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그래서 나는 그게 뭔지 알아낼 작정이오.”
“예?”
“폐하께서 왜 ‘그’의 손을 잡았는지. 대체 놈이 폐하께 원하는 건 뭔지.”
“…….”
“그러기 위해선 폐하의 곁에 믿을 만한 자가 많이 필요하오. 러셀 후작. 그대는 한시도 눈을 떼지 말고 폐하의 곁을 지켜 주었으면 좋겠소.”
“물론입니다. 저는 폐하를 위해 검을 들었으니까요.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일라이저의 믿음직한 대답에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묵은 감정이 다 사라졌다. 웃기게도 비밀을 공유한다는 건 새로운 소속감을 갖게 만들어서. 그토록 증오하던 루시우스 러셀의 아들을 이제야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폐하께는 말씀드리지 않을 겁니까?”
일라이저의 물음에 노아가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주먹을 꾹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세스의 영지에 뭔가가 있다는 걸 일라이저가 몰랐다는 것은, 로빈이 호수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빈은 노아가 이엘에게 그날 밤 자신과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를 모두 꺼내기를 바라는 듯했다. 그렇게 해야 노아가 그녀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우스운 충고를 하며.
하지만 노아는 끝내 침묵했다. 그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어떻게 그녀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여 로빈은 기다리다 지쳐 저가 먼저 그녀에게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다. 아마도 호수에서 나온 뒤 침실에서 치료를 받으며 둘만 남겨졌을 때 은밀히 말했겠지. 듣자 하니 이엘이 겨우 치료한 로빈의 목을 눌러 환부가 다시 터졌다고 했다. 아마 그때 얘기했을 것이다. 그러니 일라이저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이 내용을 모를 수밖에.
로빈이 이엘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노아는 그녀가 먼저 제게 말하지 않는 이상 침묵할 생각이었다. 로빈의 말이 거짓일 수도 있으니까.
“후작. 폐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도록 하시오. 난 이곳에 머무는 이상 폐하께 다가갈 수 없으니까.”
“제가 어떻게…… 감히 폐하를 위로하겠습니까.”
일라이저의 목소리가 낮아졌지만 노아는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므로 눈치채지 못했다.
“후작은 과거에도 폐하의 친구로 가깝게 지내지 않았소? 지금쯤 폐하께서도 심려가 깊으실 것이오. 말동무라도 해 드리면서……,”
“부럽군요.”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요?”
“공작님이 부럽습니다.”
“…….”
“저는 폐하께 감히 나설 수 없습니다. 위로는커녕 감히 말도 건네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제야 노아가 눈썹을 위로 들어 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제 앞에 서서 당당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일라이저의 얼굴 위로 루시우스의 얼굴이 겹쳐졌다. 놈의 아들은 놈보다 더 또렷한 인상과 맑은 정신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아주 잠깐 균열이 생기듯, 얼굴 위에 근심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각하께선 어느 때든 폐하께서 부르지 않으셔도 찾아갈 수 있겠지만, 저는 다르단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
“그러니 지금 폐하를 찾아가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일라이저가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폐하께 위로가 필요하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분의 위로가 되어 드릴 순 없습니다, 각하.”
“후작…….”
“말동무라고 하셨습니까? 저는 폐하의 말동무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건 사심이 없는 놈이나 가능한 일이다. 이엘을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속앓이를 해 온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불가능한 일.
“폐하를 호위하는 것은 제 몫이나, 위로를 드리라는 말씀은…… 제겐 조금 상처가 되는군요, 공작 각하.”
“후작, 그대 혹시…… 아니. 됐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시간이 늦었으니 쉬시오.”
젠장. 놈을 닮은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면 나더러 어쩌란 거야. 젠장…….
노아는 빠르게 일라이저의 방을 나와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최대한 멀리 벗어났다. 그렇게 미친 듯이 걷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저택의 현관 앞에 섰음을 발견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다가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뺨을 때리듯 불어 들었다.
“언제부터였지?”
놈은…… 일라이저 러셀은 대체 언제부터 그녀를 마음에 품었던 거야. 그 얼굴에 서렸던 감정은 결코 얕은 감정이 아니었다. 꽤 오랜 시간을 앓아 왔던 감정이 잠깐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에 드러났던 것이다.
“하아……. 미치겠군.”
마음을 열었다. 해묵은 감정을 모두 버리고, 일라이저 러셀을 루시우스 러셀과 다른 존재로 받아들이기로.
손을 잡았다. 비밀을 공유하면서 이제 적이 아닌 한배를 탄 동지로,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랬더니 루시우스와의 좋았던 기억만 남아서……. 놈이 내게 한 짓은 전부 잊어버리고 놈의 아들에게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 알량한 선의까지 생겨 버려서.
우습다. 내 주제에, 이런 처지에 무슨 선의고 무슨 동정심이야.
“연적인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며 헛웃음을 터뜨렸을 때였다.
“노아?”
마치 건반을 누르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노아? 맞지?”
“…….”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노아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꺼운 숄을 어깨에 걸치고 램프를 손에 든 이엘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노아는 혹 찬 바람이 안으로 들이칠까, 열었던 문을 황급히 닫았다.
“폐하. 어째서 이 시간까지 안 주무셨습니까.”
“하던 일이 덜 끝나서.”
거짓말이다. 그녀의 질린 얼굴이, 조금 전에 악몽에서 깨어났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노아는 큰 보폭으로 걸어가 이엘의 앞에 섰다.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아니야. 오늘은 서재에 있을 생각이야. 그러니 그대는 먼저 돌아가 쉬도록 해.”
