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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12화 (312/488)
  • 312화

    *

    짝—! 살갗을 때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스완은 그 뺨 때리는 소리의 근원지가 제 뺨이라는 걸, 눈을 뜨고 정확히 5초 뒤에 알아차렸다. 그와 동시에 고통의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악! 뭐, 뭐야?! 누가 날 때려……! 헉!”

    데굴데굴 구르며 나 죽겠네! 소리를 지르던 스완은 제 시선 끝에 걸린 누군가를 발견하곤 숨을 확 들이켰다. 바닥에 쓰러진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여자는 허리를 숙이고 내려와 시선을 마주쳤다.

    “누, 누, 누구야?! 당신 누구야!”

    “엄살이 심하네. 누가 보면 내가 때린 줄 알겠어.”

    “때, 때렸잖아! 당신 누구야?! 당신 뭐냐고!”

    “아, 시끄러. 얘. 너 목소리 좀 낮추면 안 되니? 귀청 떨어질 것 같아.”

    숙였던 허리를 펴고 일어선 여자는 손가락으로 푸른색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저를 한심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졸지에 엄살쟁이가 되어 버린 스완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저…… 저……! 저 여자가, 진짜……!

    어? ……여자?

    “여, 여, 여자다아!!”

    스완은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소리를 왁왁 질렀다. 공황에 빠지기 직전인 듯한 그를 쳐다보며 여자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검지를 제 입 근처에 갖다 댔다.

    “쉿! 시끄럽대도?”

    “헉! 대, 대체 여자가 어떻게 있는…… 설마 내가 죽었나? 죽은 거야?!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죽었다고?!”

    “한 게 없는 건 알고 있구나.”

    그녀의 신랄한 비난에 스완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감겼다가 떠졌다. 너무 직설적인 대꾸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동안 이엘의 권세를 등에 업은 제게, 저렇게까지 대놓고 핀잔을 준 놈은 없었기 때문에 더 충격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니야, 엄살은 그쯤 하고 그만 일어나렴. 시간이 별로 없어.”

    “내, 내가 고니인 건 또 어떻게 알았어? 머, 머리색 때문인가?!”

    “정신 못 차리니? 여기가 어딘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녀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스완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던 스완은 자신과 여자가 있는 이 공간이 제 능력 안이었음을 알아차렸다.

    내가 언제 능력을 사용한 거지?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보자, 여자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넌 눈치가 영 꽝이구나.”

    “아까부터 막말을 서슴없이 하네. 너무 무례한 거 아냐?”

    “그 여자는 날 단번에 알아봤는데.”

    “그 여자? 설마…… 폐하?!”

    “그래.”

    “설마 너! 저번에 내 능력 속에 침투해서 폐하를 빼돌렸던 그놈이야?!”

    “그걸 이제 알았니?”

    여자는 이엘을 대할 때완 전혀 다른 태도로 스완을 훑어봤다. 역시 이종족의 수컷 놈들은 하나같이 한심하다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공간 한편에 마련되어 있던 티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스완을 향해 손짓했다.

    “뭐 해? 할 말 있으니까 여기 와서 앉아.”

    “네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갈 줄 알아?”

    “귀찮게 하네.”

    스완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은 여자가 가볍게 손가락을 퉁기자, 스완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멱살 잡히듯 앞으로 쭈욱 끌려갔다. 원치 않았는데도 강제로 여자의 맞은편 의자에 앉게 된 스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내 공간인데 왜 네 마음대로 되는 거야!”

    “내 힘이 너보다 세니까.”

    “뭐?”

    “본론부터 말할게. 너. 성력을 다루는 훈련은 잘되어 가고 있는 거야?”

    ……역시 내가 성력을 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구나. 스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여자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능청스레 대꾸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무능하기가 짝이 없구나.”

    “야!”

    “자존심 좀 버리지 그래?”

    “뭐?”

    “성전기사단장에게 배울 때 뻗대는 태도 좀 버리라는 소리야.”

