레온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유치하다고 느꼈지만, 놈들에게서 그녀를 빼앗는 게 묘하게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런. 란트 경이 이 꼴을 보면 대놓고 창피하단 표정을 짓겠군. 그는 의외로 새끼들에게 약한 면이 있으니 말이다.

    “좋아. 그럼 후작이 에스코트를 해 주게.”

    “영광입니다.”

    레온이 웃으며 팔을 내밀어 익숙하게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이엘은 올망졸망 모여 자신을 간절하게 바라보던 독수리들에게 다음에 보자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잖아도 그녀 역시 레온을 만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은 레온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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