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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05화 (305/488)
  • 305화

    *

    “방문을 허락해 주신 것에 감사를 표합니다, 공작님.”

    “후작은 생각보다 끈기가 없는 듯하오.”

    “폐하의 일에 관해서는 참을성이 없어지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여간 정말 안 맞는군. 르네와 레온은 동시에 그 생각을 했다.

    며칠 뒤면 황제가 행렬을 이끌고 이곳 독수리의 영지에 친림할 것이다. 그런 와중 레온이 불쑥 르네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폐하께서 이곳에 머물 동안 자신도 독수리의 영지를 방문하고 싶다며.

    “그래도 보는 눈이 있는데, 후작은 그냥 후작의 영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데.”

    “어차피 표면적으로는 공작님과 저는 동맹 사이니까요. 오히려 정치적으로 보여 주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레온의 똑 부러진 대답에 르네도 할 말을 잃었다. 같은 우논에게 쓰기엔 의미 없는 말이긴 하지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고개까지 빳빳이 쳐들고 맞는 말만 하는 게 못내 못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집사에게 레온과 그의 종족들의 안내를 맡겼다.

    “그럼 폐하께서 오실 때까지 편하게 머물다 가길 바라오. 내 성 안이라면 어디든 구경해도 좋으니 자유롭게 다녀도 좋소.”

    그 말과 함께 르네는 일부 우논들과 함께 먼저 돌아섰다. 그러다가 멈칫하더니 다시 뒤로 돌아 집사와 함께 자리를 떠나려던 레온을 불러 세웠다.

    “아, 정원은 제외요.”

    “예?”

    “그곳은 누구의 출입도 금하고 있으니, 후작도 거기엔 발길을 두지 않았으면 좋겠군.”

    정원? 뭐 얼마나 대단한 곳이기에 저렇게까지 금지하는 건가. 제국 제일의 심미안을 가진 게 제 종족이었다. 황실의 조경을 전담하여 맡았고, 심지어 그 황실의 정원보다 화려한 곳이 제 영지의 정원이었다.

    어디 정원만일까. 영지 어느 곳을 가도 아름답기 그지없어서 동맹 여부를 막론하고 온갖 귀족들의 방문 요청이 쇄도하는 곳이 제 땅이었다. 그런 자신을 두고 정원 출입을 금지하다니.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음, 아니면 반대일 수도 있겠군. 제게 보여 주기 부끄러울 정도로 엉망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어지간히 형편없나 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레온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크게 궁금하지 않기도 했구요.”

    끝까지 뾰족한 말로 대꾸한 레온은 망토를 휘날리며 빠른 걸음으로 르네의 앞에서 사라졌다.

    “레온 후께서 착각하신 듯합니다.”

    곁에서 그를 보좌하던 엔리케가 허허 웃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르네도 알고 있다. 아마 제 대단한 심미안에 못 미치는 정원이라 내가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런 건 별 상관없다. 어쨌든 그 누구도 정원에 들어서지만 않으면 되니까.

    그녀가 먼저 그 땅을 밟기 전에는, 그 누구도.

    “각하. 집무실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생각난 김에 정원으로 가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엔리케를 비롯한 우논들의 인사를 받으며 르네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도착한 곳은, 완성된 이후로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되지 않은 정원이었다. 르네는 드넓게 펼쳐진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릴리가 살아 있을 때도 이렇게 정성을 다한 적이 없었는데. 만약 그 아이가 이걸 본다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크게 웃을지도 모르겠다. 오빠가 이렇게 팔불출이었냐며.

    전적으로 이엘을 생각하며 만들기 시작한 정원이었다. 릴리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종족을 이끌 자신이 없어, 한때는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집단 자살까지 생각했던 자신이었다. 그에게 영지는 그냥 억지로 떠안은 짐과도 같았던 곳이라, 황량함을 알고도 모른 척했었는데.

    꽃 하나가…….

    그녀가 몰래 남겨 두고 갔던 그 꽃 하나가 모든 걸 바꿨다. 끝내 그녀가 오지 않아서 피우지 못한 꽃봉오리.

    끝내 네 손이 닿았다는 이유로 내 질투를 받고 꺾여 죽어 버린 그 꽃 하나가, 내 영지를 바꿔 버렸다고 하면…… 넌 좋아할까?

    “도리어 이젠 네 손이 닿았으면 해서. 이 쓸모없던 땅을 갈아엎어 네 관심을 조금이라도 받았으면 해서.”

    늘 네 시선이 늑대의 영지에 있는 그 정원을 향하니까. 아무리 화려하게 꾸민 황궁의 정원도 넌 만족하지 못하고 늑대의 영지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래서 네 시선 하나 받아 보겠다고 여길 다 갈아엎었다고 하면……. 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네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황궁의 정원과,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늑대의 정원을 반쯤 섞어 만든 내 정원을 보면…… 넌 무슨 생각을 할까.

    솔직히, 좋아하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한 번만 웃어 주었으면……. 공작의 영지가 전보다는 볼 만하다고. 이제 좀 숨 쉴 만한 곳이 된 것 같다고. 그런 빈말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저를 보고 웃어 주었으면.

    르네는 곱씹던 생각에 실소를 터뜨렸다. 이 정도면 정말 중증이다. 나는 정말…… 네가 없으면 안 되나 봐, 나타니엘.

