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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02화 (302/488)
  • 302화

    “선황이 악마를 숭배했다니? 무슨 증거로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리고 그걸 리노란 놈이 네게 말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게 어디서 바보 취급을 해.”

    “진짜라니까요! 그리고 놈이 말한 게 아니라 제가 들은 겁니다. 리노 윌터는 오랜 고문 끝에 미쳤어요. 미쳐 버려서 아무 말이나 술술 내뱉는다니까요? 윌터 백작은 자기 아들이 제정신이 아닌 걸 숨기려고 가뒀고요.”

    “네 말대로 리노 윌터가 미쳤으면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선황이 악마를 숭배하다가 이 꼴이 났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가 아는 건 거기까지라구요!”

    렉토스가 답답하단 표정을 지으며 제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하라고 해서, 정말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했는데 이젠 목숨의 위협까지 당하고 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소모라에서 황제와 마주쳤을 때 모른 척하고 숨어 버릴 것을 그랬다. 적어도 거긴 이렇게 가둬 놓지는 않으니까.

    한편 앤디는 렉토스의 말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정황을 파악했다.

    저놈은 과거에 윌터 백작가와 가까운 사이였던 리히만 백작의 사생아였다. 아비를 따라 윌터 백작령에 갔던 렉토스는 그곳에서 리노를 만났다. 그는 윌터 백작의 차남으로, 과거에 황실 연구원으로 뽑혀 어린 나이에 연구원이 되었으나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았고 그로 인해 미쳐 버렸단다.

    렉토스는 제 아비와 윌터 백작의 눈을 피해 리노에게 접근했고, 그가 횡설수설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선황이 악마를 숭배했고, 악마에게 뭔가를 바치려고 했다는…….

    “근데 그게 뭐 어쨌다고. 그게 왜 폐하께 위협이 된다는 거야?”

    “그거야 저도 모르죠! 말했잖습니까. 그건 제가 로빈이 제 심복과 하는 얘기를 엿들은 거라니까요? 그냥 제 어리석은 소견으로 추측하기엔 선황이 악마에게 바치려고 했던 게 지금의 황제 폐하가 아닌가 하는……,”

    “그만.”

    “…….”

    “지금 네가 알고 있는 내용을 또 누가 알고 있지?”

    “아, 아마 저밖에 모를 겁니다……. 저도 여기 끌려오기 직전에 들은 거라 다른 사람한테 말한 적도 없어요…….”

    사실 렉토스도 앤디의 말처럼 리노가 했던 말을 반쯤 흘려들었다. 제정신이 아닌 놈의 입에서 나온 말을 귀 기울여 들을 리가 있나. 그렇게 잊고 살았다.

    그러나 로빈의 영지에 끌려가게 되고, 그가 윌터 가문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물론 그게 가능했던 건, 과거에 렉토스 무리가 세잔티노에서 밀매업 근거지를 두었을 때 우연히 그곳에서 올리세스를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올리세스를 보지 않았더라면 로빈에게 윌터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 터였다. 전쟁 직후에 먹고사는 게 바빴는데 그딴 가문을 다 어떻게 기억하고 있겠는가.

    리노 윌터. 렉토스는 횡설수설하던 그 소년을 어렴풋하게 떠올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놈이 한 말은 여전히 믿지 않는다. 그렇긴 하지만…… 하필 자신이 여기 끌려오기 직전에 로빈이 하는 말을 엿들은 터라.

    “당했네.”

    앤디는 그제야 제 뒷목을 잡으며 짜증을 부렸다. 로빈의 잔꾀에 당하고 말았다. 그는 렉토스를 일부러 자신들에게 보낸 것이다. 렉토스가 제게 했던 말이 사실인지, 그 진위 여부를 알기 위해서.

    “그래서 패티스 님이 화가 나셨던 거군.”

    “저, 저기요. 부단장님, 저 좀 살려 주시면 안 됩니까? 전 건국된 뒤로도 계속 뱀의 영지에 갇혀 살았습니다. 부디, 부디 저를 풀어 주십시오. 저는 더 이상 아는 것도 없고, 알고 싶은 것도 없습니다. 평범하게 살겠습니다. 네?”

    “말했잖아. 널 납치하라고 명령하신 건 폐하야.”

    “폐하요? 그럼 전 여기서 폐하가 올 때까지 갇혀 있어야 합니까?”

    “당연한 거 아냐? 네 신병은 폐하께서 결정하신다.”

    “언제 올 줄 알고 계속 기다립니까?!”

    렉토스는 있는 힘껏 짜증을 부리더니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지 못했다. 젠장, 빌어먹을 애송이 꼬마! 그 여자는 예전부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교활한 수법으로 날 이용해 먹더니, 이제는 저가 황제가 됐다고 이렇게 막 대해? 계집 따위가 귀한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이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젠장, 역시 그 꼬마 놈은 그때 처리했어야……! 컥!”

    “미쳤나?”

    조금 전까지 무르게 굴던 모습은 어디 가고, 앤디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철창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렉토스의 목을 틀어쥐었다. 엄청난 악력에 렉토스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얼굴이 퍼렇게 질려 갔다.

    “크, 크헉! 자, 잘못……!”

    “내가 우습나? 아니면 설마 폐하를 우습게 보고 있는 건가?”

    “크흑!”

    “네 말대로 네가 알고 있는 걸 전부 털어놓았다면, 쓸모가 없어진 넌 패티스 님의 손까지 갈 필요 없이 내 손에서 목이 부러질 텐데.”

    “…….”

