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
“폐하께서 조금 전에 경계를 막 넘으셨다고 합니다.”
정찰을 떠났던 독수리가 드넓은 평야에 내려앉으며 르네에게 보고했다. 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제 권역의 경계 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르네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여기서도 폐하의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까?”
“경계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오시면 볼 수 있소.”
레온은 신기하다는 듯 르네를 슬쩍 봤다가 그를 따라 평야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제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독수리들처럼 시력이 좋지 않으니까. 그래도 레온은 그녀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 이렇게 밖으로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생각해 보니 조금은 웃겼다. 얌전히 제 영지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게 힘들어, 교류조차 없던 종족의 영지에 다짜고짜 찾아와 머물게 된 제 모습이. 그러나 레온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썩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감정에 솔직해지는 제 모습이 좋았다. 비록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일지라도. 작은 것 하나에 일희일비하게 만드는 까다로운 감정일지라도.
사랑이란 건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주는 소중한 감정이란 것을, 레온은 아주 늦은 첫사랑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공작님에게 폐하는 어떤 분이십니까?”
르네는 레온의 뜬금없는 물음에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를 쳐다봤다. 레온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응시하던 곳을 줄곧 바라본 채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다소 생소했다. 자신이 알던 레온이라는 자는 인간을 향해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인간을 증오해, 동족이 인간을 마구잡이로 학살해도 눈감아 주었던 자였다.
그런 놈이 저렇게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모습이 르네에겐 생소하면서 낯익었다. 아마 자신의 모습도 남들에겐 이렇게 보이겠지…….
르네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정면을 향했다. 이엘의 무리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게 궁금한 이유는?”
“글쎄요. 보아하니 공작께서도 내 감정과 비슷하신 듯하니.”
레온의 대답에 르네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내게 폐하는 어떤 분이냐고……. 나타니엘.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한때 죽음을 생각했던 적이 있소.”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나와, 레온은 미간을 좁히며 입을 다물었다. 죽음이라니? 죽지 못해 살던 자신도 죽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독수리가, 그것도 르네가 죽음을 생각했다니? 그가 말한 ‘한때’라는 건 이엘을 만나기 전을 뜻하는 것일 터였다.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다. 그가 여동생과 각별한 사이였다는 건 다른 종족인 자신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상실에 젖어 동생의 곁으로 가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이종족들이 의외로 많았다. 전쟁 직후에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하는 개체들이. 특히나 우논 중에서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집단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소.”
하지만 르네의 다음 말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던 터라 레온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놀랐나 보군.”
“……놀랄 수밖에 없는 내용이니까요.”
“내 종족과 노아만 알고 있었던 사실이오.”
그것도 이젠 아주 먼 옛날 얘기가 되었다. 그때는 그게 아니면 버틸 힘이 없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했던 건데, 지금에 와 생각해 보니 참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종족의 수장이라는 지위를 악용한 셈이었으니까.
“이유가 뭐였습니까?”
“뱀이 연구를 다시 재개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소. 거기에 몇몇 다른 종족도 참여하겠다는 것도 함께.”
그리고 그 빌어먹을 뱀이 독수리에게도 제안을 해 왔단다. 2차 전쟁 때의 연합을 들먹이면서. 그때의 일이 독수리의 명예에 얼마나 큰 흠을 만들었는지 누구보다 아는 놈들이.
“2차 전쟁 때. 내 종족의 일부가 뱀과 손을 잡고 앞장서서 인간들을 도륙했소. 당시 모든 종족의 어린 개체들이 뭣도 모른 채 뱀의 꾐에 넘어가 공범이 되었다고는 해도, 내 종족만큼 중죄를 저지른 종족은 없을 거요.”
“…….”
“뱀이 연구를 다시 시작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또다시 내 종족은 그들을 따라 순리를 거스르는 짓을 저지를 것이라 생각했소. 전적이 있으니까. 그 꼴은 더는 볼 수가 없어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것이오.”
누군가는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냐는 말을 하겠지만, 적어도 그때의 르네와 독수리들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던 상황이었다. 미래는 꿈꿀 수도 없게 됐고, 한정된 양식으로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겠는가.
어차피 나아질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내 손으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내 종족이 또다시 죄를 저지르는 꼴을 보느니, 내 손으로 종족을 끊어 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나를 붙잡아 세운 게 폐하였소.”
“…….”
“그냥 말 한 마디였을 뿐이오.”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이엘이, 주드가 죽었다고 살 의지를 잃어버리기엔 그녀에게 남겨진 것들이 많아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처럼. 르네에게도 릴리가 죽었지만 삶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존재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이엘이 르네의 살아야 할 이유가 돼 버렸다.
“죽으려던 나를 살리신 게 폐하이니, 새롭게 살게 된 삶을 그분께 드리려고 하오.”
“그렇군요.”
레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독수리의 말에 긍정했다. 그녀는…… 모두의 구원자였다. 나를 살리고, 독수리를 살리고. 살고 싶었던 자에겐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죽고 싶었던 자에겐 살아갈 이유를.
우리 모두가 그녀에게 구원받았다.
“후작은 어떤지 궁금한데.”
“내 결핍의 충족이요.”
르네의 물음에 레온은 조금의 생각도 없이 곧장 대답했다. 마치 늘 그녀의 존재를 그렇게 생각해 왔다는 듯, 일말의 고민이나 주저함이 없었다.
“날 때부터 결핍된 나를, 완성품으로 만들어 준 유일한 충족제입니다.”
“…….”
“폐하의 곁에서만 내가 완성돼요.”
레온이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르네는 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한 건지 알 것 같았다.
