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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04화 (304/488)

304화

이름이 포레스트라고 했던가. 저 거슬리는 낯짝이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몇 년 전에 그녀가 이곳으로 납치되었을 때, 갑자기 스완이 죽다 살아나는 바람에 이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협상이라는 명목으로 로빈의 영지에 들어왔었다. 그리고 그때 만찬실에서 그녀의 뒤를 지키고 있던 우논의 얼굴이 저놈과 닮았다.

로빈이 이엘에게 뱀을 진상했다더니, 일부러 저런 놈들만 골라서 바쳤던 건가. 뱀 특유의 곱상한 낯짝으로 그녀의 옆에서 알랑거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구역질이 밀려왔다. 노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커튼을 쳐서 제 시야 안에서 놈을 치워 버렸다. 어차피 하트에게 곧 쫓겨나겠지.

그렇게 뒤로 돌아서려던 노아는 어젯밤의 일라이저가 불쑥 떠올라 멈칫했다.

‘폐하를 호위하는 것은 제 몫이나, 위로를 드리라는 말씀은…… 제겐 조금 상처가 되는군요, 공작 각하.’

에둘러 이야기했다.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일라이저는 그렇게 고백한 것이다.

젠장. 일라이저를 생각하니 다시 마음이 착잡해졌다. 차라리 마음을 열지 말았어야 했다. 오랜 시간 외면해 왔던 것처럼, 선을 긋고 놈과 손을 잡아서는 안 됐다.

저쪽은 여전히 자신을 동맹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데 자신은 쓸데없는 우정 때문에 그 아들을 더는 외면하지 못하게 돼 버리다니. ……일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됐는데.

그러다 문득 시선을 돌려 곤하게 잠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잠든 얼굴을 보는 건, 세상 그 누구도 누리지 못할 영광의 자리였다. 이엘은 아무에게나 곁을 주지 않으니까.

‘공작님이 부럽습니다.’

그 말과 함께 일라이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노아는 주먹을 꾹 쥐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라이저만이 아니겠지……. 아마 르네도, 레온도. 모두 이 자리를 부러워하고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이 참 묘한 감정을 안겨 주었다.

노아는 기본적으로 이엘의 감정을 존중하는 편이었다. 질투가 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기 때문에. 늑대는 평생을 하나의 반려만 두고 살아가지만 이엘은 늑대가 아니었고, 거기다 제국을 이끌고 있는 황제였다. 언젠가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와 감정을 섞고 마음을 나눈다고 해도 그걸 막을 권리 따윈 제게 없었다.

“그래도 당신이 힘들거나 행복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저였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을 하며 잠든 그녀의 체온을 높여 주기 위해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던 노아는,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각하, 접니다. 옷은 앞에 두고 가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오늘 일정은 전부 취소하였습니다. 서재 근처는 제가 호위하고 있을 테니 염려 마시고 폐하께서 푹 쉬실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알겠다.”

문을 열었을 땐 이미 하트가 사라진 뒤였다. 노아는 이엘이 깨지 않게 옷과 물건을 챙겨 조용히 문을 닫았지만 그녀는 그 작은 소리에 깨고 말았다. 부스럭거리며 주섬주섬 일어선 이엘이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켜고 그에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야, 공작.”

“죄송합니다. 더 주무십시오, 폐하. 아직 시간이 이릅니다.”

“밖에 하트 경이 왔나?”

“예. 옷을 전해 주고 갔습니다. 착의 시중을 들겠습니다.”

그녀는 제 말에 부탁한다는 대답과 함께 오들오들 떨며 덮고 있던 모포를 벗었다. 안 그래도 서재 안이 휑뎅그렁해 서늘했는데 밤새 온도가 더 내려간 건지 늑대인 자신도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이엘은 잔병치레가 심한 편이라 노아는 그녀가 감기에 걸리지 않게 서둘러 착의를 돕고 그 위에 모포를 또 덮어 주었다.

“폐하, 오늘 일정은 취소됐습니다. 조금 더 눈 붙이셔도 됩니다.”