    “…….”

    “그런 식으로 뻣뻣하게 굴면 넌 백 년이 지나도 성력을 못 쓸 거야.”

    여자의 쓴소리에 스완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너무나도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오드는 제도를 떠나기 전, 성력을 사용하는 법은 성전기사단장인 사피라 호르난 경에게 자문을 구하라는 말을 남겼으나 사실 스완은 그와 제대로 된 대화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뻗대는 게 아니라……!”

    “황제와 계약 기간이 얼마나 남았어?”

    “그런 것까지 알고 있어?! 아니, 이게 아니지. 너 정말…… 용이야?”

    “그녀가 네게 내 이야기를 했잖아. 설마 여태 못 믿었니?”

    “그게 아니라 너무 당황해서 그러지.”

    기실 당황하긴 했다. 자신과는 어떤 접점도 없는 용의 암컷이 이렇게 접근해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스완은 레타에서 여자를 만났던 이엘의 말을 되짚었다. 용의 암컷을 만났는데, 그녀가 이전부터 꿈을 통해 접근해 왔었다고.

    아버지에게 언뜻 듣기로는 용은 굉장히 특별한 종족이라, 암컷과 수컷은 따로 살고 있으며 가진 능력이 다르다고 했다. 그게 아주 먼 옛날, 수컷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어쨌든 용의 수컷은 국지적으로 날씨를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고, 추측이 맞다면 용의 암컷은 꿈을 이용하는 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여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제 능력을 뚫고 들어왔다. 그 얘기는 능력의 본질이 백조인 제 것과 비슷하다는 의미가 될 텐데…….

    ‘오드 님! 폐하 좀 구해 주세요! 제 능력이…… 저 때문에 폐하께서 깨지 못하고 계세요! 제 능력에 갇히셨어요!’

    레타를 거쳐 갈 때. 곤한 여정으로 지친 그녀를 위해, 스완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본래 이종족의 능력이란 남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사용할 때보다, 도움을 주기 위해 사용할 때 강하고 정확하게 발현되는 법이니까.

    그래서 실수가 없었을 텐데…….

    하지만 이엘은 스완의 능력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했다. 스완은 제 능력 틈으로 누군가가 침입했음을 눈치챘고 재빨리 이엘을 깨우려고 했으나 침입자의 현혹은 대단했다. 분명 자신이 만든 능력 안이었음에도 스완은 그녀를 데리고 나오는 것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모두가 스완의 능력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실패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한 스완은 때마침 적절한 타이밍에 도착한 오드에게 제 능력 안으로 들어가 이엘을 구해 달라 부탁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안 돼요. 나의 성력과 스완의 능력이 갖고 있는 본질이 비슷해서.’

    그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사용하는 이 하얀 빛의 정체가 성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그때의 오드가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스완은 무의식적으로 고니 고유의 능력과 성력을 섞어 공간을 만들었고, 스완이 갖고 있는 성력보다 큰 성력을 갖고 있는 오드가 그 공간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게 되면 공간이 찢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마치 견디다 못한 자신이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이엘과 여자가 있던 곳이 찢어져 버렸던 것처럼.

    오드의 성력과 스완의 능력. 둘 사이 공통점은 성력. 그리고 그 얘기는…….

    “너도 성력을 사용할 수 있어? 너희 용의 암컷들도 나처럼 성력을 사용하는 거야?”

    “반은 맞혔고, 반은 틀렸네.”

    “…….”

    “우리는 ‘너처럼’ 성력을 사용하진 못해.”

    “그럼 어떻게…….”

    “원래 우리 용들은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지. 그러던 중 수컷 놈들은 신의 규율을 깨고 도망치는 바람에 이렇게 따로 살게 됐지만.”

    “그 얘기는 너희 암컷들은 계속……?”

