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뭔데.”
“예전에 폐하께서 내 영지에 머무실 때, 목숨이 위험하셨던 적이 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그녀의 자해 사건을 말하는 건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날이 떠올라 노아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네가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다니. 미쳤나?”
“아니. 우선 내 말을 들어. 듣고 나서 화내도 늦지 않잖아.”
“…….”
“너희는 모르겠지만, 폐하께선 그때 분명 숨이 멈추셨어.”
물론 노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와 목숨이 연결된 스완이 바로 제 앞에서 숨을 멈췄으니까. 로빈은 스완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아마 그녀가 아주 잠깐 숨을 멈췄던 찰나의 순간을 자신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노아는 짐짓 모르는 척,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무슨 소리야. 숨이 멈추시다니.”
“확실해. 나중에 오드 님께 물어봐도 좋아. 당시에 폐하께서 단검으로 찌르신 부위가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오드 님이 치료를 하셨으니 알고 계실 거다.”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지?”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폐하는 작정하신 듯해.”
“…….”
“일부러 나를 자극했어.”
그녀를 수렁에 빠뜨리기 위해 정신을 갉아먹는 말을 내뱉은 건 자신이었지만, 지금에 와 생각해 보니 걸려 넘어간 건 자신이었다. 이엘은 ‘자해를 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 내기 위해 자신을 이용한 것이다.
“그날 폐하께선 작정하신 거야. 죽기 위해.”
“뭐? 뭔 헛소리야.”
확실해. 그녀는 한번 죽어 보려고 했던 거야.
“노아. 난 진지하다. 농담하는 게 아니라고.”
로빈이 미간을 좁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노아는 그의 말을 들으며, 잠든 이엘의 얼굴을 쳐다봤다.
뱀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이엘이 일부러 로빈에게 잡혔던 건, 연구소를 폭파시키려던 목적도 있었지만 로빈이 보는 앞에서 자해를 시도해 뱀이 안절부절못하게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으니까.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로빈의 추측은 노아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어쩌면 ‘그’가 폐하의 목숨을 지켜 주고 있는 건 아닐까?”
“…….”
“죽었다가 살아나셨어. 그것만큼은 확실해.”
로빈의 나지막한 말에 노아도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그때 스완이 숨이 멈췄던 것을 분명히 확인했다. 그것에 무게를 두지 않고 넘겨 버리긴 했지만…… 로빈의 말처럼 정말 그녀의 목숨과 ‘그’가 관련되어 있다면…….
“내 말을 네가 믿어 줄 리 없겠지만, 어쨌든 난 네게 말했어. 난 폐하의 편에 설 것이고, 너 역시 폐하의 편에 온전히 선다면 우린 같은 배를 탄 거라고.”
로빈이 말하는 이엘의 편에 온전히 선다는 것은, 그녀의 아이를 버려서라도 그녀를 지키겠다는 의미일 터였다.
“‘그’가 폐하를 지켜 주고 있는 건지, 아니면 반대로 목숨을 쥐고 흔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해진 듯하군.”
로빈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노아는 계속해서 잠든 이엘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말했다. 모든 진실을 말해 줄 수 없다고. 거기엔 이런 것도 포함되었던 걸까.
“이렇게 되면 폐하께선 벌써 두 번이나 죽었다가 살아나신 건가.”
로빈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려는 건지 노아를 향해 농담을 던졌지만, 늑대는 그 자리에 붙박인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침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아니. 르네가 죽일 뻔했던 것까지 합치면…… 총 세 번이나 위협을 당하셨어.”
몇 년 전 로빈의 영지에서 한 번. 인식표를 제거할 때 한 번. 그리고 르네가 검을 휘둘렀던 2차 전쟁 때 또 한 번. 아마도 총 세 번일 것이다.
“그때 독수리는 검을 제대로 휘두른 게 아니었나?”
“글쎄. 르네는 황녀를 확실히 죽였다고 했지만, 그가 착각했을 수도 있어. 그리고 그게 아니어도 폐하의 몸엔 인식표가 없다. 인식표는 몸에서 제거하는 순간 독이 퍼져 결국 죽게 되니까. 어쨌든 폐하께서 2차 전쟁 당시에 목숨이 여러 차례 위험하셨던 건 확실해.”
아무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1차 전쟁 전까지만 하더라도 암컷의 몸에 심은 인식표는 말 그대로 이종족과 인간의 인구수 파악용이라고만 알려져 있었으니까.
물론 그것이 추적의 수단으로 쓰일 수 있어, 1차 전쟁이 터졌을 때 도망쳤던 이종족들이 몸에서 인식표를 제거했지만 그들은 며칠 못 가 전부 죽고 말았다.
인식표를 신체에서 제거하는 순간부터 몸엔 독이 퍼진 것이다. 그게 독인지 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무도 그 독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인식표를 강제로 제거하는 순간부터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럼 역시 인식표로 인해 생긴 독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오드 님이 유일하다는 소린가?”
“그런 것 같다. 보호석과 같은 원리라고 생각해.”
보호석처럼 인식표에도 나자르의 성력과 수명이 들어간 건 아닐까. 그렇다면 깔끔하게 제거할 수 있는 것도 나자르뿐일 것이다. 보호석의 파괴와, 인식표의 해독성. 그게 나자르에게서만 가능하겠지.
아마 이엘이 2차 전쟁 당시 여러 차례 죽을 위기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녀의 곁에 오드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드가 이엘의 인식표를 제거해 줬으리라.
“지금…… 그게 무슨 소리지……?”