“음. 그럼 오늘 하루만 같이 쉴까?”

이엘은 그 말을 끝으로 저가 덮고 있던 모포를 들추고 제 옆자리를 탁탁 쳤다. 노아는 잠깐 창문이 있는 곳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이엘이 배시시 웃으며 꼼지락거리듯 몸을 움직이더니 이내 노아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노아도 작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히 쓸어 주었다.

“노아. 좀 잤어?”

“폐하께서 잠든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칠 리 있겠습니까.”

“그럼 지금부터는 내가 지켜볼 테니 그대는 눈을 붙이도록 해.”

새하얀 손바닥이 노아의 눈을 가렸다. 하지만 노아는 미세하게 벌어진 손가락 틈새로 계속해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에 이엘은 이맛살을 구기며 짧게 침음했다. 자라는데도 말을 안 들어…….

“노아. 그러지 말고 아예 누워. 그렇게 조금만 눈을 붙이자.”

“폐하.”

“응?”

“로빈이 무슨 말로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까.”

“…….”

“그의 헛소리 때문에 줄곧 이런 상태이신 게 아닙니까? 로빈의 침실에서 놈이 대체 무슨 말을 한 겁니까.”

노아가 제 눈을 덮은 이엘의 손을 잡아 내리며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일라이저에게 말했듯, 그녀가 먼저 말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묻지 않으려 했지만……. 저렇게 심난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모른 척하겠는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물은 것이다.

이엘은 가만히 그와 눈을 마주치다가 짧은 한숨과 함께 노아의 무릎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제 무릎을 당겨 팔로 감싸며 생각에 잠겼다.

로빈의 이야기를 듣고 며칠 동안 홀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말한 리노 윌터라는 존재에 관해.

죽었다. 비록 제 기억이 드문드문하기는 해도, 이온이 친구의 상실로 인해 펑펑 울었던 것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도 반역죄와 비슷한 수준의 죄목이 달려 죽었을 텐데……. 그가 여태 살아 있다는 건 단순히 윌터 백작이 제 아들을 몰래 빼돌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리노 윌터의 죽음이 위장이라면, 그의 죄목도 위장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선황의 눈을 피할 수 없었을 터.

결국 선황도 리노 윌터의 가짜 죽음에 엮여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윌터 백작의 영지에서 찾을 자가 있어.”

“예……?”

“놈의 영지 지하에 누군가 숨어 있는 듯해.”

그녀의 말에 노아가 열었던 입을 닫았다. 결국 로빈은 자신이 지지부진하니 방향을 바꿔 이엘에게 직접 털어놓은 모양이었다.

“왜 누군지 묻지 않아?”

“폐하께서도 예상하셨겠지만, 며칠 전에 로빈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

“놈이 제게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윌터 백작령에 있는 놈을 찾아내라고요.”

“그랬군.”

“불확실한 정보라 폐하께 고하지 못했습니다. 놈이 또 혼란을 주려는 건 아닌가 싶어, 그동안 혼자 고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니야. 됐어. 그대에게도 말하고 내게도 거듭 말한 것을 보면 로빈이 함정을 던진 건 아닌가 보네. 어쨌든 그는 나와 그대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그게 누구인지, 폐하는 아십니까?”

“윌터 백작의 차자.”

차자? 이엘의 대답에 노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불과 몇 달 전 일라이저의 영지에서 그녀에게 들었던 얘기가 떠오른 탓이다. 윌터 백작의 차자는 황자의 친구였고 어린 나이에 연구원으로 들어왔지만,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죽었다고 했었는데.

“그자가 살아 있었습니까? 그러면 백작은 그의 죽음을 숨겼던 겁니까? 무슨 이유로……,”

“그가 알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

“백작의 아들, 리노 윌터가 ‘목소리’를 알고 있어.”

“어떻게…….”

“아마도 선황, 그러니까 내 아버지가 무슨 짓을 저질렀던 모양이야. 그걸 리노 윌터가 알게 됐고, 선황은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죽음으로 위장한 게 아닌가 싶어.”