    “맞아. 지금도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

    이제야 이해했다. 성전기사단들이 오드의 성력을 빌려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아주 오랜 시간을 신의 곁에서 보좌하던 용의 암컷들도 비슷한 원리로 성력을 미미하게나마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스완은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그녀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었다. 저 푸른색 머리카락과 푸른색 눈동자. 왜 모르겠는가. 한때는 자신과 치고받으며 투닥거리던 놈도 저 여자와 같은 색을 갖고 있었는데.

    스완은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여자를 빤히 쳐다봤다. 냄새가 나지 않는 것까지 밀로 놈을 닮았네……. 뭐, 같은 종족이니 당연한 소리인가.

    “좋아. 날 찾은 이유가 뭐야? 이렇게 내 능력 안으로 은밀하게 스며들 정도면 다른 사람들한텐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다는 뜻이잖아.”

    “의외네. 그것도 못 알아들을까 봐 벌써부터 답답했는데.”

    “야!”

    “최대한 빨리 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훈련해.”

    “말했잖아.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

    “더 노력하란 말이야.”

    싸늘한 그녀의 일갈에 변명을 준비하던 스완은 도로 입을 닫아야 했다. 조금 전까지 반쯤 놀리듯이 핀잔을 주던 것과는 판이한 표정이었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네 능력을 증폭시켜.”

    “나도 가만히 있던 것만은 아니야! 성전기사단장에게 물어봤다고! 근데 그 사람도 잘 모른다고 했단 말이야.”

    “성력이란 건 근본적으로 신의 힘을 빌려 쓰는 거야. 그러니 네 행동의 목적이 네 자신이 아닌 신이 되어야 한다고.”

    스완은 미간을 좁히며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성력을 내 욕구를 위해 사용하면 안 된다는 소리구나.

    그건 성전기사단의 충성이 황실이 아닌 성전인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니 성전기사단은 오드에게 빌린 성력을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고. 반면 스완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난 성전보다 폐하가 더 우선이야. 난 신을…… 그렇게까지 믿지 못한다고.”

    볼멘소리를 내뱉던 조금 전과는 달리, 스완은 기가 죽은 것처럼 한풀 꺾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여자는 고개를 흔들며 테이블 위에 있던 찻잔을 입에 대고 목을 축였다. 그러곤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고니를 타일렀다.

    “하지만 해야 돼. 그게 네 역할이니까.”

    “…….”

    “네 아버지도, 네 할아버지도. 전부 너에게 성력을 물려주기 위해 태어난 것과 다름없어. 그리고 넌 그 역할을 완수해야 돼.”

    “내 성력이…….”

    “네 성력이 그녀에게 도움을 줄 거야.”

    여자가 말하는 그녀는 나타니엘이겠지. 이엘의 존재가 언급된 이상 스완은 더 이상 거절할 재간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볼게.”

    “이따금 이런 식으로 널 찾아올게. 먼저 성력을 써 본 입장에서 도움을 줄 테니, 제발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

    “알겠어.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한참 고개를 주억거리던 스완이 여자를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차오른 감정을 참지 못하고 그를 주먹으로 한 대 쥐어박을 뻔했다. 뭘 그렇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봐? 기분 나쁘게.

    그러나 어린애의 쓸데없는 호기심 정도로 생각하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라는 듯.

    “근데 넌 왜 폐하께 나타난 거야?”

    “…….”

    “왜 폐하를 만나려고 했던 건데?”

    여자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시간이 없다면서 입을 열지 않는 그녀를 기다리던 스완이, 끝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차였다.

    “너랑 비슷해.”

    “뭐?”

    “너희 고니가 저주를 받아서 호수에 묶인 것처럼. 나도 비슷한 처지라고.”

    “너도 꿈에 갇혔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

    “내 꿈에 갇혀 있어.”

    그러니 그 애들이 풀려나려면 나타니엘이 필요해. 그리고.

    “네가 더 강해져야 해, 백조.”

    “…….”

    “제발 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길 바라.”

    이것만큼은 신께서 너희에게 하는 말이 아닌,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야. 여자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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