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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09화 (309/488)
  • 309화

    *

    “포르 가문이라면…… 폐하께서 직접 작위를 주실 만큼 신뢰하던 가문 아닙니까?”

    “응, 맞아. 그는 예전에 내가 오드와 함께 일라이저의 마을에 머물렀을 때 알게 된 자이기도 해.”

    “러셀 후작에게도 말씀하실 겁니까?”

    노아의 물음에 이엘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확실하게 알게 된 것도 없는데, 코르넬 포르와 막역한 사이인 일라이저에게까지 걱정을 안겨 주긴 싫었다.

    “아마 포르 자작도 아는 게 없을 거야. 그의 숙부는 한평생을 연구실에서 살았다고 했으니까. 자작과 마주친 횟수도 적겠지.”

    “그럼 제가 리노 윌터의 동태를 살피고, 접선할 수 있다면 포르 자작을 만나 그의 숙부에 관해 물어보겠습니다.”

    “응. 부탁할게, 노아.”

    열이 내린 뒤로도 침실에서 쭉 쉬고 있던 이엘의 앞에 오드가 나타났다. 원래대로라면 르네의 영지에서 합류하기로 했는데 오드가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 제도에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새벽에 갑자기 제 정신을 깨운 스완의 전언에, 이엘은 패티스가 오드를 예정보다 빨리 이곳으로 보낸 이유를 바로 알아챘다.

    “언뜻 쓸모없어 보이는 정보 같지만, 지금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한 정보야. 이런 사소한 정보를 알아냈다는 건 패티스가 온 힘을 다해 렉토스를 고문했다는 뜻이 되겠군.”

    “백작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 덕에 저희는 큰 단서를 얻지 않았습니까? 그는……,”

    “풋!”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이엘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말을 하다가 멈춘 노아가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다소 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웃으십니까?”

    “그대가 패티스 백작을 두둔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두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정당하다고 생각하기에…….”

    “걱정 마. 내가 패티스를 책망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엘은 웃음 띤 얼굴로 그렇게 답하며 노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예전 같았으면 하이에나 따위를 두둔하겠냐며 길길이 날뛰었을 텐데, 지금의 그는 민망한 건지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제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내 명령으로 제도로 보냈으니, 처음엔 패티스 백과 기사단들이 렉토스를 잘 대우했을 거야. 그런데도 놈은 입을 열지 않았을 거고, 결국엔 백작을 자극했겠지. 그럴 줄 알고 놈을 황궁으로 보낸 거야.”

    사실 렉토스가 황궁에 있는 패티스 일행에게 잡히자마자 털어놨던 정보는 상당히 값진 정보였다. 그때 그가 패티스 앞에서 얌전히 굴었다면, 패티스는 그녀의 명령이 따로 도착할 때까지 렉토스에게 편한 자리를 제공했을 터였다. 하지만 놈은 그러지 않았겠지. 그건 렉토스를 겪어 본 이엘이 더 잘 알고 있다.

    “어쨌든 더는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돼. 더 이상 정에 매여서 쉽게 휘둘리거나 하지 않으니까.”

    이엘이 생긋 웃으며 노아의 뺨을 검지로 톡톡 건드리고는 마지막 겉옷을 입는 것으로 착의를 마쳤다.

    저택 밖은 벌써 떠날 준비를 마친 2기사단과 근위대가 각각 열에 맞춰 황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을 빠져나오는 그녀의 앞으로 커다란 하이에나가 다가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췄다. 이엘은 익숙하게 하트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로빈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그녀의 앞에 무언가를 진상하며 말했다.

    “폐하. 황궁으로 귀환하시는 날까지 신의 가호가 폐하께 임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이것은 줄곧 폐하께 드리고 싶었던 저의 마음입니다.”

    로빈이 들고 온 비로드 쿠션 위에는 커다란 유리병 하나와 작은 유리병 하나가 놓여 있었고, 각각의 병엔 붉은색과 푸른색의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엘은 손을 뻗어 유리병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이건……?”

    “제 독입니다.”

    “…….”

    “붉은색 병엔 제 피에 독을 섞은 특수한 액체를 담았습니다. 파란색 병은 그 독의 해독제이고요.”

    “이걸 짐에게 바치는 이유는?”

    “말씀드렸듯이, 제 마음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곳엔 근위대와 2기사단뿐만 아니라 수많은 뱀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무리의 수장이 자신의 독을 건넸다는 건 상당히 큰 의미를 갖는다.

    붉은색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가만히 바라보는 이엘에게 로빈이 조금 전보다 작아진 목소리로 나긋하게 속삭였다.

    “뱀의 수장이 되는 직계에게는 특수한 능력이 있습니다. 동족 그 누구의 독이라 해도 제가 흡수해 무력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그건 이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종족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능력이니까.

    예를 들면 안드로의 얼음을 다른 늑대들은 없앨 수 없지만, 직계인 노아는 안드로의 얼음을 자신의 것처럼 흡수해 사그라뜨릴 수 있다. 반대로 노아가 능력으로 만든 얼음은 노아만이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작의 독은 다른 그 누구도 무력화할 수 없겠지. 그 얘길 하고 싶은 건가?”