한때는 윌터 공작가로 위세를 떨치던 때도 있었다. 황녀의 약혼 대상으로 가장 먼저 손꼽히는 가문이기도 했고, 실제로 공작들 중엔 황녀와 혼인을 한 자들도 있었다. 올리세스가 그토록 혈통을 자랑하는 것도 다 거기서 기인하는 것일 터였다.

즉, 비록 백작으로 강등되기는 했어도 윌터 가문은 건재하다는 소리다. 귀족들 사이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상당하고, 그 단단한 명망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역모에 준하는 죄목으로 죽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 억울한 누명이었다면 윌터 백작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아무리 황권이 강력하던 시절이었다고 해도 긴 시간 쌓아 올린 가문의 이름이 먹칠되는 것을 두고 볼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건 리노의 죽음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소리다. 어쩌면 윌터 백작이 제 아들을 두고 선황과 거래를 했을지도. 그렇게 되면 거래의 내용이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이엘이 다시 차근차근 설명을 이었다.

“아마 선황은 리노 윌터가 비밀을 누설하기 전에 그를 처리하려고 했을 거야. 당시 리노는 연구원이었으니, 연구실과 관련해서 말만 지어내면 충분히 반역죄로 몰아 죽일 수 있었을 테고. 진실을 몰랐던 윌터 백작은 제 아들을 살리려 선황과 협상을 한 것 같아.”

리노 윌터가 미친 건, 아마 심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 탓일 것이다. 선황은 그가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돌려보냈을 테고.

황가의 입장에서도 윌터 백작가를 등지는 건 큰 손해가 따를 테니 적정한 선에서 타협을 본 게 아닐까. 그렇게 하면 진실을 모르는 윌터 백작은 황실에 더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추측한다면…… 내 아비가, 선황이 ‘목소리’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소리가 돼. 그걸 리노 윌터가 알게 된 거고.”

이엘의 그 말에 노아는 잠깐 숨을 멈췄다. 며칠 전에 로빈이 제게 했던 말이 떠올라서.

‘모든 거래엔 대가라는 게 존재하더라고.’

‘…….’

‘그리고 그 거래를 지키지 못하면 대물림되는 경우가 왕왕 있지. 그 대가라는 것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왜 ‘그’가 폐하께 나타났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대물림……. 이제야 알 것 같다. 로빈이 무슨 뜻으로 그 이야기를 꺼낸 건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윌터 백작령을?”

“예. 다음 시찰지는 독수리의 영지이니, 폐하께서 그곳에 머무르시는 동안 제가 윌터 백작령에 다녀오겠습니다.”

“납치는 안 돼. 로빈이 우리에게 이 정보를 알려 준 건 그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대가 그곳에서 리노 윌터를 납치하고 나오는 것을 뱀이 알게 된다면, 로빈은 제 가설에 확신을 달 것이다.”

“백작령에 몰래 들어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럼?”

“정식으로 허락을 받아 들어가려 합니다.”

노아의 말에 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올리세스가 노아의 방문을 허락할지가 의문이었지만.

“괜찮겠나?”

“예, 폐하. 어떻게든 안전하게 들어가서 리노 윌터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어. 그러니까 지금은 좀 쉬자.”

그렇게 말하며 이엘이 모포 안으로 몸을 넣고 다시 누웠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노아를 향해 빙긋 웃고는 덮고 있던 모포를 살짝 들췄다.

“공작도 어서 들어와.”

“하지만…….”

“곧 떠날 거잖아. 또 오래 떨어져야 하는데, 오늘 하루만 이렇게 같이 있자.”

언제나 이엘의 말에 마음이 약해지는 노아는 결국 피식 웃고는 그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러곤 그녀의 머리를 들어 제 팔 위에 올렸다. 이엘이 꿈틀거리며 노아의 품에 밀착하듯 깊게 파고들었다.

“노아와 함께 눈을 감으면, 불면증이 사라지는 것 같아.”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노아는 팔로 그녀를 감싸고는 눈을 감았다.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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