    “대체 뭘 믿고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악력이 점점 더 강해진다. 하지만 렉토스는 목이 부러질 것처럼 틀어쥐는 앤디의 손보다, 새카만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오금이 저리고 숨이 막혔다. 저게 말로만 듣던 이종족의 눈인가……. 금방이라도 옷에 실금을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고작 망해 버린 귀족 나부랭이의 사생아 주제에, 감히 존엄하신 폐하를 모욕해?”

    “자, 잘못, 잘못했…… 크헉!”

    “폐하께서 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으셨으니 살려는 주마. 하지만 한 번만 더 그따위 망언을 했다가는,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하다는 걸 알게 될 거다.”

    “네, 네……!”

    “아직도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놈이 있다니. 한심하긴.”

    렉토스의 목을 놔준 앤디는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제 옷에 손을 툭툭 털며 철창 안으로 침을 툭 뱉고 지하 감옥을 나왔다. 이엘이 생포해서 제도로 데려가라는 말만 안 했어도 놈은 오늘 제 손에 죽었을 텐데. 잠깐이나마 놈을 동정해 먹을 것을 주려고 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살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저놈이 경을 열받게 했나 보군?”

    지상으로 올라오자마자 저를 기다리고 있던 패티스와 마주쳤다. 앤디는 뒤로 주춤하며 미간을 찌푸리다가 한숨과 함께 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백작님의 말씀대로 할 걸 그랬네요. 저런 새끼는 그냥 굶겨 죽여도 싼데.”

    “한낱 미물 따위에 감정 소비 하지 말게. 경은 가끔 자신이 이종족이란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아.”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제가 왜 이렇게 변한 건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앤디는 저가 왜 이렇게 된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폐하와 인간을 별개로 보는 게 좋을 거야.”

    “…….”

    “더는 인간에게 배신당하는 일 없게.”

    그 말을 끝으로 패티스는 앤디를 남겨 두고 먼저 돌아섰다.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 멍하니 서 있던 앤디는 주먹을 거세게 쥐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늦었다. 이미 자신은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인간을 제 울타리에 들여놓고 말았으니까.

    *

    “윌터 백작령에 다녀와야겠소.”

    “예? 지금 말씀이십니까?”

    아주 늦은 새벽, 일라이저는 제 방을 찾아와 한참 만에 입을 연 노아의 첫마디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올 정도라면 긴급한 일이라고는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윌터 백작령이라니.

    “곧 이곳을 떠나 독수리의 영지로 가겠지. 거기서 나는 폐하를 떠나 윌터 백작의 영지에 다녀올 생각이오.”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며칠 전에 로빈을 만나 찝찝한 이야기를 들었소.”

    “…….”

    “윌터 백작의 영지에 뭔가가 있는 듯한데. 그게 뭔지 확인하고 와야겠어.”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올리세스 윌터와 로빈은 손을 잡았으니까요.”

    “그래도 누군가는 확인해야 하는 것이오. 폐하께서 직접 나서시지 않게, 내가 해결하는 편이 낫소.”

    혹시나 싶어서 넌지시 물어봤던 건데, 일라이저의 반응을 보니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며칠 전 호수에서 작은 마찰이 있었다고 들었다. 로빈의 어떤 말로 인해 하트와 일라이저가 그의 목을 검으로 그었다고. 그래서 노아는 로빈이 그 자리에서 제게 했던 말을 똑같이 털어놨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일라이저의 방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라이저의 반응을 보니 그건 아닌 듯하고. 그럼 대체 그곳에선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거지?

    노아는 길게 한숨을 내뱉고는 일라이저를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그나저나 호수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왜 후작과 근위대장이 로빈에게 검을 댄 거지?”

    “뱀이, 반역에 가까운 말을 했습니다.”

    “무슨…….”

    “폐하께 황위를 내려놓으라고 하더군요. 그것에 연연하지 말라며.”

    “…….”

    “또한 올리세스 윌터가 ‘그’를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역시 백작의 영지에 뭔가가 있는 거야. 그 무언가가 올리세스 윌터에게 ‘그’의 존재를 언급한 것이다.

    “공작님.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폐하께서 미지의 존재를 만나신 걸까요?”

    “폐하를 의심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폐하께서 왜 그런 선택을 하신 것인지, 어리석은 저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아 드리는 말씀이십니다.”

    “후작이 말하는 그 미지의 존재. ‘그’가 정말 악하고 무서운 존재라면 폐하를 겁박했을 수도 있다.”

    “…….”

    “당시에 폐하는 아주 어린 소녀였으니까.”

    고작해야 성년을 지났을 나이였다. 제대로 된 보살핌이나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자라온 어린 소녀가 극한의 공포에 치닫게 됐을 때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아니. 판단력은 흐려지게 마련이다. 당장의 공포를 면하기 위해 회유책에 흔들리겠지.

    신은 인간에게 똑똑한 지혜를 허락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도로 가져가셨다. 끽해야 이종족인 자신들보다 조금 나은 정도. 하물며 외롭고 냉혹한 현실을 맞닥뜨린 소녀가 무슨 선택을 더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뭔가가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어.’

    로빈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이엘과 함께 ‘목소리’를 직접 만난 유일한 사람이었다. 노아는 아직도 로빈을 온전히 신뢰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놈의 말이 전부 거짓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로빈을 만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노아는 단순히 이엘이 ‘그’와 맺은 계약을 깨뜨릴 방법만 강구했지, 어째서 계약을 해야만 했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건 그녀에게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구태여 지나간 과거를 파헤쳐 봤자 얻을 건 없으리라고 판단해서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에 힌트가 숨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오드 님의 조언으로 뱀을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평생 몰랐을 내용이군.

    어쨌든 지금 자신과 로빈이 할 일은 그거다. 그녀가 ‘그’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그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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