“폐하.”
노아는 돌아서는 그녀의 팔을 저도 모르게 잡았다가 놓았다. 누가 봐도 위태로워 보이는 그녀를 이렇게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 걱정을 알아차린 듯, 이엘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말했잖아. 잔업이 많다고. 곧 여길 떠나게 되니까, 그 전에 해결할 게 많아.”
“물론 마음은 어렵겠지만, 그래도 쉬셔야 합니다. 폐하께선 지난 3년간 짧은 휴식도 없이 달려오셨으니까요. 영지 시찰 때만이라도 쉬십시오, 폐하.”
“……알겠어. 그럼 책 조금만 보고 돌아갈게. 억지로라도 눈을 피로하게 만들어야겠어.”
“그런데 하트 경은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저택 안이라고는 해도 위험하십니다.”
“황위에 오른 뒤로 그대들의 걱정이 부쩍 늘어난 듯해.”
“…….”
“자꾸 잊나 본데, 나는 내 몸 하나 건사할 정도의 체술은 갖고 있어.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다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서재로 가려는 모양이었다. 노아는 다시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럼 서재까지 모시겠습니다.”
“응. 그럼…… 부탁해.”
뚜벅뚜벅. 두 사람의 걸음 소리가 커다란 복도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이엘은 제 뒤를 따르는 노아의 구두 소리를 들으며 램프로 길을 비췄다.
2층에 있는 서재엔 딱히 볼 만한 책은 없었다. 당연히 로빈이 그들이 머무는 저택에 중요한 서적을 둘 리 없었으니까. 다만 로빈이 제 취향을 맞추려고 했던 건지 음악과 관련한 책이 상당히 많았을 뿐.
노아는 서재 문을 열어 주며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익숙하게 서재 안의 불을 밝힌 이엘이 먼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고맙네, 공작. 돌아가 쉬도록 하게. 내일 보도록 하지.”
“예, 폐하. 폐하께서도 조금만 계시다가 금방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좋은 밤 보내십시오.”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재 문을 닫았다.
그러나 문은 닫히지 않았다.
“폐하.”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로 좁아졌던 문틈이 벌어졌다. 그렇게 세게 힘을 준 게 아니었는데도, 제 마음이 그녀에게 통한 건지 문고리를 잡고 있던 이엘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 것이다. 결국 문은 처음 상태로 활짝 열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추운 것 같습니다.”
춥다고? 이엘이 뜬금없는 노아의 대답에 미간을 살풋 찡그리며 의문을 표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추운 영지에 사는 노아가 추위를 느끼다니. 겨울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폐하와 함께 이곳에서 머무르고 싶습니다.”
“아…….”
이엘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가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러더니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추운 것 같아요. 오늘은 별저에 머물러 주세요.’
그와 처음 밤을 보냈을 때 자신이 보낸 신호와 같은 말을 던진 것이다. 벌써 몇 번을 보낸 밤인데도, 노아는 언제나처럼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고 귓불이 붉어질 정도로 자신의 모든 것을 좋아했다. 이엘은 잡고 있던 문고리를 놓고 그의 목 뒤로 팔을 걸어 끌어안았다.
“신께 맹세해. 노아, 내가 그대를 정말 사랑하고 있음을.”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입술은 노아에게 잡아먹히듯 빨려 들어갔다. 정신없이 서로의 옷을 풀어 헤치고 만지작거렸다. 노아는 한 팔로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고는 다른 손으로 서재 문을 급하게 닫았다.
*
엉망이 된 바닥 위에 모포라도 깔려서 다행이었다. 노아는 제 품에 안긴 이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발간 뺨 위에 입술을 길게 붙였다가 떨어졌다. 그러곤 검지로 그녀의 이마에서 코를 지나 턱 끝까지 그림 그리듯 만지작거렸다.
“으음…….”
보통 이 정도로 장난치면 금세 일어나곤 하는데 정말 피곤했던 건지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도리어 온기를 찾으려는 듯 제 품속으로 더 깊게 파고들 뿐이었다.
노아는 그렇게 한참 그녀만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서재를 둘러봤다. 이 서재 안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는데, 지금은 엉망이 된 터라 여기가 서재인지 창고인지 통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책들과 종잇조각을 흥미 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했다.
“나타니엘.”
장난치듯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귀에 바람을 불어 넣었지만, 이엘은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노아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서 떼어 놓고 먼저 자리에서 벗어났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조금 더 잠을 청해도 되겠지만 새벽에 그녀가 사라졌으니 곧 근위대장인 하트가 이곳으로 들이닥칠 게 빤했기 때문이었다. 그 전에 하트를 만나 미리 말해 두는 게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제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대충 옷을 걸치고 서재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급하게 이곳으로 다가오던 하트와 마주친 것이다.
“폐하께서는…….”
“안에 계신다. 마침 잘됐군. 폐하께서 입으실 옷과 모포를 좀 가져오겠나? 많이 피곤하신 듯하니 오늘 일정은 좀 미뤄 두고, 혹시 모르니 뱀이 저택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특별히 경비에 더 신경 쓰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폐하의 옷과 모포는 문 앞에 두고 가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게.”
하트가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뒤 노아는 다시 문을 닫고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 창가 쪽으로 다가간 노아는 창밖을 어슬렁거리는 뱀을 발견하곤 미간을 찌푸렸다.
“끈질긴 새끼가 들러붙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