    “아닙니다, 폐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로빈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녀의 손에 들린 붉은색 액체의 유리병을 가져갔다. 그러곤 거침없이 뚜껑을 열고 제 손목 위에 액체를 한 방울 똑 떨어뜨렸다. 순식간이었다. 거품이 일면서 손목의 살점이 녹기 시작한 것은.

    “고작 한 방울이지만 제게도 이만한 상처를 입힐 만큼 위력은 어마어마합니다. 게다가 저조차 그냥 흡수할 수가 없고요.”

    이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해독제가 담긴 병을 열려고 하자 로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제 옆에 서 있던 리플의 검집에서 검을 빼내 멀쩡한 손의 손바닥을 그었다. 뚝뚝 떨어지는 피를 독을 쏟은 환부에 떨어뜨리자 보글보글 끓던 독기가 사라졌다.

    “이렇게 제 피를 섞어서 흡수해야 겨우 먹히거든요.”

    “괜찮은 건가?”

    “이 정도는 금방 회복합니다. 제 피와 독이고, 고작 한 방울이었으니까요.”

    그 얘기는 로빈이 아닌 다른 누군가, 심지어 같은 가문의 뱀이라 할지라도 이 독을 버틸 수 없다는 소리가 된다. 로빈이 이엘에게 건넨 독의 양은 상당했다. 이 정도 양이면…….

    “짐이 지금 당장 공작의 얼굴이 이걸 붓는다면?”

    “하하. 꽤 무서운 말씀이십니다.”

    “…….”

    “아마도 저는 죽지 않을까요? 얼굴이 녹아 사라지겠지요.”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자들이 로빈의 말에 모두 마른침을 삼켰다. 심지어 저 멀리서 지켜보던 뱀들마저 그 자리에서 벌벌 떨기 시작했다. 로빈은 직계 중에서도 가장 강한 직계였다. 게다가 그 직계들을 전부 죽이고 능력까지 모두 집어삼켰으니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런 로빈마저 죽을 정도의 치명상을 남기는 독이라니. 저희로서는 자신의 영주가 왜 저걸 황제에게 진상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로빈은 붉은색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다시 그녀에게 건네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위급 시에 사용하시면 됩니다.”

    “내게 주는 이유는?”

    서늘한 그녀의 말에 로빈은 다시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춘 채 이엘을 쳐다봤다. 이엘은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허리를 숙여 로빈의 공을 치하하는 척 귀를 갖다 댔다.

    “폐하. 페널티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뭐?”

    “선황이 정말 ‘그’를 만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그’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자라는 겁니다.”

    “…….”

    “마치 보호석과 같지요. 나자르의 목숨과 성력을 깎아 만든 보호석. 무엇이든 대가가 필요합니다.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없다는 것,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를 만날 때마다 내 목숨이 줄어든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육체의 수명 쪽보다는…… 영혼 쪽에 초점을 두고 싶습니다.”

    내 영혼이 갉아먹힌다는 건가? 이엘은 로빈의 녹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피하지 않았다. 자신을 똑 닮은, 그러나 자신의 것보다는 조금 더 탁한 색을 가진 뱀이 언제나처럼 눈꼬리가 휘어지게 접으며 상냥히 대답했다.

    “물론 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우매한 이종족인지라…….”

    “그대의 충언은 달게 듣겠네.”

    “영광입니다.”

    오드가 곁에 있을 때 ‘그’를 만나는 건 어려웠다. 특히 이전보다 성력이 강해진 지금으로서는 오드가 가까이 있을 땐 ‘목소리’와의 만남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 이엘은 ‘그’의 도움이 필요할 때, 혹은 ‘그’를 찾아야 할 땐 늘 오드와 멀리 떨어졌다.

    이엘은 제 손에 쥐여진 유리병 두 개를 가만히 쳐다봤다. 목숨이 위험에 달했을 때 ‘그’의 공간에 숨어 몇 번이나 살았다. ‘그’는 제 목숨을 지켜 준다. 그 공간에 숨어들면 어떤 위험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 몇 번이고 그곳을 찾았다.

    그러나 로빈은 그 행위를 자제하라는 의미에서 이 맹독을 건넨 것이다. 위험이 닥치면, 그 공간에 숨어들 게 아니라 이걸 대신 사용하라고. 물론 이게 그만한 효과를 주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방어용으로 사용할 수는 있을 테니까.

    “고맙네, 공작. 공 덕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 푹 쉬다 가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친림하여 주시니 영광이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생글생글 웃었다. 그렇게 로빈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엘은 하트의 등에 올라탄 채 기사단과 근위대를 이끌며 영지 밖을 향했다.

    “폐하. 뱀의 사술일지 모릅니다.”

    “하트 경. 걱정 말라. 뱀의 간사한 혀에 이리저리 흔들릴 만큼 어수룩하지는 않으니.”

    아까부터 유리병에 시선을 두는 그녀가 걱정이 됐지만, 하트는 이엘의 단 한 마디에 고개를 끄덕이며 관심을 거뒀다.

    “자, 가자. 독수리의 영지까지 가려면 부지런히 달려야 한다.”

    “예!”

    그녀의 신호를 받고 무리가 일제히 르네의 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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