한때는 소년 왕이라고 불렸던 자였다. 사자와 호랑이의 모든 직계가 죽어 버렸으나 두 직계의 피붙이인 어린 우논이 살아 있어 그가 네 종족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태생이 예민하고 까다로웠던 소년 왕은 언제나 불안정한 삶을 살아왔다.
이제는 그의 얼굴에서 불완전한 모습을 더는 찾아볼 수 없다. 외관은 이전과 다를 바 없지만,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한 종족의 수장으로 이곳에 존재할 뿐이다. 레온의 말처럼, 결핍되었던 그를 그녀가 완성시켜 준 거겠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던 레온이 말을 이었다.
“지금 폐하께 위협이 되는 존재는 구귀족이나 유클리드와 같은 이종족들이 아닙니다.”
“…….”
“폐하께서 만나셨다는 ‘그 사람’. 실질적으로 ‘그’가 가장 위험해요.”
“그래서 날 시험하고자 물어본 것이오?”
“시험이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고. 폐하를 향한 각하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을 뿐이라고 답해 드리지요.”
레온은 그렇게 덧붙이고 잠시 침묵했다. 여전히 제 시야엔 드넓은 평야만 보였다. 언제쯤이면 폐하가 보일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나도 그녀를 볼 수 있게 될까.
빨리 보고 싶은데. 한시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이렇게 친하지도 않은 종족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당신을 빨리 만나고 싶은데……. 나타니엘, 넌 어디쯤 왔어? 빨리 네 얼굴을 보여 주면 안 될까?
네 얼굴을 보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무엇이든 할 거야, 난.
“난…… 폐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거예요.”
“…….”
“그녀가 아프면 내 갈기라도 기꺼이 바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줄곧 정면만 바라보던 르네가 결연한 레온의 목소리에 시선을 옆으로 틀어 그를 쳐다봤다. 레온의 눈빛이 전에 없이 반짝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금회색 눈동자는 자신을 보고 있었지만, 향하는 곳은 저 너머에 있는 누군가일 것이다.
“공작님은요? 당신도 같습니까?”
“기꺼이.”
“…….”
“난 내 두 눈을 달라고 하여도 기꺼이 드릴 것이오.”
르네의 답이 만족스러웠던 건지 레온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로 그런 결정의 순간이 온다고 해도 두 사람의 마음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
“폐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네, 르네 공.”
르네는 레온과의 대화를 마치고 그녀의 모습이 또렷이 보이자마자 몇몇 우논들과 함께 경계 끝으로 날아갔다. 역시 자신은 레온에게 성질이 급하다며 비웃을 처지가 안 된다. 겨우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날아간 자신이 더 웃겼으니까.
가장 선두에 있던 르네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자, 뒤를 따르던 나머지도 일제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며 자세를 낮췄다. 하트의 등 위에 올라타 있던 이엘이 흔흔히 웃으며 르네를 향해 손짓했다.
“일어나게, 공작. 이렇게 맞아 주니 기쁘군.”
스완의 능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레타로 달려갔던 게 벌써 세 달 전이었다. 그녀는 영지 시찰로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겠지만, 르네에게 세 달은 3년보다 더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공작성까지는 거리가 꽤 되니 제 등에 타셔서 먼저 이동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쉬실 수 있게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럴까, 그럼?”
하트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엘이 그러겠노라 답하는 걸 듣고는 별수 없이 몸을 엎드려 그녀를 내려 주었다. 르네는 다시 독수리의 모습으로 돌아가 이엘이 제 등에 탈 수 있게 자세를 바꾸었다.
이엘이 어렵지 않게 올라탔고, 그녀가 준비된 것을 확인한 르네가 몇 걸음 만에 땅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커다란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높은 고도까지 올라가자, 그동안 막혀 있던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엘은 바람에 제멋대로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움켜쥐며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공의 등에 올라타 하늘을 날게 되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야.”
“늘 좋지 않은 일로 제 등에 타셨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 다행입니다.”
르네의 말이 맞다. 이엘이 독수리가 된 그의 등에 올라탔을 땐 늘 무언가를 피해 도망칠 때나 기절했을 때뿐이었는데, 이렇게 평온하게 그의 비행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아까 잠깐 봤을 때 노아가 안 보이는 것 같았는데, 공작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사정이 생겨서. 잠시 윌터 백작령에 다녀오기로 했어.”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일이 터지긴 했는데 심각한 건 아니야. 자세한 건 성으로 가서 얘기할게. 그보다 그대의 영지엔 별일 없었지?”
“레온 후작이 와 있습니다.”
“레니가?”
그녀의 다정한 애칭에 르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가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의외였다. 레온이 이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건 그의 일방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다정한 애칭은 한두 번 불러 본 말투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꽤 오래, 감정적 교류를 해 온 것처럼 느껴졌다.
미간을 좁혔던 건 순간 품었던 질투심과 아쉬움 탓이었다. 자신 역시 그녀와 정서적인 교류를 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차올라서.
레온은 누구보다 고고하게 태어나 태생이 뻣뻣한 사람이었으나, 의외로 제 사람에게 쉽게 허물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랬겠지. 아마 레온은 이엘을 빠르게 ‘자신의 사람’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르네는 그게 부럽고 아쉬웠다. 자신도 레온처럼 그녀를 조금만 더 빠르게 받아들였더라면……. 조금만 더 잘해 주었더라면. 그녀가 제게 감정적으로 의존할 수 있게, 조금만 더 빨리 마음의 문을 열었더라면.
아쉬움은 감정이 깊어질수록 배가 되어 돌아왔다.
“……공?”
“…….”
“르네.”
“예? 부르셨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대답이 없었나?”
“죄송합니다. 제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피아노 말이야.”
아, 피아노……. 르네는 그녀가 내뱉은 그 악기의 이름을 속으로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