끊어질 듯이 가는 목소리가 들려와 노아와 로빈의 시선이 동시에 침대로 향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엘이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독성이라니?”
“폐하. 정신이 드십니까?”
“인식표에…… 독성이 있었나?”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저 그렇게 추측할 따름입니다.”
“어떻게…….”
말을 하다가 멈춘 이엘이 다시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크게 앓았던 탓인지 온몸에 힘이 빠져 입을 여는 것조차 버거웠다.
노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이마에 제 손등을 올려 체온을 쟀다. 다시 열이 오르는 듯했다. 결국 그는 급한 대로 제 능력을 사용하여 이엘의 이마에 한기를 더했다.
“폐하. 우선은 쉬신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짐이 쓰러지고 며칠이 지났나?”
“몇 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그러니 푹 쉬셔도 됩니다.”
“그래. 그럼 일정은 바꾸지 않고 내일 바로 독수리의 영지로 향한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가시는 길이 만만치 않을 테니, 하루 정도는 더 쉬셨다 가시지요.”
잠자코 이엘과 노아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로빈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권했다.
“폐하의 안전을 위해 말씀드리는 것이니 부디 제 청을 들어주십시오.”
“…….”
“저는 제 영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폐하께서 부디 건강하실 때에 출발하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이엘은 눈을 뜨고 로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는 처음 약속했던 대로 자신이 머무는 저택엔 단 한 번도 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제 침실에 있다는 건, 그만큼 정치적 입장이 곤란하다는 뜻이겠지.
“좋아. 우선 몸 상태를 봐서 출발하겠네.”
“감사합니다, 폐하.”
“그러니 조금 전에 두 사람이 하고 있던 대화에 대해 말해 줘.”
“…….”
“인식표 얘기는 무슨 뜻이지?”
인식표에 독성이 있다는 얘기는 전혀 들어 보지 못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인식표를 너무 쉽게 넘겼던 것도 같다. 이엘은 그 생각을 하며 손으로 제 쇄골 쪽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자신에게도 인식표는 심어져 있었고, 이 인식표는 제 기억이 맞다면 오드가 제거해 줬을 것이다.
2차 전쟁 때 르네의 검에 죽을 뻔했던 그날, 오드가 자신을 치료하며 동시에 인식표를 제거했던 것 같은데…….
“1차 전쟁 때, 인식표의 추적으로 많은 암컷들이 인간들의 손에 죽었습니다.”
의자에 앉은 노아가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차분하게 먼저 말꼬를 텄다.
“그래서 도망치던 개체들 중 일부는 몸에 심었던 인식표를 제거했습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요. 그렇게 하면, 어디든 숨어서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늑대나 하이에나처럼 불시에 영지를 습격해 암컷들을 모조리 도륙한 경우도 있었지만, 몇몇은 인간들의 공격을 피해 도망쳐 달아났다. 몸에 심어진 인식표가 추적의 수단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인식표를 제거하는 건 필수였다.
하지만 그들은 며칠 만에 시름시름 앓다가 전부 죽어 버렸다.
“인식표를 제거했던 개체들이 전부 죽었습니다.”
“…….”
“아마 함부로 제거하지 못하도록 황실과 연구소에서 손을 썼던 것 같습니다.”
이엘은 노아의 말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 인식표를 만드는 것에도 나자르의 성력을 사용했다는 건가? 그렇다면 보호석처럼 쉽게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억지로 뜯어낸 자리에 독이 퍼졌을 것이고, 그걸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은 나자르뿐일 테니까.
“그래서 2차 전쟁 때 인간 여자들도 같은 식으로 죽었겠구나.”
그녀의 나지막한 말에 노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2차 전쟁 당시,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종족들은 황실만을 점거할 예정이었다. 중간에 뱀과 하이에나가 모든 계획을 다 어그러뜨려 대상이 인간 전체로 확대되지만 않았더라면 거기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중간에 끼어든 뱀과 하이에나가 모든 걸 망쳤다. 닥치는 대로 인간을 죽이기 시작했고, 그중 뱀은 몇몇 어린 이종족들을 홀려 인간 여자들을 집중적으로 죽였던 것이다.
“로빈 공. 그럼 공작도 알고 있었겠네? 그렇게 인간 여자들을 집중적으로 죽이면, 그들이 인식표를 제거하고 달아나려 한다는 것을. 그대들의 종족이 1차 전쟁 때 그러했던 것처럼.”
“예. 맞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
“그러면 저희가 겪은 것처럼 똑같이 죽을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바라고 한 행동이었으니까요.”
“…….”
“하지만 알고 계시듯 복수를 위해 인간 여자들을 죽인 건 맞으나, 인간 여자만을 죽이는 게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목표는 인간 몰살. 여자고 남자고 가릴 것 없이 전부 죽이는 게 목표였다. 물론 인간 남자들을 전부 죽이는 건 실패로 돌아갔지만.
“인간들 중에 인식표의 독성에 대해 알고 있는 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겁에 질린 인간 여자들은 제 몸에 있는 인식표를 마구잡이로 뜯어냈고, 수습하려고 했을 땐 이미 모든 게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노아의 말을 끝으로 침실 안엔 정적이 감돌았다. 그렇게 한참 천장을 쳐다보며 생각을 정리하던 이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겠네. 우선 짐은 좀 쉬고 싶으니, 나가 주게.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를 테니까.”
“예, 폐하.”
“쉬십시오.”
로빈이 먼저 방을 나섰고 그 뒤를 노아가 따라가려는데 이엘이 불쑥 그를 붙잡았다.
“노아.”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