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찌득찌득한 피가 눌어붙었던 그때의 피아노가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이젠 피아노란 단어를 들으면 릴리의 피아노가 아닌, 그때 스완의 능력 속에서 보았던 황녀의 피아노가 떠오른다.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져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황궁에 있는 건 영 소리가 좋지 않아서. 역시 그대의 영지에 있는 피아노의 소리가 제일 좋아.”
“그렇습니까.”
“그 방은 여전히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나? 공작이 괜찮다면 내게 그 방을 보여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그 방은 여전히 폐하께 열려 있습니다.”
릴리의 방은 그 아이와의 소중한 추억이 묻어 가장 애틋한 방이었다. 햇볕이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많이 내리쬐는 곳이라 독수리의 영지에서 가장 따뜻한 방이기도 했다. 그의 자랑스런 동생인 릴리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방이 그 방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죽고 난 뒤로는 누구에게도 열리지 않는 방이 되었다. 자물쇠로 꼭꼭 잠가 두어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는 곳이 되어 버렸다. 르네의 사랑을 받았던 방이, 그의 상처가 되어 주인도 없이 홀로 남겨졌다.
“아무리 좋은 음악 선생이 있어도 모두 공작만은 못하더군.”
“보잘것없는 잔재주입니다. 재주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만큼.”
“하지만 공이 좋은 선생이었던 것만은 사실인걸.”
“…….”
“공작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곳에 머물 때 행복했었어.”
“…….”
“우스꽝스러운 춤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이엘의 농담 섞인 말에 르네도 작게 웃었다. 그때의 추억이 그녀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면 그걸로 제겐 족하다.
그 방도 그랬다. 주인을 잃은 뒤로 어둡기만 했던 릴리의 방에 빛이 다시 찾아왔다. 한 인간 소녀가 가져온 따뜻한 한 마디가 차가운 쇠사슬을 끊어 내고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을 연 것이다. 순식간에 방의 주인이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그 방의 가장 중앙에 있던 커다란 피아노 한 대. 릴리의 사랑을 받고, 이엘의 사랑을 받았던 그 피아노.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끼는 악기를, 르네도 사랑했다. 아꼈다. 소중히 여겼다. 그 피아노를 매개체 삼아, 이엘이 보고 싶을 때마다 그곳을 찾았는데…….
하지만 스완의 능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그녀를 구하러 달려간 곳엔 찌득찌득한 피로 물든 피아노만이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피로 얼룩진 피아노 너머에, 발이 땅에 닿지도 않을 만큼 아주 자그마한 꼬마 아이가 의자에 앉아 건반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폐하……?’
제 목소리 따윈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소녀는 크게 웃으며 그 조그마한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열심히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피아노 위에 흥건한 피 때문에 제 손이 붉게 물들어 가는 건 전혀 모르는 듯했다.
황녀였다. 나타니엘이었다. 자신이 죽였던 그때의 그 작은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무구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피 웅덩이는 전혀 보지 못한 채 피아노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르네는 그 곁으로 천천히 걸어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제 몸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붉은 건반을 꾹꾹 누르고 있는 모습에, 르네는 숨이 턱 막혔다.
‘폐하.’
듣지 않는다. 내 목소리가 네게 닿지 않는다.
‘폐하, 부디…….’
나를 좀 봐 줘. 나를 제발 봐 줘……. 네 곁에 내가 있잖아. 나타니엘, 나의 사랑스러운 나타니엘. 부디 내가 네 곁에 있음을 눈치채 줘. 응? 여기 있지 마. 나와 함께 돌아가자. 나타니엘, 제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이런 피아노 말고. 내 영지에 있는 릴리의 피아노. 아니, 너의 피아노. 그것을 연주해 줘. 이렇게 구슬프게 우는 피아노 말고, 음률이 엉망이어도 청아한 소리를 내던 네 피아노를 연주해 줘. 우리의 시간을 떠올려 줘.
그걸 기억해 줘, 나타니엘. 부디 나와 함께한 시간들을 잊지 마. 응?
약속해. 이번엔 정말 네게 친절히 알려 줄 테니. 다정하게 일러 줄 테니.
‘나타니엘. 나를 봐. 제발 나를 봐 줘.’
그 순간 거짓말처럼 아이의 손가락이 멈추고 시선이 저를 향했다. 그리고 그 눈과 마주한 르네는 참담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 너는 이토록 귀엽고 이토록 사랑스럽고 이토록 어여뻤구나. 단 한 번의 시선에 내 심장이 멎을 정도로, 나타니엘. 너는 이렇게 작고 사랑스러웠구나. ……내 생각보다 더 작았네. 내 생각보다, 더 가엾었네.
르네는 제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거운 눈물을 떨어뜨리는 자신을, 아이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황녀를 죽였던 그날로부터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하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던 것보다 더 작고 어렸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초라했다. 가장 고귀한 위치에 있던 아이였지만, 가장 가진 게 없던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곳이 스완의 능력 안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르네는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바보처럼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불렀다.
‘잔소리하지 않을게.’
‘…….’
‘네가 원하는 대로, 친절히 알려 줄 테니 여기 있지 마.’
‘…….’
‘미안해. 네 과거를 망쳐서. 네 행복을, 네 소중한 가족을…… 죽여서. 미안하다, 나타니엘.’
너는 이렇게 작은 아이였을 뿐인데. 아무 죄가 없던 아이였는데……. 우리는 신의 심판을 빙자해 어린 너의 모든 것을 앗아 갔다.
내 영지에 있던 릴리의 피아노를 치는 너를 보며 내가 상처를 치유할 때, 너는 어린 날의 상처를 끄집어냈나. 내겐 피아노가 평온한 봄볕이었다면, 너에게 피아노는 이렇게 피가 눌어붙은 처참한 겨울이었나.