    “레온에게 참을성이 없다고 핀잔 줄 게 아니었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녀의 곁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근위대가 하이에나가 아니라 독수리였다면, 지금쯤 그녀의 곁을 호위하는 건 자신이었을 텐데. 그 생각을 하루에 수십 번씩 하던 때도 있었다.

    르네는 정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실 레온에게 보여 주기 부끄러운 것도 맞다. 그는 조경 사업으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고 있었으니까. 엉성하기 짝이 없는 제 정원이 그의 정원과 비교하면 얼마나 초라하겠는가.

    하지만 이엘은 알아주지 않을까. 이 꽃의 의미를. 네가 내게 주었던 꽃들로 이 정원 한가운데를 가득 메웠는데, 너만은 기억해 주지 않을까?

    또 그 주변은 내가 네게 주었던 야생화들로 가득 메웠는데, 너는 그 일을 기억해 주지 않을까? 그런 사소한 행복으로 이곳을 가꾼 것이다.

    그녀와 자신만의 추억이 담긴 꽃들로 빼곡하게. 제 마음을 표현하듯이.

    “나타니엘.”

    커다랗기만 한 정원의 중앙에 서서, 르네는 감히 부를 수 없을 이름을 남몰래 불러 보았다. 너의 늑대는 마음껏 부를 수 있는 그 이름을, 나는 몰래 불러야만 한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곳에 한참이나 붙박여 있었다.

    *

    결국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하트는 조용히 그녀의 침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 내내 고열에 시달리던 이엘은 조금 전에 약을 먹고 안정을 찾은 건지 곤히 잠들었다.

    “폐하께선 괜찮나?”

    하트는 자신에게 그녀의 안부를 묻는 원흉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물론 노아의 잘못만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어제 그녀가 서재에서 자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란 생각에 짜증이 밀려왔다.

    “열은 내리셨습니다. 아마 폐하의 상태가 제도에 있는 백조에게도 느껴졌을 테니 심각하다면 오드 님이 오실 겁니다.”

    냉랭하게 답한 하트가 더는 묻지 말라는 듯 침실 문 바로 옆에 선 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노아는 그의 무례한 태도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앓았던 고열 탓인지 침실 내 공기가 후끈거렸다. 노아는 의자를 침대 가까이에 내려놓고 그곳에 앉았다. 곤히 잠든 이엘은 숨소리를 고르게 내고 있었고, 얼굴은 조금 전보다 평온해 보였다.

    확실히 그녀는 다른 인간들보다 잔병치레가 많다. 노아의 생각으로는 날 때부터 몸이 약하게 태어난 건 아닌가 싶었다. 그나마 어려서부터 검술을 비롯한 육체적인 훈련을 한 덕에 지금까지 잘 버틴 모양이지만…….

    “엘.”

    잠든 그녀는 듣지 못하는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그러고는 얕은 한숨과 함께 의자 등받이에 등을 붙이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았다. 지난 며칠간의 짙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어제 그녀와 했던 대화, 그리고 며칠 전의 로빈과의 대화. 그걸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다. 오드가 왜 제게 ‘그’가 이엘에게 나타난 건지 알아내라고 했던 것 역시.

    선황의 그릇된 선택이 그녀에게 대물림된 것이고, 로빈은 그녀에게 대물림된 것을 그녀의 아이에게 대물림시킬 생각인 것이다.

    똑똑. 노아가 피로함에 짓눌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폐하, 로빈입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이엘은 여전히 깊게 잠든 상태였다. 노아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대신해 문을 열었다.

    “폐하께선 아직 주무시고 계시오.”

    “잠깐 들어가서 괜찮으신지 확인만이라도 하고 싶은데.”

    “폐하께서 깨시면 다시 오는 게 어떻겠소.”

    “그리 나를 못 믿는다면 근위대장과 함께 들어가면 되지 않겠소?”

    로빈은 그렇게 말하며 문 앞에 있는 하트를 가리켰다. 어느새 로빈의 뒤에 선 하트가 노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적인 입장에서라도 로빈은 그녀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결국 노아도 문을 열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근위대장. 여긴 내게 맡겨도 좋다. 경은 밖을 지켜 주게.”

    “알겠습니다.”

    하트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로빈은 침실 안으로 들어왔고, 하트는 살짝 묵례하고는 문을 닫으며 노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편 로빈은 노아를 지나쳐 침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일부러 자신의 성을 그대로 옮겨 놓듯 지은 저택이었다. 침실의 배치 역시 그녀가 예전에 머물렀던 곳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로빈은 그녀가 제 영지에 머문 뒤로 이곳에 들른 적이 없음에도, 이 방 곳곳을 눈감고도 돌아다닐 정도로 익숙했다.

    그래서였나.

    “공작?”

    “…….”

    “로빈. 거기서 뭐 하나?”

    제 뒤에 있던 노아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저를 부를 때까지, 로빈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불현듯 이엘이 단검으로 제 목을 찔렀던 그날이 떠오른 것이다. 그때도 저렇게 죽은 듯 누워 있었는데……. 몇 번을 확인했다. 이엘이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입가에 손을 대며 끊임없이 확인했다.

    “폐하께선…… 괜찮으신 건가?”

    로빈의 물음에 노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 짧게 말을 붙이곤 비교적 평온한 낯의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아.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네게 묻고 싶은 게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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