‘나타니엘.’
그런데도 너는 이곳을 애달프게 그리워해서. 우리가 아무리 너를 부르고 불러도 듣지 못하고, 이곳에서 네 행복을 찾고 있었구나. 우리의 간절한 목소리보다 이곳의 가여운 네 과거가 더 그리워서……. 너는 이곳을 영영 놓지 못했구나.
‘나의 폐하. 여기 머물지 마십시오. 제발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
‘…….’
‘저희에게 돌아와 주십시오, 폐하.’
그러나 어린 이엘은 제 간절한 부탁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나이대 아이 같던 천진한 얼굴은 어디 가고, 온갖 풍파를 다 겪은 표정의 소녀가 저를 한참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곤 오랜 시간 끝에 터진 말이 그를 더욱 아프게 했다.
‘내가 여기 있고 싶다고 하면. 그러면 경은 어떻게 할래?’
‘폐하.’
‘여긴…… 여긴 지독할 정도로 행복한 곳이네. 내가 마음껏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위험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아.’
그곳은 스완이 만든 공간이었지만 스완의 능력으로만 만들어진 공간은 아니었다. 그걸 어린 황녀에게 알려 주었으나 그녀는 자신에게 돌아가라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곤 마치 자신을 달래려는 듯 어린 소녀가 제 품에 안겨 왔다.
‘르네.’
‘예, 폐하.’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게.’
기다리라는 말이 그렇게나 큰 위안이 될 줄이야. 제 품에서 영영 떨어뜨리고 싶지 않은 그녀를 떼어 놓고, 르네는 먼저 그 공간을 찢고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지독한 악몽이 르네를 찾아왔다. 눈을 감으면 피에 절어 찌득해진 검은색 피아노가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선황은 황자를 피아노로 집어 던졌다고 했지만, 르네의 악몽엔 어린 이엘이 피아노 위에 내동댕이쳐진 모습으로 등장했다.
피아노가…… 겨우 다시 빛을 찾은 릴리의 방이…… 다시 또 끝없이 두려워졌다. 이전엔 자신 외엔 모두에게 허락되지 않는 방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에게만 허락되지 않는 방이 된 것이다.
“르네.”
“…….”
“르네?”
바람 때문에 내 목소리가 안 들리나? 아니면 무슨 심각한 생각이라도 하고 있나? 이엘은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 없는 르네의 반응에 결국 열었던 입을 다물고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했다.
영지 경계에서 공작성이 있는 곳까지 거리가 상당했지만 독수리의 날갯짓으론 금방이었다. 드넓은 평야를 지나, 저 멀리 산처럼 우뚝 솟은 언덕 위에 뾰족한 성의 꼭대기가 보였다. 영지 구경은 다음에 제대로 해야겠다. 그렇게 중얼거리던 이엘이, 일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건…….”
황량했는데……. 분명 르네의 성은 생기 하나 없이 황량함뿐이었는데. 죽어 가던 독수리들처럼, 생명력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곳이었는데.
“공작이…… 가꿨나?”
“폐하의 심미안엔 한참 모자라겠지만, 조금이나마 좋아해 주셨으면 합니다.”
마침내 너른 정원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겸손한 말과는 달리, 르네의 정원은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칭찬할 만큼 보는 이를 매혹시켰다.
이엘은 구경하는 저를 위해 속도를 늦추며 고도를 낮춘 르네에게 고맙다고 말하곤, 고개를 숙여 화려한 정원을 구경했다.
그녀의 눈을 단숨에 사로잡은 건 정원의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분수대였다. 그리고 그 분수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는 구역엔 낯익은 꽃들이 빼곡하게 심겨져 있었다.
“저 꽃은…….”
“어떻게 해야 꽃이 개화하는지 몰라, 몇 년을 잡아먹었습니다.”
“…….”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 개화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자신이 썰렁한 르네의 성에 두고 갔던 그 꽃. 르네가 제게 마음을 에둘러 표현했던 그 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네가, 왔으면 해. 내게로 왔으면 해.’
꽃봉오리가 저를 기다린다며, 와서 그 꽃을 봐 달라던 그때의 르네가 떠올라 이엘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꽃밭을 감상했다. 이엘이 오기만을 기다린다던 독수리는, 그녀가 영지에 찾아오지 않으니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대신 꽃을 피웠다. 그것도 몇 년에 걸쳐.
“공작.”
“부담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
“말씀드렸듯이 폐하께서 부디 편히 쉬다 가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부담 갖지 마십시오.”
혹 내 사랑이 너를 부담스럽게 만들까, 나는 그것부터 걱정이 돼. 참 우습지 않은가. 레온이 너와 감정적으로 깊은 교류가 있음을 부러워하는 주제에, 겨우 꽃밭 하나에 숨겨 놓은 의미를 네가 찾아내어 나를 부담스러워할까 두려워하는 내 모습이.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네가 내 마음을 알아봐 줬으면 하는 모순된 내 모습이, 참 우습지 않은가.
참…… 가엾지 않은가.
“응. 고마워.”
“…….”
“공작이 그때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줘서.”
“…….”
“별것 아닌 인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끝내 마음을 바꿔 줘서. 그래서 이렇게 그대의 영지가 살아 숨 쉬는 듯한 모습이 되었음에, 나는 고마워.”
이엘의 말에 르네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별것 아닌 적이 없다. 네 말은 내게 있어 언제나 무겁고, 언제나 중요했다. 내겐 네 말이 세상 그 어떤 말보다 특별하다는 것을, 넌 영영 모르겠지…….
감히 내뱉지 못할 말들을 속으로 삼킨 채, 조금씩 아래로 활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